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워야 할 영국, 버려야 할 영국

[해외리포트 : NHS 60주년 ③] 공공성의 기본 유지하는 영국의 교훈

등록 2008.08.12 15:41수정 2008.08.12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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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전 국민에게 무료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NHS 체계를 갖춘 나라로 유명하다. 지난 7월, NHS는 창립 60주년을 맞았다. 국가가 국민의 의료를 책임지고 세금으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영국의 경험이 한국에 전하는 교훈은 무엇인지 전용호 통신원이 3차례에 걸쳐 짚는다. 1편에서는 NHS의 역사와 의미를 짚고, 2편에서는 영국 의료 시스템을 겪어본 경험을 한국에서 겪은 의료 체계와 비교, 분석한다. 이를 바탕으로 3편에서는 영국의 경험에서 한국이 배워야 할 점을 전한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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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전반적인 의료 서비스를 관리, 감독하는 위원회의 홈페이지. ⓒ www.healthcarecommission.org.uk

영국의 전반적인 의료 서비스를 관리, 감독하는 위원회의 홈페이지. ⓒ www.healthcarecommission.org.uk

NHS는 설립 당시부터 서비스 제공에 관한 몇 가지 원칙을 세워뒀다. 의료 서비스를 ①모든 이에게 보편적으로 제공하며 ②(이용자의) 욕구에 기반해 서비스에 접근하고 ③포괄적 서비스를 ④무료로 제공하며 ⑤상호 협조에 입각해 의료 서비스가 가장 필요한 사람에게 우선 제공한다는 원칙 등이 그것이다.

 

1948년에 수립된 이 원칙들은 치과 진료 및 안경을 맞출 때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등 일부 훼손되긴 했지만, 60년이 지난 지금도 NHS를 떠받치는 핵심 원리로 작동하고 있다.

 

의료비용이 급증하고 국민들의 기대가 높아지면서 이 원칙을 지키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음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또한 다분히 사회주의적인 이 원칙이 세워지고 그러한 가치가 오늘날까지 유지되기까지 정부·국민·노동조합·의료계 등은 갈등과 혼란을 거쳐야 했다.

 

병원 가기 전, 환자 만족도부터 찾아본다 

 

이 과정에서 갈등을 조정하고 NHS의 틀을 유지해온 영국 정부의 노력은 평가받을 만하다. 특히 최근 신노동당 정부는 민간자본 참여 유도 등 시장주의 원리를 강조해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NHS 예산을 대폭 늘리고 의료 서비스의 질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대대적으로 기울였고 그것이 결실을 맺고 있다.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가디언>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영국 정부는 앞으로 15만 명의 의사들을 매년 평가해 일정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이들에게서 의사 면허를 박탈할 계획이다. 이 계획의 밑바닥에는 의사의 수준이 바로 의료 서비스의 질과 직결된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신노동당 정부는 또 의료 서비스의 질을 높이기 위해 한국의 감사원과 같은 독립기관으로 하여금 각 병원에서 제공하는 의료 서비스와 관련된 감사를 철저히 실시하도록 하고 이 결과를 인터넷에 모두 공개한다. 환자가 수술 등을 할 때 병원을 선택하는 중요한 지표로 고려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예를 들어, 신장 결석을 치료하기 위해 내가 사는 주소지를 인터넷 사이트(www.nhs.uk)에 입력하면 인근 병원들의 리스트가 화면에 나타난다. 해당 기관의 종합적인 의료의 질, 청결도, 환자들이 평가한 만족도 등 각종 평가 결과가 자세히 나온다. 특정 병원의 어느 부분이 훌륭하고 어느 부분이 부족한지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이처럼, 영국 정부는 국민에게 질좋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끊임없이 의료 서비스 제공자와 의료 시장에 개입해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때로는 강하게 반발하는 의사 집단과 얼굴을 붉혀가면서도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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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HS 홈페이지에 제공된, 신장 결석과 관련된 병원들에 대한 평가와 안내. ⓒ www.nhs.uk

NHS 홈페이지에 제공된, 신장 결석과 관련된 병원들에 대한 평가와 안내. ⓒ www.nhs.uk

 

공짜로 약 나눠주는 영국, 몇천원 없어 병원 못가는 한국

 

영국의 역사적 경험과 의료 시스템이 한국과 전혀 다르지만, 두 나라의 의료 시스템을 모두 이용하면서 한국이 영국에서 배웠으면 하는 것들이 몇 가지 생겼다. 물론 이 단상은 의료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공공성 개념 및 그 가치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한국에는 희박한 것 같다. 영국은 2차 세계대전부터 본격화된 복지국가 이념에 따라 의료를 '국민을 위한 서비스'이자 '시민의 권리'로 보고, 이를 중요한 공공 서비스로 발전시켜왔다.

