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드와 전투 현장서 떠올린 '혁명가 김산'

[내가 만난 아프리카 ⑮]전설과 신화의 도시, 악숨에 가다

등록 2007.02.08 10:01수정 2007.07.09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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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섯 모양의 악숨 고유 양식으로 만들어진 악숨 공항의 모습. ⓒ 김성호

랄리벨라 공항으로 가는 버스는 하룻밤 숙박비가 400비르(50달러)이상인 로하 랄리벨라 호텔을 들러서 두팀의 승객을 더 태운 뒤 공항으로 달렸다.

최고급 호텔인 로하 랄리벨라 호텔에서 탄 승객 중 한 팀은 유럽 여행객인데, 다른 팀은 에티오피아 여자 2명이다. 마침 내 옆자리에 앉아 인사를 하게 되었는데, 아디스아바바에서 온 여대생들이었다. 이들은 어제 곤다르에서 랄리벨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를 봤다며 반가워했다. 아시아 남자가 혼자서 배낭 메고 여행을 다녀 신기하게 생각했다는 것.

키가 181cm나 되는 늘씬한 엘샤데이라는 이름의 여대생은 3학년생으로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키가 약간 작은 미스티에르라는 여대생은 역시 3학년으로 컴퓨터 의료공학을 전공한단다.

미스티에르는 이미 고등학교 때부터 미국 미네소타에서 4년, 캐나다에서 1년 등 모두 5년 동안 유학하고 돌아왔고, 엘샤데이는 두 달 후인 8월에 중미 코스타리카에 1년 동안 석사과정 유학을 간다고 한다. 외국유학을 갈 정도로 에티오피아에서 부잣집 딸인데도 이들 고대 유적지 여행은 처음이란다.

종교가 궁금해 물어보니 모두 에티오피아 정교회를 믿고 있었다. 그들은 "아디스아바바는 대부분 정교회를 믿고, 동부와 남부 등 농촌지역에서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모두 북쪽에 위치한 악숨 등 4대 고대 유적지 역시 모두 정교회가 국교였을 때 수도였기 때문에 여전히 정교회 신자들이 많은 것 같았다.

고유 건축양식으로 건립된 독특한 악숨 공항

@BRI@랄리벨라 공항에서 역시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악숨에 도착하니 독특한 공항건물 자체가 악숨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공항 건물이 악숨의 고유 건축양식인 버섯모양의, 어떤 사람들은 포경한 남자 성기모양의 도안이라고 말하는, 장식 건물이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3개와 2개씩 달려 있었다.

우리는 악숨 유적지를 함께 구경하기로 하고 같은 호텔에 묵기로 했다. 어차피 악숨 유적지를 하루 만에 모두 보려면 차량을 대절해야 하는데, 우리 셋이서 하나의 차량을 대절하니 비용면에서도 서로 이득이다. 여대생들에게 셋이서 구경해 돈도 아끼고 많은 곳을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며 고맙다고 영어로 "땡큐"라고하자 미스티에르라는 여학생이 바로 "노, 아무생귀날로"라고 말한다.

암하릭어로 '감사하다'는 뜻이 바로 '아무생귀날로'다. 에티오피아에 여행왔으면 '아무생귀날로'는 반드시 알아야한다며 몇 번을 말하게 한다. 내가 몇 번의 서투름 끝에 거의 완벽하게 발음을 하자 그때서야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나는 이 여대생들과 함께 구경하는 동안 '아무생귀날로'를 수십 차례나 반복해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내 입에서 술술 나올 정도가 되었다.

여행을 하다보면 최소한 '감사합니다'라는 기본적인 인사말은 현지어를 익히는 것이 좋다. 현지 언어에 대한 존중과 함께 친근감의 표시로 기본적인 인사말을 현지어로 말하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에티오피아는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에서는 오래전부터 유일하게 암하릭어라는 고유의 말과 문자를 갖고 있으며, 고유 문자가 있으니 기록으로 된 역사가 있는 등 언어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무척 강했다.

다른 아프리카 국가의 경우에는 자기 부족의 말은 있으되 문자가 없기 때문에 대부분 자신의 소리를 영어의 알파벳 문자를 빌려 발음기호를 적어나가는 방식이다. 옛날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기 전 우리 조상들이 중국 한자의 음과 새김을 빌려 우리말을 적던 표기법인 이두와 같다고 할 것이다.

