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모델은 왜 무표정할까?

[책갈피] 장 보드리야르 <소비의 사회>

등록 2009.09.29 15:40수정 2009.09.29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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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티시즘이 기호 속에 있지 결코 욕망 속에 있지 않은 바와 같이, 패션모델의 기능적 아름다움도 '몸의 선(線)'에 있는 것이지 결코 표정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들의 아름다움은 특히 무표정한 아름다움이다. 얼굴 모습이 가지런하지 않다든가 추하다든가 하는 것은 무시할 수 없지만 여기에서는 제외된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은 추상성, 공허함, 황홀감의 부재 및 투명성 속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름다움의 비육체화는 극단적으로 말하면 눈빛 속에서 집중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넋을 빼기도 하며 넋을 잃기도 하는 멍한 눈동자, 욕망을 과도하게 느끼게 하면서도 욕망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는 눈빛, 의미도 없이 빛나며 검열을 환영하고 있는 듯한 눈은 아름답다. 이것이야말로 그녀들의 눈빛의 기능이다. 보는 사람을 돌로 만들어버리는 그 메두사(Meduse)의 눈, 메두사에 의해 돌이 된 눈, 그것은 순수한 기호이다. (.....) 이 현상이 진행됨에 따라 육체, 특히 여성의 육체(보다 특별하게는 패션모델이라고 하는 절대적인 모델의 육체)는 광고가 전달하는 무성(無性)의 기능적인 일련의 사물들과 동류적(同類的)인 사물이 된다.

- 장 보드리야르 <소비의 사회>


무표정한 얼굴, 도발적인 눈빛의 패션모델에게선 알 수 없는 거리감이 느껴진다. 필요 이상으로 오만하고 도도해 보이는 표정과 몸짓은 거부감마저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장 보드리야르가 <소비의 사회>에서 밝혔듯이 패션모델의 무표정한 얼굴, 도발적인 눈빛은 치밀하게 계산된 자기 연출이자 기호(記號)에 불과하다.

우리가 일상에서 언어라는 기호체계에 의존해 서로 소통하는 것처럼 비(非)언어적 도구로 대중과 소통해야 하는 패션모델에게 있어서 가장 강력한 무기는 무표정한 얼굴과 도발적인 눈빛이다. 이렇게 무표정한 얼굴과 도발적인 눈빛으로 형상화되는 아름다움은 보드리야르가 말한 "무표정한 아름다움", 즉 기능적인 아름다움으로 규정할 수 있다.


흔히 에로티시즘이 욕망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에로티시즘은 욕망이 아닌 기호 속에 존재한다. 패션모델의 기능적 아름다움이 얼굴 표정이 아닌 몸의 선(線)에 집약되어 있다고 보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패션모델의 기능적 아름다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은 바로 눈이다. "넋을 빼기도 하며 넋을 잃기도 하는 멍한 눈동자, 욕망을 과도하게 느끼게 하면서도 욕망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는 눈빛, 의미도 없이 빛나며 검열을 환영하고 있는 듯한 눈"은 보는 사람들을 돌로 만들어 버리는 메두사의 눈처럼 대중을 위압한다. 이는 패션모델의 기능적 아름다움이 대중을 구경꾼으로 전락시키고 무성화(無性化), 사물화하는 현대 소비사회의 메커니즘과 맞닿아 있음을 의미한다.


오늘날 메두사의 눈빛에 포획된 대중은 (광고, TV, 영화, 패션쇼, 콘서트 등을 매개로) 어디에서나 발견된다. 그리고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정신이나 영혼이 아닌 육체의 건강과 아름다움이다. 이진경씨에 의하면 패션모델은 "이러한 육체를 위한 코드화된 모델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이런 소비 대상의 중심에 이제 육체가 들어선다. 건강함과 아름다움은 개인의 절대적인 지상명령이 된다. 건강한 육체를 위해 건강식품·의약품·의료 자체가 일상사가 되며 아름다운 육체를 위해 화장품과 의복이 삶의 울타리를 치게 되고, 날씬한 몸매를 위해 육체를 배려하고 억압하게 된다. 모델은 이러한 육체를 위한 코드화된 '모델'을 보여준다. - 이진경 편저, <문화정치학의영토들>


그런 의미에서 패션모델이 보여주는 기능적인 아름다움은 앙드레 모로아의 표현처럼 찬란하긴 하지만 따뜻하지 않은 겨울 태양 같은 인상을 준다.


만약 현대 소비사회가 좀더 인간적인 모습으로 변한다면 우리도 패션모델의 눈빛에서 메두사의 눈빛이 아닌 점멸하는 등대의 불빛이나 혹은 청마 유치환의 시 '깃발'에 나오는 '소리 없는 아우성' 같은 매력적인 기호를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2009.09.29 15:40 ⓒ 2009 OhmyNews

소비의 사회

장 보드리야르 지음, 이상률 옮김,
문예출판사, 1992


#보드리야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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