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망했다, 조선의 패망은 필연인가?

[역사소설 소현세자 1] 사대부들을 습격한 대공황

등록 2008.02.11 18:10수정 2008.02.12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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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의 항복 조선 국왕이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에게 항복하는 모습 ⓒ 이정근


조선국 국왕이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의 예를 갖추는 의식이 끝났다. 청국 조정 사령의 "일배요." 소리가 저승사자의 목소리 같았지만 이마를 세 번 땅에 대었다. "이배요." 소리를 들었을 때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지만 머리를 세 번 땅에 찧었다. "삼배요." 소리에는 심장이 멎는 듯했다. 정신이 혼미해졌다. 어지러운 상태에서 머리를 땅에 세 번 박았다.

절하는 시간이 끝났다. 만백성의 어버이 임금이 항복한 이 사건은 국난의 종결이 아니라 국론의 시작이었다. 조선국 임금 이종이 청국 황제에게 무릎 꿇은 모습은 조선 사대부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허나, 나라가 망했다는 통한의 관념이 아니었다. 후손들이 일본제국주의에게 국권을 찬탈당한 뒤 내놓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과는 격이 달랐다. 일제에 항거해 도시락 폭탄과 함께 스러져간 열사의 모습과도 달랐다.


임금이 무릎 꿇고 머리를 땅에 찧는 일은 흔히 있었던 일이다. 가슴을 쥐어뜯으며 통곡할 일이 아니다. 불과 3년 전. 1634년 6월 20일. 인조실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새벽에 임금이 교외에 나가 칙서를 맞이하면서 오배삼고두의 예를 행하였다. - <조선실록>

명나라 사신이 소현세자의 세자책봉을 인정한다는 칙서를 가지고 왔다. 사신이 도성에 들어오기 전, 임금이 한달음에 교외로 달러나가 사신을 맞았다. 그리고 사람이 아닌 칙서를 향하여 '오배삼고두'를 올렸다. 항복할 때 삼배보다 두 번 더 절했다는 이야기다.

무엇이 조선사대부들을 습격했는가?

임금이 무릎 꿇고 수용한 '강화조약' 첫째 조문 '청나라에게 군신(君臣)의 예(禮)를 지킬 것'이 치욕스러워서가 아니었다. 조선은 이미 누대로 명나라에게 군신의 예를 지키고 있었다. 사대 정도는 욕스러움이 아니었다.


셋째 조항, '조선왕의 장자와 차자 그리고 대신의 아들을 보낼 것' 도 아니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끌려가는 것은 안타깝지만 그 정도쯤은 항복한 나라로서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받아들였다. 열한번째 마지막 조항, '조선은 세폐를 보낼 것' 도 아니었다. 조선은 명나라가 요구하면 공물도 보내고 여자도 보냈다.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둘째 조항, 바로 이것이었다. '명나라에서 받은 고명책인을 바치고 명과의 교호를 끊으며 조선이 사용하는 연호를 버릴 것'. 명나라와 교호를 끊으라는 이 말이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다. 조선 사대부들이 이 칼을 맞는 순간, 머리는 텅 비었고 공황에 빠졌다.

조선 사대부들에게 명나라는 세상의 전부였다. 임금이 어버이라면 황제는 천자였다. 세상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하느님의 아들이었다. 조선 건국 과정에서 일정 부분 공헌한 성리학의 덕목인 충과 효의 귀착점은 명나라였다. 명나라는 신앙 이상의 종교였다.

'처녀가 애를 낳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말을 믿는 사람들도 유일신 이외의 신은 우상으로 규정한다. 이것이 신앙이다. 조선 사대부들에게 명나라와 관계를 끊는다는 것은 배신 이상의 배교였다. 오랑캐라 업신여기던 청나라를 섬긴다는 것은 우상숭배 이상의 치욕이었다.

남한산성에 갇혀 화전 양론이 각을 세우며 격론을 벌이던 1월 21일. 이조 참판 정온은 이렇게 외쳤다.

