'타임슬립'을 타고 떠나는 과거여행

다니구치 지로의 만화 <열 네 살>

등록 2004.05.06 02:16수정 2004.05.06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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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

고등학교 1학년 가을 무렵이었을 겁니다. 불을 밝히고 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 귀뚜라미 소리가 들렸습니다. 갑자기 어릴 때 살던 고향에 가고 싶은 충동이 생겼습니다. 동전으로 가득 찬 저금통을 들고 몇 시간을 망설였습니다. 마산에서 부산까지 총알택시를 타고 가면 이 저금통에 있는 돈으로 충분할 것이고, 시간상으로도 가능하다는 계산까지 했습니다.

자정 무렵까지 망설이다 포기했지만, 명절을 맞아 부산 큰집에 가면 항상 옛 동네 언저리를 기웃거리던 기억이 납니다. 혹시나 저처럼 어린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보고 싶은 분들이 있다면, 그곳으로 향하는 승차권을 드리겠습니다. 바로 다니구치 지로(57)의 만화 <열 네 살>(샘터 刊)입니다. 이 만화의 원제목은 <머나먼 고향>입니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만화영화나 <공각기동대> <아키라> <신세기 에반게리온> 등 미래를 그린 만화, <드래곤 볼> 등의 초능력 만화, <건담> <아톰> 등의 로봇 만화, <이나중 탁구부> 등의 명랑만화, <삼삼아이즈> 등의 괴기만화에 익숙한 분들이라면 '아니 일본만화에 이런 게 있었어?'하며 놀라실 것입니다.

이 만화는 속도감 있는 연출이나 개성 강한 인물, 화려한 볼거리 등은 없어도 매 장마다 매력이 넘쳐납니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알퐁스 도데의 <별>이나 황순원의 <소나기>를 읽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지도 모릅니다.

48세의 나카하라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출근을 위해 신칸센을 탑니다. 그런데 기차를 잘못 탄 지도 모르고 그는 깜빡 잠이 들고 맙니다. 그 기차는 어머니 산소가 있는 구라요시로 가는 차였습니다. 우연히 3년만에 어머니 산소를 찾은 그는 무덤가에서 다시 잠이 드는데, 일어나 보니 자신은 14세 소년으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시절 담임교사가 그 곳에 있었고, 이미 돌아가신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집나간 아버지와 귀여운 여동생이 있었지요.

'타임슬립'을 통해 과거로 돌아간 나카하라는 너무나 행복했던 가정에 만족하던 아버지가 아무런 이유 없이 가출한 이유를 찾게 됩니다. 14세의 나카하라는 옛 가족, 친구들과 지내게 되면서 너무나 행복해 합니다. 게다가 과거 자신이 선망했던 여학생 나가세에게 사랑고백을 받는 황홀한 경험까지 하게 되지요.

어느 순간 나카하라는 자신이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했던, 48세의 나카하라가 가장으로 있는 가족을 잊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새로운 경험은 이처럼 현재의 가치를 '과거의 가치'로 만들어 버리곤 한다는 사실을 작가는 깨우쳐 줍니다.

'타임슬립'을 통해 과거로 간 나카하라에게 48세의 시간은 과거가 되고, 14세의 시간이 현재가 됩니다. 혹시 그런 경험 한 적 있으세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장소에 갔는데, 왠지 가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현상 말이지요. 미래의 일이 꿈에 나오거나 막연한 느낌 속에 스며든 적은 없으신지요. 사실은 우리 모두는 미래와 또 다른 과거를 체험했지만, '망각의 강'을 건넜기 때문에 단지 기억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다니구치 지로는 과거와 미래가 일방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미 미래를 알고 있고, 미래를 살았다는 것이지요. 다시 48세로 돌아온 나카하라에게 배달된 옛 친구의 소설 <시간의 나그네>는 인간은 누구나 시간 속을 떠돌아다닌다는 암시를 줍니다. 끊임없이 '레테의 강'을 건너면서 새로운 삶을 산다는 것이지요. '죽음은 곧 망각'이라는 메시지는 한편으로는 편안함을 주기도 하면서, '기억'이 얼마나 인간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다시 한 번 각인시켜 줍니다.

<열 네 살>은 '타임슬립'을 통해 옛 시절을 다시 체험하게 만들지만, 그렇다고 추억담이나 그리움에 관한 내용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왜 사는지'를 자문하게 만드는 철학 책에 가깝습니다. 흔히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내가 너희 나이라면' 하고 아쉬워하는 말을 들어 본 적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가출을 이미 알고 있었던 14세의 나카하라는 새로운 과거 속에서도 역시 아버지의 가출을 막지 못합니다. 14세의 몸이지만 48세의 기억을 가진 나카하라는 이미 아버지를 알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열 네 살>은 또한 '대화'에 관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고뇌와 슬픔, 어머니의 사랑 등을 나카하라가 알게 된 것은 순전히 '타임슬립' 때문입니다. '타임슬립'이 없었다면 그는 평생 모른 채 살았겠지요. 결국 인생이란 이처럼 그냥 믿어주고 의지하며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공허함과 빈 공간을 아무리 가족이라 해도 채워줄 수 없다는 사실은 한 편으로는 쓸쓸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대부분 편안한 웃음과 담담한 표정으로 가득한 이 만화는 '화려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림도 사람 만큼이나 단정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선한 눈빛의 사람들, 이타적인 그들의 삶을 읽어가다 보면 은은한 향기가 배어 나오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영화 <첨밀밀>이나 <집으로 가는 길> 등을 본 뒤 느꼈던 기분 좋은 느낌 말입니다. 책에서 온기가 느껴진다면 믿으시겠어요?

열네 살 1 - 꽃이 지기 전, 나는 봄으로 돌아갔다

다니구치 지로 지음,
샘터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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