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때문에 억지로 읽다가 빠져버린 책

고향과 인간에 대한 그리움을 그린 <관촌수필>

등록 2007.08.25 19:17수정 2007.08.26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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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이 된 후 처음 읽은 소설. 주인공처럼 나 역시 옹점이와 대복이가 그리워진다. ⓒ 문학과지성사

이문구의 <관촌수필>은 1972년 5월에 발표한 1편 <일락서산>을 시초로 5년여 동안 발표된 총 8편의 소설을 한데 묶은 작품집이다. 이것은 1977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연작소설의 형태로 출판되었다.

내가 이 책을 접하게 된 것은 출판된 해로부터 30년이 지난 2007년 여름이었다. <오마이뉴스> 인턴이 끝나갈 무렵, '대학에 입학한 이후 소설과 수필은 거의 읽지 않았다'는 나의 말을 듣고 선배 기자가 선물해준 것이다.

솔직히 처음에는 '아휴… 출판된 지 30년도 훨씬 지난 이런 책을 선물해주시나. 게다가 '수필'은 별로인데…'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책의 첫 장을 펼친 순간 충청도 사투리에 막혀 글을 읽어나갈 수가 없었다. 문장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쭉쭉 읽어나갈 정도로 속도가 붙으려고 하면 의미를 짐작할 수 없는 사투리가 또다시 눈이 가는 길을 가로막았다.

1편 <일락서산>을 완독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책을 선물해준 '선배의 성의'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마저도 없었다면 1편도 다 읽지 않고 책을 덮어버렸을 것이다. 그렇게 1편을 읽고 나니, 그 다음에는 선배가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이라고 했던 '옹점이'가 궁금해졌다.

2편에서도 나오지 않던 옹점이는 3편 <행운유수>에 가서야 등장한다. 옹점이를 알고 나자 그 다음에는 '대복이'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남로당원이었던 주인공의 아버지에 관한 내용은 언제쯤 나오려나 기대하게 됐다. 그쯤되자 충청도 사투리가 익숙해지고 문장도 한눈에 쏙쏙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락서산> "이젠 완전히 타락한 동네구나"

연작의 첫 작품인 <일락서산>은 주인공인 '나'가 장성한 뒤, 한참만에 고향에 성묘차 들렀다가 옛일을 회상하며 느끼는 그리움을 주조로 하고 있다. <일락서산>은 주인공의 몰락한 가계를 거슬러 올라가는 애달픈 여정의 이야기로 특히 주인공의 의식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전형적인 이조선비인 할아버지는 작가의 인격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신 분이다. 그런데 작품이 쓰인 1970년대의 시류는 사뭇 달라져 가고 있었다. 걷잡을 수 없이 밀어닥치고 있는 이른바 근대화의 물결은 그동안의 삶의 근간을 밑뿌리부터 흔들어 놓았다.

주인공은 할아버지만 작고했을 뿐만 아니라 이조정신의 규범이 사라진 안타까움을 왕소나무가 없어진 것에 견줘보며 가슴 저미는 아픔을 느끼는데, 이러한 아픔은 그의 고향을 타락한 동네로 생각하게 하고 급기야 자신을 '실향민'으로 규정하게 한다.

..실향민. 나는 어느덧 실향민이 돼버리고 말았다는 느낌을 덜어버릴 수가 없었다. 고향이랬자 무덤들밖에 남겨둔 게 없던 터라 어차피 무심하게 여겨온 셈이긴 했지만, 막상 퇴락해버린 고향 풍경을 대하니, 나 자신이 그토록 처연하고 헙헙하며 외로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관촌수필>, 일락서산, 문학과지성사 1991. 13쪽)

마음의 벗, 옹점이와 대복이 그리고 신석공

3편 <행운유수>는 유년시절 주인공의 둘도 없는 친구요, 누이였던 '옹점이'에 대한 이야기다. 옹점이는 어머니의 교전비로 따라 들어와 주인공과 함께 일가의 몰락과 풍상을 함께 겪었을 뿐만 아니라 알게 모르게 화자의 의식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옹점이는 주인공이 아플 때마다 덩달아 숟가락을 들지 않거나, 약종발을 든 채 함께 눈물 흘리며 아파하기를 마지않던 인물이다. 주인공은 그녀를 학교에 다닌 적도 없고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지만 웬만한 글은 국한문을 가리지 않고 해득해낼 만큼 영악한 데가 있었고 마을 공동체적 삶을 영위하는 데 누구 못지않게 순박함과 인정스러움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4편 <녹수청산>은 단오가 되면 영당 옆 정자나무에 그네 맬 동아줄도 저 혼자 짚 추렴하여 틀어 꼬고, 백중 장터에 난장판이 서면 빠짐없이 씨름 선수로 나가 으레 판막이에서 지고 돼지 새끼를 타 오던 주인공의 어린 시절 우상 '대복이'의 이야기다.

