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역사팩션 58] 청산리, 전운이 감돌다

김갑수 대하소설 <제국과 인간> 상해의 영혼들편

등록 2008.05.11 17:46수정 2008.05.26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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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창이 끝나자 노래와 만담이 줄을 이었다. 백주원은 왈칵 눈물이 솟았다. 참으로 순박하고 태평한 사람들이었다. 누가 저들에게 고향과 처자를 버리게 만들었던가? 또한 저들은 어떤 영혼을 지녔기에 저리도 순수해 보일 수가 있는 것일까? 새삼스럽게도 백주원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옆에 있던 김규식이 그녀의 손을 꼭 쥐어 주었다.

백주원은 오락회의 홍일점이었다. 젊은 독립군들은 그녀에 대한 선망과 호기심을 숨기지 않았다. 김좌진이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하며 <한오백년>을 부르고 서일이 어깨를 들썩이며 시조창까지 한 마당에 그녀의 목소리를 원하는 병사들의 요구를 마다할 수 없었다. 

그녀는 김태수를 위해 연습해 두었던 <춘향가> 중의 ‘쑥대머리’를 부르기로 했다. 쑥대머리는 옥방에서 칼을 쓴 채 한 길이나 자란 쑥처럼 머리가 난발된 성춘향이 이몽룡을 그리워하며 부르는 처절한 노래였다.

쑥대머리 구우신 형용 적막한 옥방
찬 자리에 생각난 것이 임뿐이라.
보고지고 보고지고 한양 낭군을 보고지고
오리정 이별 후로 한 장 편지를  못 봤으니
부모 봉양 글공부에 겨를이 없어서 이러는가.
새장가 들어 금실 좋아 나를 잊고서 이러는가.
오가는 길 막혔으니 앵무새를 내가 어이 보며
전전반측 잠 못 이루니 나비 꿈을 어이 꿀 수 있나.
내 손가락 피를 내여 사정 적어 편지 할까.
간장의 썩은 눈물로 님의 얼굴을 그려 볼까
연꽃 따는 여자들과 뽕따는 여인들도
낭군 생각 마찬가지 날보다는 좋은 팔자
옥문 밖을 못 나가서 옥중고혼이 될 것이면
무덤 근처 나무는 임 그리운 나무 될 것이요
무덤 앞에 있는 돌은 망부석이 될 것이니
생전 사후 이 원통한 일을 알아 줄 이가
뉘 있더란 말이냐 방성통곡 울음 운다.

간도의 독립군 투쟁은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세계 독립운동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빛나는 승리를 역사에 남겼다. 외세의 지원 없이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군대가 제국주의의 정예군과 맞붙어 두 번씩이나 대첩을 이루어낸 역사는 다른 식민지 국가 어디에도 없는 것이었다.

이미 구한말부터 의병을 이끌고 치열한 전투 경험을 쌓았던 홍범도는 간도국민회 산하 대한독립군 700명을 지휘하여 독립군의 근거지인 봉오동까지 들어온 일본군을 궤멸시켜 버린다.

무장 독립군들의 활약이 국경을 넘어 국내에까지 미치게 되자 일본군은 대대적인 추격 군대를 편성하여 간도로 들어왔다. 당시 봉오동에서는 독립군 북로군독부 연합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봉오동 골짜기는 계곡이 가팔랐다. 홍범도는 일단 봉오동 주민을 대피시킨 다음 일본군 선발대대가 깊숙이 들어오도록 유인했다. 홍범도의 부대는 매복한 채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아 일본군 본대가 봉오동 입구에서 선발대대와 합세하여 들어왔다. 그들은 입구에서 대오를 정비한 후 봉오동 골짜기로 들어섰다. 일본군 본대의 포위망에 걸렸다고 판단한 홍범도는 매복해 있던 병사들에게 사나운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일본군은 3시간여 동안 저항하다가 퇴각해야 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전사자는 157명, 부상자는 300명이 발생했지만 독립군은 전사 4명, 중상 2명에 불과했다.

