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령사 패. 명령을 전하고 장계를 올리던 전령사가 지녔던 패.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정근
7일 압록강을 건넌 청나라 군은 백마산성에 들어간 임경업 군과 자모산성에 들어간 김자점 군을 상대하지 않고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조선군의 저항은 없었다. 팔기군을 앞세운 청군 앞에 조선군은 무력했다. 무늬만 군대일 뿐 전투 없는 군대였다. 역로와 역참은 적의 수중에 떨어졌고 봉화대는 장악되었다. 산성에 들어간 군사는 고립되었고 통신은 마비되었다.
12일 임경업이 보낸 장계가 사선을 뚫고 한성에 도착했다. 청나라 군사가 이미 송도를 통과했다는 개성유수의 장계가 조정에 도착한 날이 13일. 모든 보고는 뒷북만 치고 있었다. 소현은 생각하면 할수록 기가 막혔다.
이러한 비변사에 나라의 안위를 맡겨두고 조정은 척화파와 주화파로 갈려 박 터지게 싸우고 있었다는 것이 어처구니없었다. 국가의 틀을 근본적으로 개조하지 않고서는 나라의 장래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허나, 지금은 볼모로 끌려가는 몸. 소현에게는 힘과 능력이 없다. 오직 희망이 있다면 볼모가 풀려 하루속히 조국에 돌아오는 것이 소망이었다.
압록강을 다시 건널 수 있을까?의주에서 3일을 머문 청나라 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국경을 넘어 조선을 떠나겠다는 뜻이다. 압록강에 이르렀다. 오뉴월 하지까지 간다는 백두산 눈이 녹아내린 강물이 아침햇살을 받아 차갑게 반짝였다. 입춘 우수가 지났지만 여기는 대동강이 아니다. 강심은 얼음이 풀렸지만 가장자리에는 아직도 살얼음이 있었다.
압록강 물이 눈부시게 푸르다. 오리의 머리를 닮았다 하여 압록(鴨綠)이라는 이름을 얻은 압록강을 중국에서는 청하(淸河)라 부른다. 장강, 황하와 함께 대륙의 3대 강으로 통한다.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맑고 깨끗한 물빛이 가히 일품이다. 보고 또 보아도 역시 눈부시다.
소현은 배에 올랐다. 뱃전에 부딪치는 물결소리가 어미 잃은 아기의 울음소리 같다. 가슴이 아리다. 둔중한 몸채가 움찔하더니만 스르르 움직이며 강물을 타고 흐른다. 의주가 점점 멀어진다. 조국이 점점 멀어진다. 가슴에 뜨거운 것이 치밀고 올라왔다. 피를 토할 것 같은 아픔이 가슴을 짓누른다. 숨이 멎을 것만 같다.
소현은 머리를 들었다. 통군정을 품고 있는 삼각산이 시야에 들어왔다. 멀어지는 조국강산을 동공(瞳孔)에 담았다. 담고 또 담았다. 두 눈이 꽉 차도록 담았다. 이제 가면 다시는 못 볼런지 모른다. 그리움이라는 이름으로 가슴에 담아 두어야 할 조국강산이다. 눈동자에 이슬이 맺혀서일까? 흐릿한 망막에 잡히는 얼굴이 있었다. 조국의 명운이 백척간두에 걸려있던 남한산성에서 날카로운 시선으로 격론을 벌이던 신하들의 얼굴이었다.
무늬만 군대인 군사를 믿고...“한번 성문을 나서게 되면 북쪽으로 행차하게 되는 치욕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군신(羣臣)이 전하를 위하는 계책이 잘못되었습니다. 진실로 의논하는 자의 말과 같이 전하와 세자 저하가 겹겹이 포위된 곳에서 빠져나오게만 된다면 신 또한 어찌 감히 망령되게 소견을 진달하겠습니까? 국서를 찢어 이미 사죄(死罪)를 범하였으니 먼저 신을 주벌하고 다시 더 깊이 생각하소서.” - <인조실록>최명길이 지은 화의국서를 찢어버리며 통곡하던 예조판서 김상헌의 읍소를 듣는 순간, 목 놓아 흐느꼈던 자신이 생각났다. 그랬다. 정말로 목 놓아 울었다. 적에게 항복하고 나라가 망한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싫은 일이었다. 자신이 흐느낄 때, 우의정 이성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감이 전부터 화친을 배척하여 나라 일을 이 지경에 이르도록 하였으니 비록 후세에 이름이 중하게 될지라도 우리 임금과 종묘사직은 어찌하겠는가? 대감은 어찌하여 나가서 적과 더불어 의(義)로 겨루지 아니한가?” - <연려실기술>김상헌을 질타하던 이성구의 목소리가 멀어지며 빙그레 웃던 최명길의 얼굴이 그려졌다.
“대감이 찢었으니 우리들은 마땅히 주워야 하겠습니다.” - <병자록> 김상헌이 찢어버린 답서를 주워 이리저리 조각을 맞추던 최명길의 하얀 손이 잊혀지지 않았다. 허나, 이 순간. 부왕은 냉기가 흐르는 창경궁에 홀로 있고 김상헌은 산성을 내려와 가속들 곁에 있지 아니한가? 자신은 끌려가고 있는데 최명길은 내 곁에 없지 않은가? 공허했다. 허허롭고 허망했다. 모든 것이 메아리 없는 공허한 울림만 같았다.
척화도 좋고 주화도 좋다. 모두가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다. 허나, 힘이 받쳐주지 못한 주의 주장이 과연 얼마만큼 나라에 보탬이 될까? 불과 7일만에 도성을 내주는 군대를 믿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부질없는 일인 것만 같았다. 힘이 없는 명분. 가당이나 하는가? 힘이 없기 때문에 강토가 짓밟히고 백성들이 도륙당하지 않았는가. 명분이 허(虛) 하기 때문에 부왕이 치욕을 당하고 내가 끌려가고 있지 않은가.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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