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역사팩션 56] 서일과 김좌진의 만남

김갑수 대하소설 <제국과 인간> 상해의 영혼들 편

등록 2008.05.08 13:56수정 2008.05.08 13:56
0
원고료로 응원
아! 봉오동, 청산리

김좌진이 압록강을 넘은 것은 1918년이었다. 대한제국 무관학교에 다닌 그는 한문에도 뛰어난 실력을 갖춘 지식인이었다. 특히 그의 한시는 시어가 정교하고 서정적이었다. 그는 고향 홍성에서 독립운동을 위한 준비를 하다가 체포되어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그는 이 사실을 통렬하게 반성했다고 했다. 자신의 역량과 성심이 없어서 체포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나이라면 한번 실수라도 용납하지 말아야 하고 구차하게라도 다시 살려 한다면 때를 기다려야 한다.

그는 출옥 즉시 대한광복단에 가입했다. 대한광복단은 서울 탈환작전을 지휘했던 왕산 허위의 제자 박상진이 관여했던 비밀 결사체였다. 대한광복단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박력 있는 결사체였다. 그들은 결사의 목적을 아주 단순히 국권 회복이라고 못 박았다.

그들의 행동강령에는 처음부터 극비, 폭파, 사살, 폭동 등의 용어가 들어 있었다. 온건한 노선을 취했던 안창호 주도의 신민회와는 대조적인 독립 단체였다. 아마도 그들은 일본 제국주의의 본질을 가장 먼저 파악한 단체였을 것이었다. 그들은 중국의 신해혁명을 살아 있는 텍스트로 삼았다. 대한광복단 단원 200명은 목숨을 내놓겠다는 서약서를 일제히 작성하고 서명했다.

그들은 일제와 2천 만 동포에게 포고문을 내렸다.

우리 4천 년 종사는 잿더미가 되고 우리 2천 만 동포는 노예가 되었다. 일제의 학정이 날로 가중되고 있는 이 때, 조국을 회복하려 함이 본 회의 설립 취지이다. 동포들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우리를 후원하라. 재산가는 미리 저축하였다가 본 회의 요구에 의연히 대처해 주기 바란다. 만약 본 회의 비밀을 누설하거나 본 회의 요구에 불응할 때에는 처단할 것이다.


실제로 대한광복단은 군자금 후원 요구를 받고 일제에 밀고한 친일 부호 네 명을 처단했다. 구미의 장승원, 아산의 박용하, 보성의 양재학, 낙안의 서도현 등이 그들이었다. 대한광복단은 무서운 의열 단체로 성장하다가 일제에 발각되어 1918년 박상진 채기중 등의 수뇌부가 체포, 사형되었다.

김좌진은 독립군 결성을 위해 간도 파견을 자청했다. 예로부터 한국의 선비들은 뜻있는 일을 시작할 때에 그 감회를 시로 표현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가 압록강을 건너며 지은 시는, 신규식이 7년 전 압록강 철교에서 지은 것과 흡사했다.

칼머리 바람에 차고 관산의 달은 하얀데
서릿발 칼 끝 너머로 그리운 조국을 보낸다.
아름다운 이 동산에 도적이 웬 말이냐
쉬지 않고 피 흘려 기필코 찾으리라.

김좌진은 압록강 대안에 있는 유하현으로 건너갔다. 간도는 서간도와 북간도로 나뉘는데, 서간도는 압록강 대안, 북간도는 두만강 대안이라고 보면 무리가 없었다. 김좌진은 서간도를 둘러본 후 북간도 길림성으로 옮겨갔다. 그곳에는 고향 선배 이세영이 교장으로 있는 신흥무관학교가 있었다. 그는 1918년 무오년 11월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독립지사였다.

한편 서일(徐一)은 경술국치 직후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에 망명해 중광단을 조직, 육성하고 있었다. 그는 한학을 하고 사범학교를 마친 지식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일대에서 이미 장군 칭호를 얻고 있었다. 그는 김좌진보다 8세 연상이었다. 3·1운동 이후 대종교 신도들의 헌금과 고향인 경흥에서 온 군자금으로 그는 군정부(軍政府)를 조직하고 1500명의 독립군 부대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사관양성소를 설립하여 우수한 교관을 초빙하고 싶던 차에 김좌진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김좌진에게 급히 사람을 보냈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서일의 순수성은 그가 애써 키운 이름인 군정부를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바꾼 데에서 여실히 나타났다. 그는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군정부라는 이름이 마치 또 하나의 정부 같은 인상을 준다고 하여 이름을 바꾼 것이었다. 그는 스스로 임시정부의 부속 군대로 들어간 것이었다.

북로군정서의 총재가 된 서일은 김좌진을 총사령관 겸 사관양성소장으로 임명했다. 상해에서 온 김규식은 사단장 겸 교관으로, 멀리 운남성 육군강무학교에서 온 이범석은 연대장 겸 교관으로 활동을 개시했다. 이제 북간도의 북로군정서는 서간도의 서로군정서와 함께 한국 우익 독립군의 양대 주축으로 자리 잡았다.

울창한 수목 속에 은폐되어 있는 여덟 동의 병영과 두 곳에 연병장이 따로 마련된 북로군정서 본부에는 3·1운동 이후 수많은 젊은이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18세 이상 30세 미만의 젊은이들이었다. 김좌진과 김규식과 이범석은 혼신을 다하여 그들을 훈련시켰다. 정신교육과 함께 독립운동사와 한일관계사 등의 역사도 가르쳤다. 그리고 병기, 호령, 체조 등의 과목도 교육 과정에 들어 있었다. 그들은 일본군의 모형을 만들어 놓고 사격 훈련을 했다.

얼마 후 졸업생 606명의 사관이 대한광복단으로 편성되었다. 그러자 총 병력은 1200명이 되었고 소총, 수류탄, 대포, 우마차 등의 장비를 갖추게 되었다. 병사들은 노란색 모자에 태극 휘장이 달린 흰색 전투복을 입었다. 일제에 의해 군대가 해산된 지 13년만에 비로소 군대다운 군대가 다시 생겨난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일제와의 전투를 고대하고 있었다.

대포 소리 울리는데 온 세상이 밝아오니
옛나라 청구에도 물색이 새롭도다.
산영 달빛 아래 칼을 가는 나그네
철조망 바람 앞에 말먹이며 서 있다.
깃발 휘날리며 울리는 군악 소리
천만리 먼 곳까지 기운차게 뻗어가니
섶에 누워 쓸개 빨며 10년 벼른 마음
현해탄을 건너가서 원수를 무찌른다.

김좌진은 연병장을 내려다보며 시 한 수를 읊고 운자를 퇴고하고 있는 중이었다. 멀리서 말 한 마리가 화살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짙은 눈썹을 찡그리며 눈을 작게 만들어 보았다. 흙먼지 때문에 말에 어떤 사람이 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능숙한 승마 솜씨인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계속)

덧붙이는 글 | 제국주의에 도전하는 인간들의 매혹적인 삶과 사랑을 전하는 팩션입니다.


덧붙이는 글 제국주의에 도전하는 인간들의 매혹적인 삶과 사랑을 전하는 팩션입니다.
#김좌진 #서일 #대한광복단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아이 어휘력이 떨어져요"... 예상치 못한 교사의 말
  2. 2 그가 입을 열까 불안? 황당한 윤석열표 장성 인사
  3. 3 한국인들만 모르는, 외국인들에게 소름 돋는 '어메이징 코리아'
  4. 4 7세 아들이 김밥 앞에서 코 막은 사연
  5. 5 참전용사 선창에 후배해병들 화답 "윤석열 거부권? 사생결단낸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