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삶아 당신을 배불린 42년 세월

[탄생에서 소멸까지 ② - 라면] '제2의 주식'답게 대접해줬으면

등록 2005.11.10 15:47수정 2005.11.10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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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쉽게 만나고 소비하는 것들일수록 그것의 원재료가 무언지, 어떤 과정을 거쳐 완제품이 되는지에 관해서는 무심히 넘어가는 경우가 흔하다. 반면 공정에 대한 궁금증을 가진 이들도 적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마주하는 친숙한 제품의 탄생에서 소멸까지를 직접 제품의 입장이 되어 1인칭 화법으로 서술해보았다. 기획 두 번째 기사는 '제2의 주식'으로 불리는 라면이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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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생산된 한국 최초의 라면. ⓒ 삼양식품 제공

내가 누구냐고? 아래 인터넷에서 다종다양하게 변형된 형태로 떠도는 나에 대한 경배문부터 읽어보시길.

슈퍼와 편의점에 계신 위대한 분이시여. 이름이 사랑을 받사오며, 주린 자에게 임하옵시며, 배고픔이 교도들에게 임할 때면 당신께서 오시리다. 오늘날 우리에게 냄비와 국자와 젓가락을 주옵시고, 이단을 범한 국수를 용서해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밥의 지겨움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삼양라면과 신라면의 은혜가 배고픈 자에게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라면...

맞다. 나는 라면이다. 위는 이른바 '라(면)기도문'. 방금 정의로운 검사를 꿈꾸며 지방에서 상경, 사법시험 준비에 '올인'하고 있는 스물 다섯 복학생 철수는 나를 삶아 먹는 것으로 저녁을 대신했다.

'국물맛을 아는' 철수는 계란과 파 등을 넣어 내가 탁해지고 달콤해지는 걸 막아줬다. 순정한 혈통에 대한 자부심을 가진 나로서는 고마운 일이다. 여기는 철수의 위장. 습하고 어두컴컴한 이곳에서 지나온 내 생을 돌아본다.

밀가루를 가득 실은 트럭의 엔진소리는 내 탄생의 서곡

강원도 원주의 한 라면 생산공장. 밀가루를 가득 실은 트럭의 부르릉거림은 내 탄생의 서곡이었다. 익숙한 솜씨의 직원들은 먼저 밀가루와 배합수 등을 섞어 반죽을 만들었다. 이른바 배합공정이다.

이어 반죽은 롤러에 압연돼 면대로 만들어졌고, 제면기를 통과한 나는 국수모양의 면발이 됐다. 내 특유의 꼬불꼬불한 모양은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를 조절해 만들어낸다. 다음엔 뜨거운 스팀박스를 통과하는데 소화를 돕기 위해서다. 이를 '알파화 과정' 혹은, 증숙 과정이라 부른다.

증숙 이후 일정한 틀에 들어갔다 나오면 나는 80% 이상 제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를 성형 과정이라 지칭한다. 최근 몇 년 새 한국에 열풍처럼 불어닥친 여성들의 '성형'과는 또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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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합공정. ⓒ 농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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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연공정. ⓒ 농심 제공

지나치게 진도가 빨리 나갔다. 잠시 쉬었다가자. 나를 최초로 만든 나라는 어딜까? 힌트를 주자면 '가깝고도 먼 이웃'로 지칭되며 최근 국민전체의 우경화 경도가 인접국들을 긴장시키는 나라다. 맞다. 일본이다.

1958년 오사카에 사는 안도 모모후쿠라는 사람이 '치킨라면'을 만든다. 그는 현재 일본 최대 라면회사 닛신(日淸)식품 회장이다. 출시 초기엔 냉담한 대접을 받다가 이후엔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 연 평균 신장률이 30%에 육박했고, 나의 전성시대엔 생산회사가 300개를 넘어서기도 했다.

한국에서 생산된 나와 일본에서 생산된 나의 가장 큰 차이점은?

한국에선 이보다 5년 늦은 1963년 삼양식품이 회사의 이름 단 삼양라면을 만들었다. 그러니까 한국 최초의 라면은 삼양라면이 되겠다. 현재 업계 1위를 달리고 있는 농심은 1965년 첫 라면제품을 선보였다.