케냐와 탄자니아, 우간다, 말라위, 모잠비크 등 동부아프리카에서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스와힐리어도 아프리카어와 아랍어의 혼용어인데 표기는 영어의 알파벳을 빌려 쓰고 있다. 남아공에서는 17세기부터 네덜란드어를 중심으로 하여 만들어진 아프리칸스어(Afrikaans)가 있지만, 일부 백인계층에서만 쓰일 뿐 일반 흑인들은 자신들의 부족어를 쓰고 있다.

이처럼 다른 아프리카국가들은 말은 있지만, 문자가 없다보니 구전문화에 의존하게 되는 데 에티오피아는 고유문자가 있으니 많은 기록문화를 남기게 된 것이다.

전설과 신화의 도시 악숨에 도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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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렙 왕의 궁전 터로 올라가는 도로의 언덕위에 있는 악숨 가옥. ⓒ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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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렙 왕과 게브레 메스켈 왕의 궁전터와 지하무덤 위에 설치된 철판 간이건물. ⓒ 김성호

오전 11시에 호텔에 도착한 우리는 각자 숙소에서 휴식을 취한 뒤 점심을 먹고 오후 2시부터 호텔의 봉고버스를 타고 본격적인 고대 유적지 답사에 나섰다. 호텔은 역시 중급이어서 인지 그런대로 물도 나와서 샤워를 할 수 있었다. 이틀 만에 샤워를 하니 몸도 한결 가벼워졌다. 봉고버스는 운전사를 포함해 200비르(2만5000원)에 빌려 셋이서 70비르(8700원)씩 나눠서 냈다.

고대 4대 유적지의 마지막 방문지인 악숨은 시바의 여왕의 전설이 서린 곳이자 기독교의 전래, 오벨리스크, 성궤의 신화 등으로 에티오피아 최고의 유적지이다. 오늘날 에티오피아의 문명과 문화, 종교, 역사, 언어의 뿌리가 시작되는 곳이기 때문에 악숨을 보지 않고서는 에티오티아를 말 할 수 없다.

역사적인 사실과 함께 전설, 설화, 우화가 뒤범벅인 악숨은 말 그대로 베일에 가려진 신비의 도시이다. 전설과 신화의 도시에서는 어느 것이 역사적 사실인지 여부를 알아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시의 민중들이 전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가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악숨은 1세기부터 7세기까지 고대 왕국의 수도로 번영을 누리다 이슬람 세력에 밀려 역사에서 잊혀졌던 곳이다. 이미 B.C. 1000여년 전 아라비아 반도의 남쪽, 지금의 예멘 지역에 살던 당시 시바 왕국의 주민들이 홍해를 건너와 원주민인 흑인들과 섞여 살다가 세운 나라가 바로 악숨 왕국이다. 당시 악숨 왕국은 로마제국, 중국의 한나라, 사산왕조 페르시아와 함께 세계를 움직이는 4대 제국으로 손꼽힐 정도로 강성했다.

유명한 시바의 여왕의 전설은 바로 에티오피아인들의 조상이 시바왕국의 주민들이었던 데서 유래한 것이다. 지도를 펴놓고 보면 현재의 에티오피아와 옛날 에티오피아 땅이었던 에리트레아는 홍해를 사이에 두고 아라비안 반도의 예멘과 마주보고 있을 정도로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악숨 왕국 훨씬 이전에 예멘 지역의 아랍계 셈족이 에티오피아지역으로 이주해왔다는 것은 최초의 왕국으로 일컬어지는 예하 왕국 유적을 통해 알 수 있다. 악숨에서 동북쪽으로 버스로 1시간 30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예하에는 B.C. 800여년 전 예멘풍의 신전과 왕궁 유적지 등이 지금도 남아 있다.

지하무덤에는 텅빈 왕의 석관만이 덩그렇게 놓여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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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빈 석관만이 남아 있는 게브레 메스켈 왕의 지하 무덤. ⓒ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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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렙 왕과 게브레 메스켈 왕의 지하무덤으로 가는 돌벽에 새겨진 십자가. ⓒ 김성호

우리가 처음으로 간 곳은 악숨 시내 산허리의 언덕위에 위치한 6세기 때 칼렙 왕과 게브레 메스켈 왕의 궁전 터와 무덤이었다. 차를 타고 가는 데 언덕을 따라 옆으로 농사짓는 밭들이 보인다. 그런데 흙보다는 자갈이 많이 보일 정도로 황량한 사막과 같은 땅이어서 도대체 곡식이 자랄 지 의문이 들 정도이다. 차량운전사는 "우기가 지나서 밭에 씨를 뿌리면 9월경에는 인제라의 재료가 되는 테프가 파랗게 자란다"며 "11월이나 12월에는 수확해 말린 뒤 인제라를 만들어 먹는다"고 한다.