"우리나라는 명나라와 군신의 관계인데 어찌 부자의 은혜를 잊을 수 있으며 군신의 의리를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에는 두 해가 없는데 최명길은 그 해를 둘로 하려고 하며 백성에게는 두 임금이 없는데 최명길은 그 임금을 둘로 하려고 하니 무슨 짓을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까?" - <연려실기술>

또한, 척화신으로 심양에 끌려가 처형돼 삼학사로 칭송받고 있는 오달제는 임금이 수항단에서 '삼배구고두'를 행하기 하루 전, 강화의 전제조건으로 화친을 배격한 신하를 묶어 보내라는 청나라의 요구로 끌려 갔을 때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의 직접 심문을 받았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두 나라의 맹약을 어기도록 하였는가?"
"우리나라는 대명(大明)에 대하여 3백 년을 신하로서 섬겨 대명이 있음을 알 뿐이고 청나라가 있는 것은 알지 못한다."

기개가 가상하다. 이러한 배청 사상은 전란의 혼란과 패배가 적개심으로 표출될 수 있다.  허나, 명나라가 망해 지구상에서 사라진 후에도 살아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조선사대부의 머릿속을 꽉 채운 대명일월(大明日月) 사상은 새로운 학문과 문물이 비집고 들어올 공간을 주지 않았다. 실사구시를 추구하는 북학파의 숨통을 조였다. 우리나라가 일제에 강점될 때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이것이 조선의 불행이었고 소현세자의 비극이었다.

시대가 수단을 용도폐기하면 버리는 것이 시대정신이다

반공은 절대 진리가 아니다. 국채를 보존하기 위한 수단이다. 시대가 수단을 용도폐기하면 버려야 한다. 그것이 시대정신이다. 공산주의 종주국이 버린 이념을 붙들고 있는 집단이나 골수 반공을 외치는 사람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원군을 보내주었으니까 은혜로운 나라로 섬겨야 한다는 사람과 한국전쟁 때 군대를 보내 도와주었으니까 미국이 망한 후에도 사대해야 한다는 사람 역시 같다.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행한 인조가 무릎을 꿇고 황제의 다음 명을 대기했다. 이 때 혼미한 정신 속에서 할아버지의 환영이 스치고 지나갔다. 정복자 원나라가 쇠하고 명나라가 웅기 할 때 대륙의 지각변동을 감지하고 배원친명(排元親明) 정책을 견지하며 조선을 건국했던 이성계. "어렵게 세운 나라를 네가 말아 먹느냐?" 꾸짖는 것만 같았다.

가든지 오든지 다음 명이 있으면 좋으련만 청군 진영에서 아무 말이 없다. 눈을 감았다.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국익에 맞는 등거리 외교를 펼친다는 이유로 쿠데타를 일으켜 임금을 경운궁 석어당 앞뜰에 무릎 꿇렸을 때 분노에 이글거리던 광해군의 눈초리와 원한에 사무친 인목대비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광해는 배반하는 마음을 품고 오랑캐와 화친하였다. 우리나라로 하여금 금수의 나라가 되는 것을 모면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가슴 아픈 일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명나라 조정에 죄를 짓고 아래로 백성들에게 원한을 사고 있는데 이러한 죄악을 저지른 자가 어떻게 나라의 임금으로서 백성의 부모가 될 수 있으며 조종의 보위에 있으면서 종묘·사직의 신령을 받들 수 있겠는가. 이에 그를 폐위시키노라." - <광해군일기>

"물러가도 좋소."

청나라 장수 용골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수항단에 좌정한 황제에게 읍하고 뒷걸음으로 물러 나왔다. 그곳에는 강화도에서 붙잡혀 온 빈궁과 사대부 가속들이 한 곳에 모여 있었다.

"빈궁과 대군 부인은 나와서 절 하도록 하시오."

인조는 억장이 무너졌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남녀유별의 나라 조선의 빈궁과 왕실 여인이 오랑캐 앞에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니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병자호란 #삼배구고두 #소현세자 #시대정신 #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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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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