주인공은 대복이 뒤만 따라다녀도 겁날 게 없고 다채롭던 그 시절을 '동짓날 밤 별빛같이 아름다운 시절'로 비유했다. 대복이는 6·25라는 어지러운 난리통에 이쪽저쪽으로 잡혀들어가기도 하지만 순박하고 인정 많은 인물이다.

또한 5편 <공산토월>에 등장하는 신석공 역시 주인공에게 '빈산에 홀로 뜬 달'과 같은 존재이다. 신석공은 동네의 온갖 굳은 일은 물론이거니와 주인공의 집안일에 발벗고 나섰다. 특히 6·25로 인해 풍비박산 난 주인공의 일가를 위해 온갖 고초를 감내하고 자신이 존경하던 어른과 그 일가의 풍랑을 수습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석공이 죽어가면서 주인공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 생사의 경계를 헤매는 시간을 1주일씩이나 같이 치르면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음에도, 주인공은 마침내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가장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그 사람은 내가 일생을 살며 추모해도 다하지 못할 만큼 나이를 얻어 살수록 못내 그립기만 했다"는 주인공의 말에는 석공을 향한 그리움이 짙게 묻어난다.

과거와 현재, 두 개의 고향

<관촌수필>에는 두 개의 고향이 팽팽하고 맞서고 있다. 하나는 주인공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평화롭고 조화로운 고향이고, 나머지 하나는 주인공이 현실로 맞닥뜨린 파괴의 고향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전통과 근대의 대립이다.

주인공은 고향과 고향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 유년시절에 경험한 농촌공동체의 조화와 따듯했던 인정들을 기억의 우물 속에서 길러낸다. 뿐만 아니라 산업화, 도시화 과정에서 겪게 되는 농촌사회의 소외와 해체과정까지를 솔직한 표현을 들려준다.

..세월은 지난 것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새로 이룬 것을 보여줄 뿐이다. 나는 날로 새로워진 것을 볼 때마다 내가 그만큼 낡아졌음을 터득하고 때로는 서글퍼하기도 했으나 무엇이 얼마만큼 변했는가는 크게 여기지 않는다. 무엇이 왜 안 변했는가를 알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겠기 때문이다. (앞의 책, 관산추정, 295쪽)

하지만 주인공 즉, 작가는 변화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나날의 변화, 급속한 변화 속에서도 변치 않거나 변치 않아야 할 것들, 그래서 더욱 소중한 가치를 발견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소중한 가치란 다른 사람을 위해 양보하고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옹점이와 대복이, 신석공으로 대표되는 '인간상'에 있지 않을까. 주인공을 신석공을 일컬어 "자기 자신이 희생되더라도 이웃과 남을 위해 몸을 버릴 수 있었던, 진실로 어질고 갸륵한 하나의 구원한 인간상이 내 정신 속에 굳게 자리잡고 있는 인물"이라고 묘사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사람들 속에 섞여 살다가 옹점이와 대복이, 신석공과 같은 인물을 접하게 되면 내가 그동안 잃고 살아온 것이 무엇인가를 번뜩 깨닫게 된다.

책을 선물해준 선배는 "독후감을 쓰면 또 다른 책을 선물해 주겠다"고 했었다. 당시에는 그러겠다고 자신있게 대답했지만 글을 쓰기 시작하자 후회가 몰려왔다. 소설집을 읽은 것이 처음이거니와 다른 작가들이 쓴 서평을 한번 읽었더니 더욱 자신감이 없어졌다. 괜한 욕심을 부린 것이 아닐까. 사실 선배는 소설의 매력을 느끼게 해준 것만으로 '책' 이상의 선물을 준 것이나 다름없는데 말이다.

미흡하지만, 결과적으로 독후감을 쓴 게 되었으니 다음에는 선배가 어떤 책을 선물해줄까 기대를 해본다. 이문구씨의 또 다른 작품이거나 혹은 <관촌수필>처럼 개인의 삶을 통해 역사를 배울 수 있는 책이라면 좋겠다.

관촌수필

이문구 지음,
문학과지성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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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구 #관촌수필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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