언덕 위에 오르자 평평한 평지가 나오고, 평지 옆에는 빗물이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철판 지붕의 간이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평평한 평지는 옛날 왕궁 터였으나 지금은 폐허만이 남아 있고, 철판 지붕 밑에는 바로 두 왕의 무덤이 놓여 있었다. 왕궁 터와 무덤 뒤로는 작은 산이 있는 데, 나무들이 꽤 푸르게 자라고 있어 옛날에는 주변이 울창한 수풀로 둘러싸여 있었던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70대의 나이든 할아버지가 왕궁 터를 설명한 뒤 지하 무덤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할아버지는 바로 이곳에서 여행객들을 상대로 왕궁 터와 무덤을 설명하는 안내자였다. 무덤의 주인공은 6세기 때 아라비아 남쪽지역까지 영토를 넓히는 등 악숨 왕국의 번성기를 구가했던 칼렙 왕(514~542)과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게브레 메스켈이다.

사각형 석판으로 만들어진 좁은 계단을 따라 밑으로 내려가니 칼렙 왕의 무덤이 나왔다. 돌로 만들어진 3개의 방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고, 하나의 방에만 깨어진 석관이 하나 놓여 있었다. 지하 무덤으로 들어갈 때는 캄캄해 아무 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노란색의 나무 막대기 같은 초에 불을 붙여 하나씩 손에 들고 구경을 해야 했다.

칼렙 왕의 무덤 바로 옆에는 게브레 메스켈 왕의 무덤이 있는 데, 모양과 양식은 비슷하지만 더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게브레 메스켈 왕의 무덤으로 들어가면 5개의 방으로 되어 있는 데, 한 방에는 세 개의 텅 빈 돌로 된 석관이 놓여 있었다. 이 관중 하나는 네 동강으로 잘라져 있었는데 도굴범의 소행으로 보인다. 관을 둘러보는 데 옆방에서 '파닥 파닥'하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박쥐들이 천장에 붙었다가 사람 인기척에 놀라 날아가는 것이었다.

무덤 안의 돌 벽에는 그리스식 십자가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데, 이것은 바로 이 무덤이 기독교가 악숨 왕국의 정식 국교로 채택된 4세기 이후인 6세기 때에 만들어진 것을 보여주고 있다. 무덤에는 금과 진주, 상아 등 에티오피아의 보물 등이 가득 묻혀 있었다고 전해지는 데, 텅 빈 무덤이 보여주듯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도굴꾼들에 의해 유물은 사라지고, 남아 있는 텅 빈 무덤과 폐허가 되어 자갈 마당으로 변해 버린 왕궁 터는 쓸쓸한 역사의 현장을 보여주고 있었다.

에티오피아 독립전쟁의 현장 아드와 산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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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렙 왕과 게브레 메스켈 왕의 궁전 터 언덕에서 찍은 아드와 산맥 방향 모습. ⓒ 김성호

왕궁 터에서 사방을 둘러보니 확 트인 경관이 아름답다. 남쪽으로는 악숨 시내가 보이고 북쪽은 에리트레아 방향이다. 동쪽으로는 뾰족뾰족한 모양의 아드와 산맥이 멀리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악숨에서 동쪽으로 27km 떨어진 아드와는 에티오피아인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아드와 전투의 영광이 서린 곳.

고구려 때 수나라의 100만 대군을 무찌른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이나 조선 때 일본 수군을 패퇴시킨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대첩, 일제시대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대첩, 김일성 빨치산 부대의 보천보전투 등과 비슷하다고 할까.

지난 1896년 2만여명의 이탈리아 침략군을 무찔러 독립을 지켜낸 에티오피아의 역사적 승리의 장소이다. 에티오피아에서는 지금까지도 아드와 승전일인 3월 2일을 국경일로 지정해 기념하고 있을 정도. 당시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에 욕심을 가진 것은 1869년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완공으로 다시 홍해와 동인도를 잇는 무역항로의 거점인 에티오피아의 전략적 가치가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당시 에티오피아 영토였던 홍해 연안의 항구도시들은 지금은 에리트레아와 지부티로 독립해 현재 에티오피아는 바다가 없는 내륙국으로 지리적 고립상태에 놓여 있다. 에티오피아가 지난 1991년까지 에리트레아의 독립을 허용하지 않으려 했던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에리트레아 독립으로 바다로 가는 길을 모두 잃게 되기 때문이었다.

