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명찰 안 달아서 학생들 교사 이름 모르나?

"19년차 교사 명찰 달고..." 기사에 대한 반론 혹은 다른 생각

등록 2007.06.11 15:11수정 2007.06.11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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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정훈

지난 9일 박병춘 기자의 "19년차 교사, 명찰 달고 학교 다닙니다"(6월 9일 메인톱)라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고교 교사로서 학교 현장에서 겪은 '이름'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 놓은 글입니다.

저 역시 고교 교사로서 박 기자님의 기사 내용에 일정 부분 공감하지만 문제의 접근과 해결 방식에 있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 고민하다가 이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박 기자님 글의 요지를 거칠게 간추려보면 "올바른 인간관계를 가르치는 학교에서 학생이 교사의 이름을 모르고 지나친다는 건 결코 납득할 수 없는 일이므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이제 교단에서 교사들의 명찰 달기는 필수라는 생각이다" 정도로 갈무리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우선 교복이나 명찰이 개인의 존엄성보다는 집단의 가치와 편의를 지향하는 제도적 권력적 장치라고 생각하는 제 의견은 넘어가겠습니다. 워낙에 따로 논의돼야 할 내용이 많을 것 같으니 말입니다.

박 기자님 기사의 전제는 '학생이 교사의 이름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인식에서 출발합니다. 스스로 "학생이 교사의 이름을 모르고 지나친다는 건 결코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는 표현을 쓰신 걸로 봐서도 그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학생이 교사의 이름을 알게 하는 방법으로 교사의 명찰 달기는 교단의 필수라는 해법과 주장에는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박 기자님은 "학교는 올바른 인간관계를 가르치는 곳"이라고 하셨지만 그것은 '가르치는 자'의 시각에서 바라본 것일 테지요. 학교는 올바른 인간관계를 가르치기도 하지만 '배우는 곳'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 가르침과 배움의 주체는 학생이 될 수도 있고 교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교사는 가르치기만 하고 학생은 배우기만 하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는 말은 그래서 더욱 뜻을 새길 만한 것일 테구요.

바로 그 올바른 인간관계를 가르치고 배우기 위해서는 학생들보다 좀 더 많은 힘(!)을 가진 교사들이 스스로 먼저 아이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는 일이 우선해야 할 것입니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건 '관계의 깃들임'을 의미합니다.

학생이 교사의 이름을 모르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면 적어도 교사가 가르치는 학생의 이름을 모르는 것도 용납할 수 없어야 합니다. 교사는 혼자이고 학생은 다수라고 하는 숫자 핑계를 대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주며 사랑과 용서로 하나가 되는 일을 하자고 선택한 것이 '교직' 아니던가요?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교사를 아이들은 납득할 수 있을까요?

사실 교실에서 존재감조차 없이 조용하게 지내는 일부 학생들에게 학급담임 교사는 물론 교과담임 교사들이 3년 동안 그 이름을 불러주는 횟수는 지극히 적습니다. 거짓말을 좀 보태어 과장하자면 3년 동안 아무도 불러주지도 않고 기억하지도 않는 이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들어가는 학급이 많다보니 아이들의 이름을 일일이 다 기억할 수 없다는 선생님들이 꽤 있습니다. 눈에 띄는 아이들의 이름만이라도 아는 게 어디냐고 자족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진정한 소통과 관계를 위해서는 그것부터 용납하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요? 자신의 이름을 아는 건 차치하고 불러주지도 않는 선생님들을 아이들은 납득할 수 있을까요? 이름을 불러달라고 이름표까지 달고 앉아 있는데도 말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어느 한 쪽의 일방적 행위를 전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노력으로 온전해지는 것일 테니 말입니다. 교사와 아이들의 관계 역시 다를 게 없겠지요.

교사가 명찰을 달고 다니는데도 아이들이 그 이름을 알지 못한다면 꾸중과 체벌에 익숙한 학교(교사)는 그것을 이유로 아이를 꾸중하거나 혼을 내게 될 겁니다. 교사가 명찰을 달지 않았다면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그렇게 기억하는 이름에 사랑이 담길 수 있을까요?

무엇을 '강요'해서 긍정적 효과를 거두는 교육은 없을 겁니다. 의도와 상관없이 학교와 교사라는 제도 자체가 학생들에게 권력(혹은 폭력)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그러한 요구는 더욱 신중하게 검토돼야 할 것입니다.

또 "학생들에게 (매년 바뀌는) 교사의 교무실 자리를 반드시 알게 하고 교사의 이름을 기억하게 반복 훈련"까지 한다는 S여고 선생님의 이야기는 무섭기까지 합니다. 마치 학생들이 교사의 교무실 자리와 이름을 아는 것이 당면한 최고의 목표처럼 느껴지니 말입니다.

그것보다는 아이들이 스스럼없이 교실과 교정에서 교사와 자연스레 어울리고, 교무실로 찾아와 농담 한 마디라도 건네고 갈 수 있도록 서로가 이해·소통하고 온전히 깃들이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요? 그렇게 되면 '반복훈련'까지 해가며 수고를 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자연스레 선생님의 자리며 이름뿐만 아니라 더 많은 것을 알고 기억하게 될 겁니다.

교사들이 명찰을 달지 않아서 혹은 반복 훈련을 하지 않아서 아이들이 교사들에게 무관심 한 것이 아니라 학교와 교사가 아이들과 진정으로 소통하고 있지 못 하기 때문에 모든 문제는 생겨나는 것이라고 봅니다. 교사의 눈으로 아이들을 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소통되지 않는 어른들(주로 교사나 아버지)에게 아이들이 붙인 은어가 '꼰대' 아닙니까!

충분히 서로가 서로에게 깃들이려는 노력을 한 후에, 그래도 정말 필요하다면 명찰이나 반복훈련은 그 다음 다음에 필수일지 선택일지를 고민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명찰을 달아 아이들에게 소통의 손을 내밀었듯 교사가 먼저 아이들을 이해하고 다가서야 하는 것은 두 말 할 나위도 없겠지요.
#이름 #명찰 #제도적 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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