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덕여고 교사시절 이관술은 지리와 역사를 가르쳤다. 얼굴이 검어 '물장수'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사회평론
이관술이 남긴 흔적은 많지 않다. 고향의 유품은 일제 경찰이 진즉에 압수하여 파괴하였고, 활동시기엔 위험을 무릅쓰고 <적기> 등의 팸플릿을 만들기도 했으나, 저작자임을 밝히기 어려웠을 것이다.
유일하게 남긴 글은 해방 후 현대일보에 연재한 짧은 회상록인데 그 제목이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이다. 48년의 생애 중 20년을 혹독한 고문과 감옥살이, 밑바닥 생활을 하며 활동하고 도피했던 그에게 조국의 인상은 '감옥'이었는가 보다. 더구나 해방된 조국마저 그를 감옥에 보내 최후를 맞게 하였다.
일제시대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만주에서 무장투쟁하기도 했고, 중국에서 임시정부를 세우기도 했고, 혹한의 러시아에서 활동하기도 했고, 멀리 바다건너 미국에서 '외교적으로' 독립을 꾀하기도 했다. 독립운동에 바친 삶은 어느 하나 가시밭길 아닌 것이 없고, 어느 하나 값지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국내에서의 활동은 그야말로 호랑이굴 안에서의 투쟁이 아니었나 싶다. 가가호호 감시하던 일제 치하, 숨 쉬는 것조차 자유롭지 못하던 땅에서 방어벽 하나 없이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몇 배로 힘들고 위험했을 것이다.
더구나 외국인 선교사나 교회의 힘을 빌릴 수도 없었던 사회주의 노동운동가들이 의지할 데라곤 농사꾼이나 노동자로 위장하여 사람들 속에 묻히는 것 밖에 없었다. 체포와 고문과 감옥과 죽음이 시뻘건 호랑이 아가리처럼 벌리고 있던 조국 땅에서 변절하지 않고, 해외로 도피하지 않고, 끝까지 남아 의기를 지켰다는 것만으로 공을 인정받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조국을 단 한 번도 '감옥'으로 느끼지 않고 호의호식했던 친일파가 해방 후 대한민국의 주도권을 쥐고 흔들었다. 독립운동가의 자손들이 가난을 대물림하고 있는 반면, 친일파의 후손들은 재빨리 우익인사가 되어 부와 권력을 잡았다.
일제시대부터 지금까지 오랜 세월 고통 받았던 이관술의 가족들은 최근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에 '정판사 위폐 사건'의 재조사를 요청하였다고 한다. 60년의 세월이 지났고 이관술은 이미 처형당했지만 명예만이라도 회복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자전거를 타고 짐칸의 폐품과 솥단지 밑에 소작쟁의 소식이 담긴 기관지를 남으로는 마산에서 북으로는 함흥까지 페달을 밟으며 날랐던 이관술. 모진 고문을 받은 후에도 사진기 앞에서 엷은 미소 한 가닥 지을 줄 알았던 그에게 역사는 과연 진실을 말해줄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 안재성 지음 <이관술 1902-1950> (사회평론 2006)
이관술 1902-1950 -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안재성 지음,
사회평론,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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