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천재시인 랭보가 하라르에 간 이유

[내가 만난 아프리카 21] 금단의 이슬람 도시 하라르 성곽도시 탐방

등록 2007.03.31 19:34수정 2007.03.31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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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르 성곽의 정문 입구. ⓒ 김성호

테우오드로스 호텔에 짐을 풀고 점심을 먹은 뒤 오후 1시 20분께부터 금단의 이슬람 시가지 탐방에 나섰다. 레게 머리에 헐렁한 바지를 입어 약간 덜렁덜렁거리는 모습의 그 젊은 안내자와 함께. '성곽도시'라는 말 그대로 하라르는 여전히 돌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지난 1535년 악숨을 침략해 시온의 성 메리 교회를 파괴한 '왼손잡이'라는 별명의 이슬람 지도자 아흐마드 그란이 제일라에서 발흥한 뒤 이슬람 성전을 외치며 일어난 곳도 바로 여기 하라르.

그 후 16세기 오로목 부족 등 외부세력의 침략을 막기 위해 도시 주변을 4m 높이의 성곽으로 쌓았으며, 다섯 개의 문만을 내어 철통 같은 성곽도시로 만들었다. 현지인들은 이 성곽을 '주골(Jugol)'이라고 부른다.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 화폐 등을 갖춘 독립적인 이슬람 도시국가였던 하라르는 1875년부터 10여 년간 이집트의 지배를 받다가 1887년 메넬리크 2세 황제에 의해 에티오피아 영토로 통합되었다.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아프리카와 중동, 인도의 중계무역 상업도시로써 번영을 누렸으나 1902년 아디스아바바와 지부티를 연결하는 철도가 디레다와를 지나감으로써 급격히 쇠퇴하게 된 것.

금단의 도시에 들어선 이교도, 탐험가 리처드 버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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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르 성곽안의 도로와 푸른색 건물들. ⓒ 김성호

하라르는 150년 전 영국의 탐험가 리처드 프랜시스 버튼이 방문하기까지는 이슬람교도가 아닌 외국인에게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던 금단의 도시였다. 리처드 버튼은 1855년 하라르의 성곽 안으로 들어갔다 살아돌아온 최초의 유럽인인 셈.

하라르에는 "기독교인이 성곽 안으로 들어오면 도시가 멸망할 것"이라는 미신 같은 계시가 있었기 때문에 이교도의 출입은 일체 허용되지 않았으며, 몰래 들어오는 경우에는 처형을 했다고 한다.

당시 아프가니스탄 순례자로 변장해 아라비아반도 메카에 잠입하기도 했던 영국의 동인도군 장교였던 리처드 버튼은 이번에는 아랍상인으로 위장해 영국령 소말릴 랜드의 제일라 항구에서 출발해 하라르에 들어갔다.

제일라 항구는 모로코의 이슬람 여행가인 이븐 바투타가 지난 1329년 홍해를 여행하면서 '물고기와 낙타의 피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지저분한 도시'로 묘사한 그곳.

리처드 버튼은 하라르 방문 이후 존 해닝 스피크와 함께 백나일강 수원을 찾아 아프리카 내륙 탐험에도 들어가 1858년에는 탄자니아의 탕가니카호를 발견하기도 했다. 그는 아랍어와 힌두어 등 여러 나라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아라비안나이트> <카마수트라> 등을 번역하기도 하는 등 다재다능한 재주를 가졌던 인물이었다.

하라르에 열흘 동안 머물렀던 리처드 버튼은 <동아프리카에서의 첫발(First Footsteps in East Africa)>이라는 여행기에서 동쪽의 에레르 문을 통해 성곽 안으로 들어가면서 "30여분 동안 문 입구에서 기다린 후 되돌아온 성곽 파수꾼으로부터 안으로 들어와도 좋다는 말을 듣고 가이드가 끄는 노새 등위에 다시 올라타고 큰 도로를 따라 좁은 오르막길로 올라가는데, 페로트(Perote. 영국 지명) 도로보다 더 울퉁불퉁한 도로 표면에는 바위들이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었다"고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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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안의 메드하네 알렘 교회. ⓒ 김성호

나는 리처드 버튼과 정반대의 서쪽에 있는 하라르 문으로 들어갔다. 정문으로 알려진 하라르 문은 블록과 시멘트로 만들어졌다. 차도로는 일제 트럭이 지나가고 차도 양옆으로 세워진 아치형의 네모난 블록으로 만든 인도로는 사람들이 걸어서 드나들고 있었다. 하라르 문 입구 왼쪽에는 빨간색 바탕에 흰색의 암하릭어와 검은색의 영어로 'SHERIEF G.GLASS WORK'라는 간판이 있는데, 유리공장의 간판이다.