솔로몬의 후예를 내세운 당시 메넬리크 2세(1884~1913) 황제와 함께 아드와 전투의 승리 주역 중 한 사람이 황제의 사촌이면서 이슬람 도시인 하라르 총독이었던 라스 마콘넨. 하라르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침략자에 대항해 싸웠던 라스 마콘넨은 바로 마지막 황제인 하일레 셀라시에의 아버지다. 하일레 셀라시에가 나중에 황제 자리에 오르는 데는 민족적 영웅이라는 아버지의 후광도 컸다.

아드와 전투는 에티오피아의 독립을 지켜냈다는 것 뿐 아니라 백인의 유럽제국주의세력이 흑인의 아프리카 대륙을 식민지배하려다 패배한 거의 유일한 전쟁이라는 점에서 에티오피아인들의 자부심은 이루 말 할 수 없다. 거의 모든 아프리카 대륙이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사이에 순식간에 유럽 제국주의의 식민지 상태로 떨어졌으나 동부의 에티오피아와 서부의 라이베리아 정도만이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아드와 전투는 아프리카인들의 자부심과 자존심을 한껏 높였을 뿐 아니라 에티오피아가 아프리카의 상징으로 떠오르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를 구세주로 여기는 라스타파리교 역시 에티오피아를 아프리카의 상징으로 여기는 흑인들의 이런 인식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끝내 아리랑을 부르지 못했던 혁명가 김산의 모습이 아른거리고

멀리 보이는 아드와 산맥을 바라보니 에티오피아군에 패해 혼비백산 쫓겨 가는 이탈리아 군대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백두산과 만주벌판, 러시아의 시베리아에서 일제에 대항해 해방투쟁을 벌이던 김산을 비롯한 우리 독립투사들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젊은 시절 미국의 여류작가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을 통해 처음 김산을 만났을 때 나의 심장은 마구 뛰고 있었다.

어린 시절 국사교과서에서 독립운동사를 배울 때 뭔가 2% 부족해 허전해 하던 나의 마음을 꽉 채워주던 혁명가 김산. 그를 만났을 때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은 내게 자랑스런 역사로 다시 태어났다. 민족분단으로 독립운동마저 이념적 분단을 맞았던 비극에서 김산은 나에게 독립운동의 통일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최소한 독립운동사에서만큼은 그것이 민족주의 계열이든 사회주의 계열이든 하나의 민족해방, 항일투쟁으로 자리매김했다.

체 게바라보다 30여년이나 먼저 자유와 민족해방을 위해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우리의 혁명가 김산. "자유를 위하여 그리고 자기가 믿는 것을 위하여 싸우다 의식적으로 죽는 것은 비극이 아니다"고 말한 김산은 한반도와 일본, 만주, 중국 등 혁명이 필요로 하는 곳은 어디든 마다하지 않았다. "세계 어디에서든 불의가 저질러지면 그것에 분노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 체 게바라가 인간해방을 위해 아르헨티나와 쿠바, 콩고, 볼리비아를 마다하지 않았듯이.

게바라가 조국 아르헨티나와 쿠바를 떠나 이국 땅 볼리비아의 산속에서 39살에 기꺼이 죽음을 맞이했듯이 김산도 해방을 맞지 못하고 중국 땅에서 33살의 짧은 생을 마감해야 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제에 의해 짓밟히자 14살의 어린 나이에 장지락이라는 본래 이름을 버리고 민족해방을 위해 압록강을 건넜던 김산은 "자유는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투쟁을 통해 쟁취하는 것"이라며 기약 없는 혁명의 길에 나섰다. 자신이 넘어갔던 압록강 건너 만주벌판의 '마지막 아리랑 고개'를 언젠가 아리랑 노래를 부르며 동지들과 어깨동무하고 되돌아오리라 다짐하면서.

