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도 모자라 4대강까지 파헤치나

[책갈피] 장 보드리야르 <소비의 사회>

등록 2009.12.01 14:30수정 2009.12.01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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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도시에 포위되고 녹지대나 자연보호구역의 형태로, 아니면 별장의 배경으로 바둑판처럼 구획되고 '갇혀버린 채로' 제공되며 견본상태로 전락한, 전원형태로서의 자연의 '재발견'도 사실 자연의 르시클라주이다. 달리 말하면 자연은 이제 더 이상 문화와 상징적 대립관계에 있는 본래적으로 특수한 존재가 전혀 아니라 하나의 시뮬레이션 모델, 즉 유통과정에 재투입된 자연의 기호의 소비된 모습, 간단히 말하면 르시클라주된(recyclee) 자연이다.

- 장 보드리야르, <소비의 사회>

최근 우후죽순처럼 늘어난 생태 환경 프로그램 덕분에 TV 화면이 온통 녹색으로 뒤덮인 느낌이다. 일단 자연친화적인 녹색이 자주 눈에 띄니 나쁠 건 없지만 정부가 4대강 사업을 녹색혁명으로 포장하고 홍보하는 데 열을 올리는 와중에 그동안 명맥만 유지하던 생태 환경 프로그램이 대거 신설되는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문득 워터게이트 사건과 이라크 전쟁을 특수한 상황처럼 부각시켜 일상적으로 만연한 제2·제3의 워터게이트사건·이라크전쟁을 은폐하고 있으며 미국의 실체가 디즈니랜드처럼 유치하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디즈니랜드를 만들었다고 주장한 장 보드리야르가 생각난다.

그가 주장한 '시뮬라시옹' 이론에 입각해 보면 현재 TV에 범람하는 각종 생태 환경 프로그램은 역설적으로 생태 환경이 처한 위기 상황을 반증한다고 볼 수 있다. 이미 인공적 복원에 의한 청계천과 생태하천인 양재천이 극명하게 엇갈리는 평가를 받고 있음에도 여전히 인공적 복원에만 매달리는 것은 누가 봐도 친환경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장 보드리야르의 말처럼 확장된 형태의 르시클라주(재교육)에 불과하다.

원래 르시클라주(recyclage)란 한마디로 '재교육', 즉 자신의 직업이나 지위 등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지식이나 학식을 시대흐름에 맞게 재충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좀더 넓게 보면 주기적으로 변하는 유행이나 외모·건강에 대한 투자(다이어트, 성형, 건강진단 등) 등도 르시클라주에 포함된다.

아울러 택지조성, 환경보전 등의 명목하에 본래의 모습이 포기된 자연을 재개발하는 것도 르시클라주에 속한다. 보드리야르의 표현을 빌면 '거대한 도시에 포위되고 녹지대나 자연보호구역의 형태로, 아니면 별장의 배경으로 바둑판처럼 구획되고 갇혀버린 채로 제공되며 견본 상태로 전락한, 전원형태로서의 자연의 재발견도 사실상 자연의 르시클라주'인 것이다.

국어사전에서 자연이란 단어를 찾으면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아니하고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거나 우주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모든 존재나 상태'라고 되어 있다. 자연에 인공이 가미되면 그것은 이미 자연이 아니다. 설령 인간에 의해 원형이 파괴된 자연이 자정 작용을 통해 원상 복구된다 해도 인간의 자연 파괴 행위가 정당화되진 않는다.


본질적으로 청계천과 4대강은 진정한 의미의 녹색혁명과는 거리가 먼 (자연에 적용된) 르시클라주에 불과하다. 겉모습은 아름답게 포장할 수 있을지 몰라도 한 번 소멸된 자연의 야성(野性), 약동하는 생명력은 인공적으로 복원할 수 없다.

인간이 자연을 르시클라주의 개념으로 바라보는 순간 자연 파괴, 인공적 복원, 재개발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 된다. 과연 그것을 친환경, 자연 보호, 생태 보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청계천을 르시클라주의 모델 하우스로 만든 것도 모자라 4대강을 르시클라주의 거대한 실험장으로 만들 셈인가?

인간이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믿음은 허황된 꿈에 불과하다. 지구온난화 현상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지 않은가? 자연은 인간으로부터 받은 만큼 돌려준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더는 자연을 괴롭히지 말아야 할 것이다. 

2009.12.01 14:30 ⓒ 2009 OhmyNews

소비의 사회

장 보드리야르 지음, 이상률 옮김,
문예출판사, 1992


#르시클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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