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대왕의 원대한 꿈, 오늘에 꽃을 피우다

[서평] 신병주의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등록 2007.09.27 10:10수정 2007.09.27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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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6년. 정조대왕은 창덕궁의 후원, 지금의 부용정 건너편에 2층짜리 건물을 짓는다. 2층은 주합루(宙合樓)라는 현판을 걸었다. (땅과) 우주가 합해지는 공간이라는 뜻이다. 참으로 원대한 이름이다. 그리고 1층에 규장각(奎章閣)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정조대왕과 당대 지성인들의 개혁정치와 문예부흥의 공간이 바로 규장각이었다.

 

2007년. 서울대학교에는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이 자리하고 있다. 비록 규장각의 모습과 내용은 옛날과 다르지만 그 정신은 서릿발같이 살아 많은 사람들에 의해 오늘에도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규장각은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의 무서운 역량을 남김없이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이다. 그리고 그 힘은 현재 한국문화의 무서운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2003년~2004년 방영된 MBC 드라마 <대장금>은 우리나라를 넘어서 동아시아에 바람을 일으켰다. 1997년 훈민정음(訓民正音)과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2001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그리고 올해 2007년 의궤(儀軌)가 세계기록유산에 나란히 등재되었다.

 

다른 세계유산에도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의 자취는 강하게 서려 있다. 200여 년 전 규장각을 통해 정조대왕이 펼치려 했던 원대한 꿈, 이상은 바로 현재의 우리의 꿈, 이상이며, 그것이 조금씩, 그러나 강하게 이뤄져 나가고 있다.

 

현재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는 무려 26만 점이 넘는 왕실 기록, 한국본 및 중국본 도서, 문집, 고지도, 고문서, 책판 등이 소장되어 있다. 물론 여기에는 일제에 의한 강제 통합으로 인한 아픔이 서려 있지만, 현재 우리나라 최대의 국학기관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이 곳에 소장되어 있는 유산들은 하나같이 그 가치를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미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의궤는 세계인들에게 그 가치를 인정받기까지 했다. 이들이 없었다면, 수많은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나 영화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동아시아에 엄청난 바람을 일으켰던 <대장금>, 한국영화사상 최고 흥행작의 하나인 <왕의 남자>. 만약 조선왕조실록이 없었다면 이들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물론 <대장금>과 <왕의 남자>는 아주 작은 사실에 엄청난 허구를 부풀려 만든 극이며, 그 작은 사실마저도 잘못 다루고 있어 안타깝기까지 하다. 기록에 의하면, 장금은 수라간에서 일한 궁녀는 아니었다. 공길도 왕에게 바른 말을 했다가 곤장을 맞고 쫓겨났다. 어쨌든 조선왕조실록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들이 있었다는 것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수원 화성(水原 華城)이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을 때 많은 이들은 의아하게 여겼다. 화성의 상당한 부분이 1970년대 이후 복원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복원된 지 채 30년이 되지 않은 부분이 상당수인 화성이 어떻게 인류가 길이 보존해야 할 세계문화유산이 되었을까? 당시 정부가 복원을 잘해서? 어림 없는 소리.

 

그것은 다름 아닌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화성의 공역에 관한 전말을 담은 보고서인데, 이 의궤 덕분에 완벽하게 복원할 수 있었다고 한다. 18세기 이러한 공사보고서를 남긴 나라는 세계에서 우리뿐이었다. 의궤는 우리 선인들의 무서운 기록정신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이런 명품들이 규장각에는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의 저자 신병주도 그 많은 명품들 가운데 일부만을 소개하는 것을 아쉬워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일부의 명품들만을 보더라도 우리는 조선왕조와 대한제국 문화의 진수를 유감없이 맛볼 수 있다.

 

이 책은 저자가 지난해 <국제신문>에 연재하였던 '규장각 다시 읽기'를 바탕으로 이제까지 썼던 여러 책들의 내용을 맛깔나게 버무려 만든 것이다. 특히 수백 점에 달하는 컬러 도판은 규장각 자료들의 아름다움을 잘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이 책을 통해 그동안 우리가 배웠던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에 관한 지식이 얼마나 편협한가를 절실히 느낄 수 있다. "털끝 하나도 내가 아니면 남이다"라는 정신으로 그려진 선비들의 초상화에서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선비들의 넘치는 인간미와 화인들의 치밀하고 무서운 역량을 만끽할 수 있다.

 

지봉유설(芝峰類說),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등 다양한 백과사전류 도서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와 같은 세계지도를 통해 세계를 향해 활짝 열려 있었던 우리를 만날 수 있다. 세계적인 기록유산들은 우리 후손들에게 무한한 긍지를 안겨주고 있다. 선비들의 문집은 선비들의 방대한 학문 세계와 꼿꼿한 정신을 오롯이 보여준다. 19세기까지 거북선이 있었고, 춘향의 고향 남원 광한루와 평양 냉면집의 유명함은 방대한 조선의 지방지도에서 만날 수 있다. 규장각, 그 매력의 한계는 도대체 어디일까?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의 선비들은 백성들에게 믿음을 얻는 정치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며, 그 믿음을 저버릴 경우 하늘과 역사의 심판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믿음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정치를 투명하게 하려 노력했으며, 이러한 노력을 담은, 진실에 가까운 글을 후세에 남겨 역사의 평가를 받고자 하였다. 이는 왕조가 존속한 내내 계속되었다.
 
그 결과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방대한 기록문화를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주었다. 방대할 뿐만 아니라 내용 또한 너무나 다양하며, 거의 대부분 진실이거나 진실에 가깝다. 칼이 붓을 이길 수 없으며, 또한 기록이 정치의 투명성, 공개성, 책임성을 보장하는 수단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은 상상을 초월하는 무서운 역량을 지닌 기록 강국이었다. 그 역량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정조대왕은 이를 바탕으로 민국(民國)이라는 원대한 꿈을 꿔나갔던 것이다. 그 바탕에 규장각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꿈은 오늘에 비로소 그 꽃을 피웠다.

 

정조가 규장각을 처음 설립할 때 가졌던 '법고창신'의 정신은 20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투철한 기록 정신은 공개성과 투명성을 전제로 한다. 정치 행위에서 벌어진 모든 사실을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부정과 비리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이다. 투철한 기록 정신은 자신의 시대를 떳떳하게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다양하고 방대한 기록물을 제작하고 철저하게 보관한 민족,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문화민족으로서의 긍지를 느낄 수 있다. 이제 이들 기록물의 가치를 공유해가면서, 미래를 살아가는 지혜의 원천으로 삼아볼 것을 권한다. (신병주,<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책과 함께, 2007, 24쪽) 

덧붙이는 글 | 이미지는 싣지 않았습니다. 임의로 저작권을 훼손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입니다.

2007.09.27 10:10 ⓒ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미지는 싣지 않았습니다. 임의로 저작권을 훼손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입니다.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 규장각 보물로 살펴보는 조선시대 문화사

신병주 지음,
책과함께, 2007


#규장각, 정조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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