 

이 공공서비스를 유지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재원을 마련하고, 시민들이 그 서비스를 안정적으로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을 국가의 중요한 책무로 여긴 것이다. 특히 사회적 약자인 노인과 어린이·장애인 등이 누릴 수 있는 복지 혜택이 다양하다. NHS에서도 노인과 어린이·임산부에게는 대부분 약을 무상으로 제공하거나 약값의 일부만 받고 있다.

 

물론 한국에서도 건강보험 제도를 통해 의료 공공성을 어느 정도 확보했다. 그렇지만 서비스 제공 범위가 제한되는 등 제도의 사회적 영향력 면에서는 영국에 한참 못 미친다. 의사와 병원의 이익을 위한 과잉 진료와 과잉처방 등이 여전히 횡행하고 있지만 이를 제어할 수 수단은 미흡하기 짝이 없다.

 

더욱이 한국 정부는 공공성 마인드 자체가 희박할 뿐만 아니라 강력한 이익 집단인 의사집단과 갈등을 빚을 것을 우려해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

 

그러다 보니, 경제적으로 어려운 빈곤층의 경우 불과 몇천원, 몇만원이 없어서 병원을 이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노인장기요양보험 시행을 앞둔 올해 초(7월부터 시행됐다) 시범사업 지역에서 장기요양 서비스를 이용한 경험이 있는 노인들과 인터뷰를 했는데, 적지 않은 노인들이 "약값을 댈 비용도 기저귀 등 기본적인 가재도구를 살 돈도 없다"고 하소연했다.

 

환자를 돈으로 보이게 만드는 의료선진화

 

상황이 이런데도, '의료산업 선진화'라는 미명 아래 의료 부문에 시장 논리 도입을 전면 추진했던 노무현 정부에 이어 이명박 정부도, 무산되기는 했지만 제주도에 영리병원 설치를 추진했다.

 

공공성에 기반을 공공 의료가 절실한 빈곤층이 점점 늘어나는데도, 그와 정반대로 오히려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버리는 시스템을 추진한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의료를 경제 성장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만 보고 있을 뿐이며, 공공을 위한 서비스나 권리라는 개념은 그들에게 부재한 것 같다.

 

이러한 방침대로 진행할 경우 경제적 여유가 넘치는 소수에게는 서비스 질이 좋아질지도 모르겠지만, 의사들은 더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돈 많은 환자만을 위해 서비스를 제공할 것이고 결국 대다수 평범한 시민은 의료에서 소외될 것으로 우려된다.

 

의료 부문에서 노골적인 영리 추구를 지향하는 시장화를 추진하려면, 최소한 시범사업을 통해 그 정책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면밀하게 연구하고 보완점을 발표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에서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가? 그저 새로운 시장을 키워야 한다는 성장 논리만으로 모든 것을 힘으로 밀어붙이려 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시장만능주의를 주창하는 이명박 정부는 더 나아가 각종 공공 기관의 '민영화'를 계획하고 있다('선진화'라는 애매한 말로 포장하고 있지만 그 본질은 민영화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공공 기관의 방만 경영과 재정 문제 등을 민간을 통해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민영화를 추진하기 이전에 한국의 공공 기관들을 영국 NHS처럼 철저히 관리·감독해서 경영이 제대로 이뤄질 수 있도록 지속적이고 적극적으로 추진했는지 의심이 든다.