자유와 독립, 인간해방의 깃발을 높이 앞세우고 압록강 넘어 '조선의 아리랑 고개'를 다시 넘어오리라는 희망 속에 조국을 떠났으나 끝내 아리랑 노래를 부르지 못했던 선조들이 어찌 김산뿐이랴. 우리나라나 에티오피아든 우리가 지금 누리는 자유와 독립, 인간해방에는 수많은 민중과 선조들의 피와 투쟁이 어려 있는 법. 세계 어디를 가나 그 나라의 독립투쟁의 숨결이 숨 쉬는 곳에 가면 경건해지는 것은 우리의 5000년 역사가 외세와 식민지배에 대한 끊임없는 투쟁의 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석을 옮기는 자는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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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의 로제타석이라 불리는 에자나 왕의 비석과 에티오피아 여대생. ⓒ 김성호

칼렙 왕의 무덤에서 조금 내려오면 오른쪽에 오두막집 같은 조그만 간이 건물이 있다. 4세기 때 악숨 왕국의 최전성기를 누렸던 에자나 왕의 비석이다. 비석에는 당시 수단 동부에서부터 홍해 건너 아라비아 남쪽인 예멘지역까지 영토를 확장시켰던 에자나 왕의 전투 승리 기록과 함께 기독교를 국교로 공식 지정한 사실까지 기록되어 있다. 한마디로 에티오피아의 살아 있는 고대 역사교과서이다.

에자나 왕은 서기 333년에 당시 국교를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함으로써 서기 301년 아르메니아에 이어 에티오피아를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한 나라로 만든 인물. 기독교는 오랫동안 에티오피아의 국민통합의 구심체로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에피오피아 정교회는 여전히 유대교의 영향을 많이 받아 금요 금식과 토요일 안식일, 돼지고기 등 금지, 그리고 할례의식 등을 준수하고 있다.

이 비석은 3개의 다른 언어로 씌어져 있었는데, 안내자에 따르면 옛 아라비아 남쪽 왕국으로 에티오피아인의 조상이었던 시바어와 고대 에티오피아어인 게이즈어, 그리고 그리스어란다. 자신의 영토정복 등 치적을 새긴 고구려시대 광개토대왕비와 신라시대 진흥왕 순수비와 같은 성격의 비석이며, 서로 다른 3개 언어로 이루어진 역사적 기념비라는 점에서는 이집트의 상형문자와 아랍인의 민간문자, 그리스어로 새겨진 B.C. 196년의 이집트 로제타석과 비유된다.

에자나 왕의 비석은 지난 1981년 한 농부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무시무시한 저주의 글 때문에 발견된 장소 그대로 보관하고 있다. 아라비아 정복에 대해 신에 감사하는 내용의 글과 함께 비석에 씌어져 있는 저주의 글은 다음과 같다.

"이 비석을 감히 옮기는 사람은 누구든 갑자기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이 저주의 글을 보고 정말 누가 감히 비석을 옮기려하겠는가. 에자나 왕의 비석과 거의 같은 내용의 비석은 이곳 뿐 아니라 시내 중심가의 에자나 공원에도 세워져 있다. 당시 에자나 왕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비석이 여러 개 세워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에자나 왕은 세계 최초로 십자가를 새긴 동전을 발행하기도 했다.

전설적 기독교 국가 '프레스터 존'의 나라로 알려졌던 에티오피아

4세기 에자나 왕에서부터 6세기 칼렙 왕까지 홍해를 중심으로 이집트와 지중해, 수단, 아라비아, 인도 등을 잇는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로서 번성하던 기독교 국가 악숨 왕국은 7세기부터 아라비아 반도에서 부상하기 시작한 이슬람 세력이 홍해를 지배하게 되자 종교적·경제적·지리적으로 고립되면서 쇠퇴하게 됐다.

이슬람세력에 의해 밀려나던 기독교 국가 에티오피아와 역시 질풍노도처럼 아라비아 반도를 시작으로 아프리카 북부, 중동을 거쳐 동유럽을 위협하는 이슬람세력에 위협을 느끼던 기독교 국가 유럽이 서로를 간절히 필요로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11세기말부터 13세기말까지 팔레스티나와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들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십자군을 파견했던 서유럽 기독교도들은 에티오피아를 전설속의 왕인 '프레스터 존'이 다스리는 나라로 생각했을 정도.

중세 유럽 사람들은 동쪽 나라에 강력한 기독교 국가를 건설한 프레스터 존이라는 위대한 왕이 언젠가 자신들의 이교도에 대항한 성전에 합류할 것이라는 전설을 믿고 있었다.

서유럽에서 15세기 초부터 시작된 아프리카 해안 탐험과 지리적 대발견을 이끌어낸 대항해는 무역거래의 목적 뿐 아니라 바로 프레스터 존의 나라, 즉 에티오피아를 찾아 기독교 연대를 하려는 정치적 종교적 목적도 짙게 깔려 있었다. 아프리카 국가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에티오피아가 서유럽국가와 전통적으로 돈독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 데는 이런 역사적 맥락이 깔려 있는 것이다.
#에티오피아 #악숨 #아드와 #칼렙 왕 #에자나 왕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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