하라르 문은 성곽의 가장 높은 지대에 있는 문이어서 리처드 버튼이 들어온 문과는 달리 거꾸로 내리막길로 내려갔다. 도로는 바위가 아니라 아스팔트로 깔려 있었다.

건물들은 주로 흰색과 파란색으로 칠해져 있었는데, 지나가는 택시도 자세히 보니 차체는 모두 파란색이고 지붕만 흰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이슬람 사원과 기독교 교회, 일반집의 지붕과 대문들도 흰색과 파란색을 칠한 곳이 많았다. 하라르 사람들은 흰색과 파란색을 특히 좋아하나보다.

길가는 여인네들의 옷은 주로 원피스 형태의 통치마이다. 그런데 색상은 빨강·파랑·자주색 등 원색의 화려함이 눈길을 끌었다. 이슬람 여성들이 쓰는 머리 수건도 흰색과 빨강·회색 등 다양한 색깔을 쓰고 있었는데, 눈만 내놓고 얼굴 전체를 가리는 차도르나 히잡을 쓰는 여성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남자들도 대부분 일반 바지를 입고 일부 이슬람교도만 룽기라 불리는 하얀 천을 치마처럼 두르고 다녔다. 이슬람 도시 하라르의 여성들 옷차림도 머리수건 말고는 다른 도시와 큰 차이 없이 자유로운 듯했다.

여기저기 환각효과 나뭇잎 차트를 파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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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각효과가 있는 나뭇잎 차트 시장. ⓒ 김성호

하라르 문에서 조금 걸어 내려오자 사거리가 나타났다. 말을 사고파는 마시장이라는 뜻의 페레스 마갈라라는 작은 광장이다. 성곽의 여러 문에서 들어오는 길들이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애초 5개였던 성곽의 문은 1889년 메넬리크 2세 황제가 두 개의 문을 더 만들어 모두 7개.

왼쪽으로는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인 아르튀르 랭보가 한때 묵었다는 하라르 호텔이 보이고, 정면에는 지붕 위에 십자가가 있는 메드하네 알렘 교회가 이슬람 도시 한복판에 우뚝 솟아 있었다. 이 교회는 처음 이집트식 이슬람 사원으로 지어졌으나 1940년대에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에티오피아 정교회 건물로 바꾸었다.

교회에서 조금 내려오자 길옆에 햇볕을 가리는 파라솔을 설치해 놓고 그 아래서 여인네들이 파란 나뭇잎을 팔고 있었다. 씹어서 즙을 먹으면 환각 효과가 있는 차트(카트)였다.

파라솔을 설치한 것은 파는 사람들이 뜨거운 햇볕을 피하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실제로는 차트 나뭇잎의 신선도를 보호하기 위한 것. 안내자는 "차트는 하루가 지나면 효과가 많이 떨어진다"며 "푸른 잎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그늘에 보존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커피와 함께 차트의 생산지로 유명한 하라르의 성곽 곳곳에서는 차트를 파는 시장을 볼 수 있었다. 졸음을 쫓고 머리를 맑게 하는 효과가 있는 차트는 에티오피아 정교회와 이슬람 성직자들이 수행과 기도를 위해 사용할 뿐 아니라 아디스아바바와 바하르다르, 하라르 등 어디서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심심풀이로 씹으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가 어릴 때 시골에서 옥수수 대를 씹으면서 달콤한 즙을 먹는 것과 같이 에티오피아에서는 차트를 들고 다니면서 씹고 있었다.

프랑스의 천재시인 랭보가 하라르에 온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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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시인 랭보의 박물관. ⓒ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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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보 박물관의 2층 사진 전시실. ⓒ 김성호

차트 시장을 지나 좁은 골목길로 빠져드니 리처드 버튼이 말한 대로 길바닥이 삐죽삐죽 튀어나온 바위 돌로 깔려 있었다. 옛날 도시의 뒷골목 그대로였다. 골목길을 조금 지나자 나무로 깔끔하게 지은 2층짜리 가옥이 나타났다. 프랑스 시인 아르튀르 랭보 박물관이자 자료실.

랭보는 하라르에 머무는 동안 하라르 호텔 등 몇 군데서 머물렀는데, 이 박물관은 바로 랭보가 머물던 곳 근처에 랭보가 죽은 뒤 인도 상인이 지은 건물이다. 하라르에는 지난 1887년 이후 많은 인도상인들이 들어와 인도풍의 집들을 짓기 시작했다.