내가 생산되던 초기인 1960년대 일본에서 만든 나와 한국에서 만든 나의 가장 큰 차이는 양이었다. 일본은 개당 중량을 80g으로 가볍게 만든 반면, 한국에서 만든 나의 몸무게는 120g이었다. 부피가 50% 컸던 것이다. 이는 모두가 배고프고 어려웠던 시절 한 끼를 먹어도 든든하게 먹고싶었던 한국 사람들의 바람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싶다.

다시, 내가 태어난 공장으로 돌아가자. 성형공정을 통해 완성품으로서의 모습을 거의 갖춘 나는 정제된 뜨거운 기름(유지)에 들어가 튀겨진다. 이 과정은 내게서 수분을 휘발시키고, 내 몸에 기름을 흡착시킨다. 이렇게 해야만 소화흡수율이 좋아진다.

펄펄 끓는 기름에서 건져진 내가 다음 번에 거쳐야 할 과정은 냉각이다. 말 그대로 뜨거운 나를 상온에서 식히는 것이다. 실온과 동일한 온도로 체온이 떨어진 나는 자동포장기를 통과하면서 옷을 입는다. 알록달록하고 예쁜 옷. 나를 사서 먹을 사람들의 시각적 행복을 고려한 디자인의 중요성은 최근 들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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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면공정. ⓒ 농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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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형공정. ⓒ 농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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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장공정. ⓒ 농심 제공

나와는 떼 놓고 생각할 수 없는 내 평생의 벗 스프가 만들어지는 과정도 궁금할 것이다. 자, 간추린 설명 나간다.

종류에 따라 달라지는 스프의 향신료와 조미료

스프 제작의 가장 첫 단계는 베이스(BASE) 제조다. 쇠고기를 포함한 몇몇 원료들을 고압처리해 진공농축 상태로 만들고, 그것을 진공에서 건조시킨 후 분쇄공정을 통해 가루형태로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스프 베이스에 건조 마늘과 건조 미역, 건조 당근, 건파 등의 조미료와 각종 향신료를 혼합한다. 종류에 따라 혼합 조미료와 향신료가 일부 달라진다. 이 과정이 혼합공정이다. 이렇게 만든 스프를 자동포장기에 통과시켜 용기에 담으면 스프 만들기 끝!

자, 죽 서술만 하고있으니 심심하다. 함께 스피드 퀴즈나 풀어보자. 아래는 나와 관련된 단답형 문제다. 한번 맞춰보시길. 답은 기사 가장 하단에 있다. 미리 보지 말고 머리도 식힐 겸 재미 삼아 동료들끼리 오후 간식 '라면 내기'라도 해보자. 라면 주제에 사람을 테스트한다고 너무 기분 나빠하지는 말길.

1. 2004년 현재 한국의 라면 시장 규모는?
2. 연간 소비되는 라면의 개수는?
힌트) 이걸 모두 세워서 쌓으면 에베레스트산 8만3635개를 합한 높이가 된다.
3. 1963년 최초로 생산된 라면의 가격은?
4. 2005년 한국에서 생산되는 라면은 몇 종류일까?
5. 한국 국민 1인당 1년간 라면 소비량은?


면발을 증숙시켜 유탕 처리한 나 '유탕면'의 형제로는 면발을 호화한 후 건조한 '호화건면' 면을 찌거나 삶은 후 밀봉 포장한 '개량숙면' 비닐포장지가 아닌 용기에 담아 팔려나가는 '용기면(사발면, 컵라면)' 등이 있다. 모두 나 만큼이나 인기가 좋은 형과 동생들이다.

라면을 삶을 때 계란을 넣는 이유는 뭘까

이제 내가 함유한 영양성분을 공부할 차례다. 100g 중량의 내게는 422kcal의 열량과 65g의 탄수화물, 9g의 단백질, 14g의 지방, 그리고 칼슘 등이 들어있다. 성인 한 끼 당 권장열량이 800kcal이니 거기엔 못 미친다. 나를 삶을 때 계란을 넣고, 김치와 함께 먹는 건 모자란 열량을 보충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철수처럼 '순수한 라면의 맛'을 즐기려고 하는 사람도 적지 않아, 나를 끓이는 냄비에 나 외에는 어떤 것도 넣지 않고 끓이는 이들도 숱하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마지막으로 나를 둘러싼 각종 오해를 풀어보는 것으로 내 이야기를 마칠까한다.

