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란 후 조·일 납치문제, 어떻게 해결되었나?

등록 2007.09.29 11:27수정 2007.09.29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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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자회담이 열릴 때마다 북한과 일본 간에는 핵 문제 외에도 납치문제에 관한 또 다른 공방이 열린다. 그리고 현재 이것은 북·일 수교문제와도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지난 28일 중국 베이징에서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북한측 6자회담 수석대표)과 회담을 가진 사사에 겐이치로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 국장(일본측 수석대표)이 "일본과 북한은 납치문제 등 양국 간 현안 해결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지만, 납치문제가 해결되려면 두 나라 사이에 넘어야 할 산들이 아직도 많기만 하다.

현재 일본정부가 취하고 있는 입장은 '선 납치문제, 후 북일수교'라고 할 수 있다. 납치문제를 먼저 해결한 다음에 북일수교에 서명할 수 있다는 일본정부의 입장은 두 문제 모두의 해결을 지연시키는 요인 중 하나가 되고 있다.

일본 월간지 <리더> 2007년 4월호에 '아베는 총리 자격 없다'는 글을 기고한 시루미 요시히로 뉴욕시립대학 교수 같은 사람들은 "관계도 정상화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어떻게 납치문제나 핵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면서 '선 북일수교, 후 납치문제'라는 해법을 제시하고 있지만, 일본 정부는 아직까지 강경한 입장에서 물러서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일본은 한때는 자신들도 동종 문제의 가해자인 적이 있다는 점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일본은 자신들이 가해자 입장에 있었던 임진·정유 양란 이후의 '납치문제'가 어떤 방식으로 해결되었는지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과거의 일은 까마득히 잊은 채, 마치 이런 일이 한민족과 일본 사이에 처음 생긴 일인 듯이 또 마치 일본은 이런 문제로 한민족을 괴롭힌 적이 없었던 듯이 행동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1985년 12월 삼영사 발행 <변태섭 박사 화갑기념 사학논총>에 실린 전 서울대 역사교육학과 이원순 교수의 논문 '임진·정유재란 시의 조선부로노예문제-왜란 성격 일모'에 의하면, 7년간의 전쟁 동안 일본군이 납치해간 조선인의 숫자는 대략 10만 명 정도에 달한다고 한다. 참고로, 여기서 '부로'는 일종의 피랍자에 해당하는 개념이다.


그럼, 당시의 조선 정부는 어떤 방식으로 조선인 피랍자들의 신병을 되돌려받았을까? 일본처럼 '선 납치문제, 후 국교수교'라는 방식에 집착했을까? 아니면 '선 국교수교, 후 납치문제'라는 정반대의 해법을 취했을까? 조·일 양국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양란 이후 조·일 국교재개에 적극성을 보인 쪽은 일본의 도쿠카와 막부와 쓰시마였다. 막부로서는 정권 안정을 위해서, 쓰시마로서는 무역재개를 위해서 대(對)조선 관계정상화를 추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의 조선정부는 일본 측에게 "국교재개 이전에 피랍자들을 모두 돌려보내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조선 측이 취한 태도는 납치문제와 국교재개를 동시에 추진하는 유연한 방식이었다.

이에 따라 조선 측은 국교재개(1607년) 이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쓰시마를 통해 피랍자들의 신병을 부분적으로 되돌려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국교가 재개된 1607년에는 회답겸쇄환사(훗날의 통신사)라는 사절을 도쿠가와 막부에 파견하여 1340명의 피랍자들을 되돌려받았다. 여기서 '쇄환'은 일종의 송환 개념이다.

그리고 광해군 재위 시절인 1617년, 인조 집권 초기인 1624년에도 조선정부는 일본 막부에 회답겸쇄환사를 파견하여 피랍자들을 부분적으로 되돌려받은 적이 있다.

또 회답겸쇄환사가 통신사로 개칭된 후에도 양국 간에 피랍자 송환작업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인조 재위기인 1636년과 1643년에도 피랍자들이 조선으로 송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이 작업은 효종 6년인 1655년까지 계속 진행되었다. 국교재개가 이루어진 1607년 이후로도 무려 48년 동안 피랍자 송환작업이 지속적으로 진행된 것이다.

위와 같이 한때 한민족이 피해자의 입장에 있었을 때에는 이 문제가 유연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해결된 적이 있었다. 일본의 침략을 받은 데에다가 10만 명 정도의 백성까지 빼앗긴 조선정부는 결코 감정에 매몰되어 문제를 그르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야 "피랍자들을 모두 돌려받지 않고서는 국교재개에 응할 수 없다"고 하고 싶었겠지만, 양란 이후의 조선정부는 차분하고 침착하게 문제해결에 나섰다. 그들은 오늘날의 일본처럼 '선 납치문제'라는 강경한 입장을 취하지 않고 '동시추진'이라는 유연한 입장을 취함으로써 국교도 재개하고 피랍자도 되돌려받는 성과를 도출해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일본 역시 자신들이 피해자라는 점에만 집착하지 말고, 한때는 자신들도 동종 문제의 가해자였으며 그때 조선 측이 매우 유연한 태도로써 일본 측의 입장을 배려해준 적이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 측은 '북·일 국교를 먼저 정상화하면 북한이 나중에 가서 딴소리를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버려야 할 것이다. 과거 조선정부는 조·일 국교재개 이후에도 무려 48년간이나 인내하면서 피랍자들을 되돌려받았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일본정부가 유연한 입장을 취하지 않으면, 납치문제와 국교재개 어느 쪽도 신속히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납치문제 #북일수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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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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