박물관 1층은 하라르 역사에 대한 책들이 보존되어 있는 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었고, 2층에는 랭보의 삶을 보여주는 사진과 프랑스어로 된 작품과 편지, 하라르의 전통 예술품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2층에서 내부를 통해 한층 더 올라가니 넓은 실내 옥상 베란다가 나오는데, 마치 전망대처럼 지어놓았다. 베란다 창문을 통해 하라르 시내를 거의 다 볼 수 있고, 멀리 체르체르 산맥도 구경할 수 있었다. 옥상의 베란다를 환상적인 전망대 역할을 하도록 지은 인도인들의 건축술이 놀라웠다.

프랑스의 천재시인인 랭보가 지난 1880년 26살의 젊은 나이에 시를 버리고 세상을 등지며 멀리 이곳 하라르까지 온 이유는 무엇일까.

"속박되어 꼼짝 못하는 한가로운 청춘, 자질구레한 걱정 탓으로 내 인생을 망쳐 버렸네. 아아, 내 마음이 열중할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오게 해다오"(<가장 높은 탑의 노래>라며 10대 중반에 천재시인으로 혜성처럼 등단했으나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한 랭보.

그는 "나는 가리라, 멀리, 저 멀리, 보헤미안처럼, 여인을 데려가듯 행복하게, 자연속으로…"(<감각>)라고 외치며 아프리카 대륙 하라르로 찾아왔다. 그가 찾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인간 본연의 자유와 자신을 억누르던 익숙한 것들로부터의 이탈이었을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 커피와 동물가죽 무역상으로 왔던 랭보는 무기거래상으로 변모하며 11년 동안 이곳에 머물렀다. 당시 메넬리크 2세 황제와 그의 사촌이자 하라르의 총독이며,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아버지인 라스 마콘넨과 두터운 친분을 가졌던 그는 유럽제 소총과 무기 등을 그들에게 팔기 시작했다. 랭보가 판 무기는 1896년 에티오피아가 아드와 전투에서 이탈리아 침략군을 물리치는 데 기여하게 된다.

랭보가 다리를 절단하고 프랑스 마르세이유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요양하고 있을 때인 1891년 7월 12일 라스 마콘넨은 랭보에게 편지를 보내 "건강을 되찾아 다시 하라르로 돌아와 사업을 재개하기를 바란다"고 각별한 우정을 나타내기도 했다.

랭보의 처절한 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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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보 박물관의 2층 편지와 작품 전시실. ⓒ 김성호

랭보가 하라르에 머물 때 쓴 편지 중에는 '그 누가 커다란 사랑에 관해서 말하리'라는 제목의 시도 들어 있다.

"아, 나는 이제 인생에 아무런 미련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나의 삶 자체가 매우 피곤한 것이었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었습니다.

요즘은 하루하루가 피곤의 연속이며 기후 또한 참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우스꽝스러우리만큼
격렬한 슬픔에 빠진다 할지라도
스스로 생명을 단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도 평생을 살아가면서 몇 년쯤의
참된 규칙을 가져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이 단 한 번으로 끝난다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사실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백인으로서는 드물게 지역주민들과 친하게 지냈으나 랭보의 삶 자체가 결코 행복했던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17살의 어린 나이에 "시인이 되기 위해 가능한 최대한도로 방탕하겠다"고 선언했던 그는 현실 도피를 통해 행복을 추구했으나 아프리카 대륙에도 그가 찾던 행복은 없었던 것이다.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마는 어린 나이에 여러 차례의 가출과 열차 무임승차로 인한 감옥 생활, 동성애와 배신감, 연인으로부터의 총상, 용병 입대 등은 그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시련이었던 것일까. 1891년 오른쪽 무릎 관절염에 걸려 하라르를 떠나 치료를 위해 프랑스로 갔으나 다리를 절단해야 했고, 그해 37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나는 랭보 박물관을 떠나며 "나는 거울 있는 실내로 몰래 들어간다. 나를 거울에서 해방하려고"라는 시 <오감도>를 쓴 우리의 천재시인 이상(1910∼1937)을 떠올렸다.

자의식의 분열을 노래했던 이상도 27살의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요절했다. 그러고 보니 얼굴살이 빠져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고뇌하는 듯한 이상의 초상화가 랭보 박물관에 있는 얼굴이 홀쭉하고 우수에 젖은 랭보의 초상화와 왠지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옛 저택은 전통 치료사의 집으로 바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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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신혼시절 집. ⓒ 김성호

랭보 박물관을 나오다 보면 바로 옆에 인도풍의 2층 집이 보인다. 라스 타파리의 집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하라르 총독 생활시절과 신혼생활을 즐겼던 집이다.