 

영국 병원의 대기시간 감축, 민영화로 해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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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석학 기든스는 정부가 민영화에 대해서 신중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최근 저서. ⓒ www.polity.co.uk

세계적인 석학 기든스는 정부가 민영화에 대해서 신중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최근 저서. ⓒ www.polity.co.uk

영국 신노동당 정부는 의료 서비스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 대기시간 감축 등 명확한 개선 목표를 정한 후, 이를 달성하기 위해 NHS의 의사와 간호사 등에 대한 철저한 관리·감독을 실시했다. 그 결과,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문제가 상당 부분 개선됐다.

 

그에 반해 한국의 공기업은 늘 정권을 도운 인력을 위한 '낙하산 인사, 보은 인사'로 채워졌을 뿐이며, 정부에서 장기 계획을 세워 체계적으로 공기업 개선책을 실행한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시민의 기본권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공기업의 공공성을 가볍게 포기하기 이전에, NHS처럼 이런 문제점을 개선하면서 공공성을 유지하는 방안부터 찾아야 하는 것 아닐까?

 

이명박 정부가 민영화를 추진하려는 이유는 효율성 제고 및 재정 확보라는 경제적 고려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세계적인 석학이자 신노동당의 이른바 '제3의 길' 노선을 이론적으로 기초한 앤서니 기든스는 최근 발간한 책(<Over to you, Mr Brown>)을 통해 "민영화의 판단 기준으로 무엇이 가장 싸고 효율적이냐는는 식의 경제적 효율성만 고려돼서는 안 된다"며 "무엇이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는지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무조건적인 민영화보다는 기존 시스템을 재조정하거나 그 시스템을 관리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신자유주의 영국'은 복지국가였다

 

시장주의를 맹신하는 한국의 우파들은 흔히 영국에서 배워야 할 교훈으로 민영화, 시장주의 우선 논리, 정부 기능 최소화 같은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꼽는다.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처럼 한국도 노조를 무력화하고 공공 부문을 민영화하며 정부의 시장 개입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금과옥조다. 

 

그러나 이 곳에서 유학 생활을 할수록 느끼는 것은 영국이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펼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 강조하는 것은 영국의 극히 일부만을 본 것이라는 점이다. 나는 소외된 노인·장애인·어린이 등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펼치는 사회적 공공성이 영국 사회에 살아 숨쉬고, 복지국가의 전통이 영국의 틀을 유지하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대처 총리를 지나면서 복지예산 증가율이 둔화되긴 했지만 여전히 영국 국가예산의 40~50% 정도는 국민을 위한 복지 관련 항목에 지출되고 있다. 국민을 위한 질좋은 복지 서비스를 위해 의료·교육·주택·노인·장애인 문제 등에 관한 구체적인 사회 정책을 놓고 영국 지도자들이 수시로 토론하는 모습을 언론을 통해 쉽게 접할 수 있다. 아직도 정책 대결 대신, 비리와 부정, 정책적 실수 등에 관한 비판과 반박이 주류인 한국 사회와 비교하면 부럽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신자유주의적인 영국의 시스템은 사민주의 전통이 강한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 국가나 스위스 등의 복지 시스템보다는 못할지도 모르지만, 한국과 비교하면 국가라는 존재가 얼마나 국민의 삶을 안전하고 편하게 지켜주는 버팀목이 될 수 있는지를 느끼게 해준다.

 

이명박 정부의 주장대로 경제 성장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 성장은 수단일 뿐이며 그 자체가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는 없다. 성장의 결실이 일반 국민의 삶에 골고루 펴져 더 인간적이고 살기 좋은 국가를 만드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가 돼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약육강식의 시장주의에 매몰되는 대신, 서민은 물론이고 소외된 사람들까지 넉넉히 보듬어 안을 수 있는 공공성이 살아 있는 복지 국가를 지향해야 하지 않을까. 정권이 여러 차례 바뀌었음에도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60년 동안 영국인과 함께해온 NHS의 역사가 한국에 전하는 교훈은 바로 이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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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의료노조는 7월 25일 '의료 민영화 저지 결의 대회'를 열고 의료 공공성 확보를 주장했다(자료 사진). ⓒ 보건의료노조

보건의료노조는 7월 25일 '의료 민영화 저지 결의 대회'를 열고 의료 공공성 확보를 주장했다(자료 사진). ⓒ 보건의료노조

#NHS #무상 의료 #공공 의료 #민영화 #의료산업선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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