참패에 충격을 받은 일본군은 관동군까지 동원하여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특공대 10명은 훈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해서 얻은 정보로 일본군의 토벌 작전을 어느 정도 파악해 놓고 있었다. 일본은 영사관에서 30명의 사망자가 난 것을 중국군의 소행으로 몰아 붙였다. 이것은 군대를 중국 영내에 진입시켜 한국 독립군을 토벌하려는 술책이었다.

일본군은 만주에서 자유로운 무장 활동을 시작했다. 그들은 국내군을 북상시키고 시베리아군을 남하시켜 북로군정서 토벌에 나섰다. 그리하여 5만이 넘는 대병력에 항공대까지 포함시켜 북로군정서를 사방에서 압박하며 들어오고 있었다.

장백 삼림의 말미에 있는 지린성의 수림은 울창한 원시림이었다. 김좌진의 독립군은 1차세계대전의 정세 변화로 귀국하는 체코 군대와 협상을 벌여 그들의 무기를 사들였다. 체코군으로부터 은밀히 무기를 인수받은 곳이 이 지린성의 원시림이었다. 오스트리아의 압제를 받고 있던 체코군은 동병상련의 우호감을 실천으로 보여 준 것이었다. 소포, 수류탄, 중기관총 외에도 많은 양의 탄약을 그들은 한국군에게 제공했다. 이 체코의 실탄 80만 발이 청산리 전투에서 사용된 것이었다.

일본군은 중국군에게 한국 독립군의 토벌을 요구했다. 중국군 여단장 멍프이더오는 하는 수 없이 한국 독립군 부대가 있는 곳으로 진공하는 척했다. 그는 조용히 사람을 보내, 한국 독립군에게 지린성을 떠나는 것이 유리하다고 알려 주었다. 한국 독립군 1200명과 예비군 1000명은 장백산 깊은 곳에 들어가 실력을 더 기르기로 했다. 그런 다음 낭림산맥을 넘어 국내로 진공하여 전원이 참혹하게 죽자고 모두 모여 맹세했다. 죽음으로 치욕을 씻음으로써 국내의 동포들을 깨어나게 하자는 희망을 그들은 품었던 것이었다.

그들이 장백산 청산리 방향으로 행군하기 시작했을 때, 대규모의 일본군도 청산리를 향해 출발하고 있었다. 기병과 보병이 어우러진 북로군정서는 180량의 우마차를 거느리고 있었다.

9월 초순 북극의 초가을은 유난히 아름다웠다. 조국의 늦가을과 흡사했다. 뺨을 스치는 만주의 가을바람은 웬일인지 마치 새털처럼 온화했다. 행군 소리는 계곡에 메아리가 되어 은은히 돌아왔고 행군이 내는 흙먼지는 뽀얗고 기다란 띠를 만들고 있었다. 산을 넘으면 산이고 고개를 넘으면 또 고개였다.

그들은 강을 건너 동포 마을에서 하루 노영을 했다. 연대장 이범석은 광복군 1200명을 지휘하고 있었고 총사령관 김좌진은 예비군 1000명을 이끌고 있었다. 김좌진은 외유내강한 사나이였다. 정예군을 부하 이범석에게 맡긴 대신 훈련되지 않은 예비군의 지휘를 스스로 맡은 것이었다. 

그들은 천보산(뎬바오산) 자락을 지나고 있었다. 일본 광산업자가 채굴하는 은동광이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소대 병력쯤의 관민합동수비대가 경계를 서고 있는 것이 보였다. 광복군은 거침없이 그들 가까운 곳으로 다가갔다. 그들은 끝없는 광복군의 행렬을 보고 파랗게 질려 부들부들 떨었다. 참모들이 김좌진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보잘것없는 개들에게는 총알을 낭비하지 말자.”

그 한마디로 행군은 다시 시작되었다. 일본 수비대는 김좌진의 말 궁둥이를 향해 거수경례와 ‘받들어총’을 붙였다.

덧붙이는 글 | 제국주의에 도전하는 매혹적인 인물들의 삶을 통하여 온전한 식민지 역사 청산에 일조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덧붙이는 글 제국주의에 도전하는 매혹적인 인물들의 삶을 통하여 온전한 식민지 역사 청산에 일조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청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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