하라르 북쪽 에자르소 고로(Ejarso Goro) 지역에서 태어난 라스 타파리는 하라르 초대 총독이었던 아버지 라스 마콘넨이 죽자 이복형에 이어 하라르 총독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라스 타파리는 하일레 셀라시에가 황제가 되기 전 불렸던 '라스 타파리 마콘넨'이라는 이름에서 따온 것.

집은 인도 무역상이 지어 랭보 박물관과 양식이 비슷하게 보였으나 수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많이 낡아 있었다. 밝은 하늘색으로 건물 벽을 칠한 라스 타파리의 집은 현재는 전통 치료사가 거주하고 있었다.

전기계량기 밑에 영어로 된 네모난 광고간판에는 치료사의 이름은 '색 하지 부시라(SAEK HAJI BUSHRA)'라고 쓰여 있고, 치료하는 질병으로는 기관지 천식·당뇨병·암·정신병·간질 등 11가지를 나열해 놓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마지막 구절인데, "치료는 비록 약이 대가 없이 제공되지만 신의 도움에 의해 이뤄진다, 환자와 단체를 포함한 모든 다른 사람들은 자신이 자신에게 감사할 수 있다면 우리를 돕는다"라고 쓰여 있었다. 신의 도움에 의해 치료한다는 광고도 그렇지만, 치료비는 알아서 달라는 뜻인지 헷갈린다.

하라르는 하일레 셀라시에 뿐 아니라 그에 의해 쫓겨난 이야수 5세 황제와도 연관이 깊은 곳.

1913년 황제에 오른 뒤 이슬람 우대정책을 펼치던 이야수 5세는 가끔 하라르를 방문하기도 했는데, 1916년 당시 하라르 총독이었던 하일레 셀라시에와 황실의 기독교계 귀족들이 연합한 쿠데타로 쫓겨났다. 결국 이야수 5세는 하라르 남쪽 지라와(Girawa) 지역에 감금되어 귀양살이를 하다 사망했다.

골목길을 따라 내려오는 하라르 커피공장의 진한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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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층짜리 전통적인 아다레 가옥. ⓒ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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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레 전통가옥에 있는 화려한 공예품 판매 가게. ⓒ 김성호

이어 찾아간 곳은 사각형에 평평한 지붕의 아다레(하라르) 전통가옥으로 된 선물가게였다. 마치 여행의 단골코스인 듯 안내자가 이끌었다. 하라르에는 단층에 3개의 방과 안마당으로 이루어진 아다레 전통가옥과 2층짜리 단순한 사각형 건물에 거리의 전망을 볼 수 있도록 옥상 베란다를 갖춘 인도양식의 가옥, 그리고 이 둘을 섞은 혼합가옥 등이 섞여있다.

아다레 전통가옥 안에 있는 선물가게에는 화려한 색상으로 만든 접시와 바구니, 호박 구슬로 만든 목걸이 등 전통공예품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정말 여행객의 구미를 당기는 물건들이 많았다. 배낭여행객이어서 선물을 사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긴 채 선물가게를 나와 다시 언덕길로 조금 올라갔다.

언덕길 아래로 어디서 흘러나왔는지 진하면서 독특한 냄새가 내 코끝을 먼저 반겼다. 하라르 커피 공장이다. 아주 작은 규모의 커피공장이었지만 곳곳에 커피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다. 50대 초반의 남자 주인이 커피를 직접 기계로 만들어 봉지에 담아 '하라르커피'라는 이름으로 팔고 있었다.

하라르커피는 모카커피의 원료로 사용되는 독특한 맛으로 유명한 고급커피이다. 미국의 스타벅스와 상표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에티오피아 커피 중 하나. 커피 공장 안에는 커피 원두를 볶고 기계로 빻다 보니 커피의 진한 냄새가 가득했다.

커피를 맛보았는데, 역시 신 듯하면서도 진하고 강렬한 맛이 입안을 적신다. "커피는 지옥만큼 어둡고, 죽음만큼 강하고, 사랑만큼 달콤하다"는 터키 속담은 바로 하라르커피를 두고 하는 말이다. 커피의 향을 한꺼번에 이렇게 많이 코와 입으로 느껴보는 것도 하라르에서만 느낄 수 있는 재미이다.