밤에 나를 먹고 자면 아침에 '큰바위 얼굴'이 된다? 이건 나를 먹어서라기보다 물을 먹었기 때문이다. 인체는 신체활동을 통해 수분을 배출시키는데, 잠을 자는 동안에는 유입된 수분이 배출되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내가 왜 쫄깃거리냐고? 면을 반죽할 때 감자의 전분질을 넣기 때문이다. 감자전분은 뜨거운 물과 만나면 투명해지고 점성을 지니게 된다. 이를 이용해 나의 폭과 너비도 조정한다.

내가 꼬불꼬불한 이유가 궁금하다고? 자동차 라디에이터의 원리를 이용해 짧은 시간 내에 최대한 많은 양을 익혀주기 위한 고육책이다. 이와 동시에 평균길이가 56.75m에 이르는 긴 나를 조그만 포장지에 쉽게 넣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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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공장의 내부 모습. ⓒ 삼양식품 제공

서양인이 동양인보다 나를 더 잘 소화시키는 이유는...

나를 먹으면 소화가 되지 않는다고? 날 만드는 주원료인 밀가루(소맥분)는 단백질과 탄수화물 등으로 이루어졌다. 단백질의 주성분은 글루텐. 서양인들의 경우 밀가루음식인 빵을 주식으로 이용해왔기 때문에 글루텐을 분해시키는 것이 체질적으로 용이하다. 하지만, 쌀을 주식으로 해온 동양인의 경우 글루텐을 소화시키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의 경우는 나만이 아니라 빵이나 국수도 잘 소화시키지 못한다.

자, 나의 탄생과정에서부터 나에 얽힌 갖가지 정보 그리고, 풀어야할 오해까지를 끝까지 읽어줘서 고맙다. 내일 아침이면 철수의 몸밖으로 나와 정화조로 들어갈 신세지만 난 하나도 서럽거나 하지 않다. 가난하지만 꿈을 가진 청년의 든든한 한 끼 식사가 되어 잠시나마 그를 포만감에 젖게 해준 보람만으로도 내 삶은 가치가 있었다.

글루텐을 잘 소화시키는 철수가 '형사소송법'을 펼쳐 밑줄 그어가며 읽고 있다. 내일 또는, 모레면 또 다른 나의 형제가 철수의 개다리소반 위에 웃는 얼굴로 기꺼이 오르리라. 나를 삶아 당신을 배불리는 운명이 자랑스럽다.

원조와 업계 1위의 자존심 싸움
삼양라면·농심라면...경쟁하며 발전해온 40년

▲ 삼양라면(윗줄)과 농심라면(아랫줄)이 그간 생산해온 각종 제품들.

방송 CF에 나오는 대로 한국 라면의 원조는 삼양이다. 1989년 '우지파동'이라는 커다란 아픔을 겪기도 했지만, 그 오해를 벗고 최근에는 적극적인 판매전략으로 과거의 명성을 되찾으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삼양라면 홍보실도 자신들이 '시초이자 원조'임을 대단한 자부심으로 내세운다. 업계 1위의 자리를 농심라면에 내줬지만, 빼앗긴 1등을 언젠가는 되찾아 오겠다는 의지도 확고하다.

신라면이란 초유의 히트상품을 내놓은 업계 매출 1위 농심라면 홍보실은 라면을 최초로 만든 일본에서도 신라면의 인기가 최고라고 입을 모은다. 한국 관광을 마친 일본인들이 인천공항 면세점에서 라면을 박스째 사가는 걸 보면 자부심도 느낀단다.

현재 한국에서 1년간 생산되는 라면의 개수는 약 37억개. 그중 신라면이 9억개다. 전체 라면시장의 25%를 점유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쯤되면 농심라면 홍보실이 자부심을 가질만도 하다.

서로 경쟁하며, 발전해온 라면 업계 양대 메이저의 총성 없는 전쟁은 소비자들에겐 더 품질 좋은 라면을 맛볼 수 있게 해주는 '맛있는 전쟁'이 아닐지.

덧붙이는 글 | 스피드 퀴즈 정답:
1. 1조4700여 억원
2. 약 37억 개
3. 10원
4. 160여 가지
5. 80여 개

덧붙이는 글 스피드 퀴즈 정답:
1. 1조4700여 억원
2. 약 37억 개
3. 10원
4. 160여 가지
5. 80여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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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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