리처드 버튼은 책에서 "하라르커피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유럽시장에 너무나 잘 알려졌다"고 썼다. 랭보가 이 곳에 처음 온 이유도 프랑스 커피회사의 하라르 현장책임자로서 모카커피에 사용되는 하라르커피를 수입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하라르커피는 유럽 사람들의 입맛을 당기고 있었다. 하라르커피는 풍부한 향과 신맛이 섞여서 전체적으로 와인 맛이 나는 최고급 커피로 유명하다. 안내자는 "최근에는 국제 커피가격이 예전에 비해 많이 떨어져 주민들이 커피나무보다는 수익성이 높은 차트나무를 많이 재배한다"고 한다.

우리는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잔에 5000원을 주고 마시는데 정작 하라르커피 재배농민들은 수익성이 낮아 커피 농사를 기피하고, 환각제가 있어 인근 에리트레아에서는 마약으로 분류해 사용을 금지하는 차트 농사를 짓는다니 안타까울 뿐이다.

이슬람 사원과 기독교 교회, 가톨릭 성당이 공존하는 평화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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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쪽에 보이는 흰 탑이 이슬람 사원. ⓒ 김성호

커피의 진한 맛을 옷에 흠뻑 적신 채 골목길을 나와 큰길로 조금 올라가자 인상적인 이슬람 사원이 나타났다. 파란색으로 칠해진 이 사원은 돔 형식의 지붕과 등대 모양의 두 개의 높은 쌍둥이탑 위에 초승달 모양의 상징이 꼭대기에 솟아 있다.

특히 쌍둥이 탑이 눈에 들어왔다. 16세기에 세워진 하라르의 가장 대표적인 자미 사원이다. 하라르에는 자미 사원뿐 아니라 성곽 안에만 90여 개의 사원과 100여 개 이상의 이슬람 성인의 무덤과 신사(神社)가 있다고 한다.

에티오피아에서 이슬람과의 관계는 기독교와 에티오피아의 관계만큼이나 특별하다. 예언자 마호메트의 말씀을 기록한 '하디스(전승)'에 따르면 마호메트의 시중을 든 여인이 바로 에티오피아 출신이었으며, 아라비아에서의 박해를 피해 서기 615년 자신의 딸과 사위이며 후계자인 우트만을 포함한 일부 추종자들이 에티오피아 악숨에 피신했다가 박해가 끝난 뒤에 돌아왔다고 한다. 이슬람 초창기 때부터 에티오피아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이야기.

자미 사원 건너편에는 성 메리 가톨릭 성당도 있다. 특별한 종교를 믿지 않는 나는 사실 건물의 모양만으로는 어떤 종교시설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지붕 위를 자세히 살펴보니 재미있는 차이가 나타났다.

기독교 교회와 가톨릭 성당은 지붕 위에 십자가가 달렸었는데, 이슬람 사원은 지붕 위에 초승달 모양의 상징만이 달렸고, 이슬람 성인의 무덤과 신사라는 곳에는 초승달 모양 위에 별모양의 상징이 함께 달렸었다. 이슬람의 사원과 무덤의 차이는 별모양의 상징이 있는지 여부이다.

1㎢의 작은 하라르 성곽은 이슬람 도시인데도 이슬람 사원뿐 아니라 기독교 교회, 가톨릭 성당 등이 나란히 마주보고 있고, 인종도 오로모족을 비롯해 암하라, 하라리, 구라게, 소말리, 티그레이족 등 다양하고, 전통적인 하라르 가옥과 인도식 가옥, 인간과 하이에나 등이 함께 사는 공존의 도시이다.

지난 2004년 유네스코에 의해 하라르가 세계 평화도시로 선정된 이유도 바로 이런 좁은 공간에서 다양한 인종과 종교가 특별한 갈등 없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 높이 평가받았기 때문.

더운 날씨에 성곽 안의 좁은 골목길과 언덕길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구경하다 보니 땀도 많이 나고 허기가 느껴졌다. 길거리에 팔고 있는 과일을 사려고 물어보니 망고란다. 망고만 먹으면 두드러기가 나고 피부가 부어오르는 알레르기가 있는 나는 다른 과일을 찾았으나 없었다.

안내자는 "요즘은 하라르에는 망고밖에 없다"고 한다. 결국 과일을 사지 못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 돌아오니 주인과 동네 사람 몇 명이 차트 나뭇잎을 한 다발 옆에 놓고서 씹고 있었다. 나에게도 씹어보라며 권한다. 한 잎 따서 씹어보니 일반 나뭇잎을 씹을 때 나는 떫은 맛이 날뿐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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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묵었던 테우오드로스 호텔. ⓒ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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