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과 인간] 이강국 '눈내리는 만경들 걸어가네'

[김갑수 역사팩션 141] 3부 '열두 개의 눈동자' 편

등록 2008.10.23 18:30수정 2008.10.23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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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 때 김옥균의 하수인들에게 난자당한 민비의 아우 민영익은 알렌이라는 서양 의사에게 치료를 받았다. 알렌은 잇속이 밝은 미국인이었다. 그는 민영익을 3개월 간 정성으로 치료하여 민비와 고종의 신임을 얻는다.

조정에서는 갑신정변의 연루자 홍영식의 집을 알렌에게 하사했다. 알렌은 그 집에 의료시설을 만든 뒤 광혜원이라고 이름 붙인다. 최초의 서양식 근대 병원이라고도 일컬어지는 광혜원은 이렇게 해서 세워진 것이었다. 그 뒤 광혜원은 제중원으로, 그리고 제중원은 우여곡절을 겪어 세브란스 병원으로 발전한다. 세브란스는 돈을 댄 미국 석유 사업가의 이름이었다.

세브란스 병원 내과에 근무하게 된 김수임이 이런 병원의 내력을 알 리 없었다. 세브란스 병원은 서울역에서 남대문으로 가는 도로의 중간쯤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는 내과 과장의 통역원 겸 일반 사무를 맡았다.

김수임은 언제나 평화롭고 아름다운 삶을 갈망하며 살았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막연한 것을 소망하는 형이었다. 병원에 부임할 때, 젊고 친절한 의사 청년이 나타나 자기에게 연애라도 걸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그녀에게는 은연 중 있었다.

그런데 병원은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의외로 각박한 일터였다. 대부분의 의사들은 단순하고 권위적이었다. 아니면 중년을 넘긴 아저씨거나 할아버지거나 외국인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소독내를 맡으며 우울한 환자들과 함께 근무해야 했다.

이강국과 김수임의 두 번째 만남

어느 날 김수임은 서류를 들고 병원 복도를 걷다가 환자복을 입고 휠체어에 앉아 있는 한 청년을 보게 되었다. 그는 하얀 얼굴에 짙은 눈썹을 가진 청년이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환자 쪽으로 다가갔다. 휠체어의 환자는 간호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환자는 틀림없이 이강국이었다. 김수임은 주저 없이 이강국의 앞으로 가서 인사를 했다.


"어머! 이 선생님, 어떻게 여길…."

이강국은 김수임의 얼굴을 뚫어져라 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간호사가 김수임의 얼굴을 곱지 않은 눈빛으로 흘겨보았다. 당황한 김수임은 서류를 가슴에 끌어안으며, "실례했습니다"하고 머리를 숙이고는 휠체어 옆으로 지나가 버렸다. 그녀는 자기가 사람을 잘못 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강국을 뇌리에서 지워 본 날이 없었다. 그녀의 뇌리에는 이강국이 유일한 남성의 이미지로 자리 잡혀 있었다. 나윤숙에게 듣기로 이강국은 베를린 유학을 마친 후 돌아와서 또 민족해방운동을 하다가 투옥되었다고 했다. 그녀는 경성제대를 나오고 외국 유학까지 다녀온 그가 왜 그토록 험난한 인생을 선택하여 살아가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그녀는 사회주의 청년 중에 엘리트 지식인이 많다는 말은 들어 알고 있었다.

퇴근 전 환자 차트를 정리하던 김수임은 눈동자가 부르르 떨렸다. 그녀의 손에는 입원 환자 이강국의 차트가 쥐어져 있었다. 그녀는 차트를 손에 쥔 채 얼굴을 들고 눈을 감았다. 가슴이 고동치고 있었다. 자기가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복도에서 마주친 환자는 틀림없는 이강국이었다. 마음을 가다듬은 그녀는 조심스레 차트를 훑어보았다. 병명은 급성 폐렴이었고 직업은 경인상사 사장이라고 되어 있었다. 그는 310호 독실에 배정되어 있었다.

김수임은 퇴근길에 이강국이 머무는 310호에 눈길을 주었다. 그녀는 어서 복도 끝으로 달려가 이강국을 만나고 싶었다. 그런데 자기를 보고도 알은 체를 하지 않은 점이 마음에 걸렸다. 필시 어떤 곡절이 있으리라는 짐작이 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가 자기에게 무심하여 알아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소외감이 그녀의 마음을 어둡게 했다. 그러자 금세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두 손으로 코트 깃을 여미며 310호로 향하던 발길을 돌렸다.

다음 날 아침 내과 과장은 김수임에게 차트 하나를 내밀더니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이강국의 차트였다. 예상대로 과장은 310호 쪽으로 먼저 걸어갔다. 그녀는 과장의 뒤를 따르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하기 어려웠다. 병실에 들어선 그녀는 아무것도 볼 수 없을 정도로 흥분되어 있었다. 그녀는 먼발치에 서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과장이 그녀를 불렀다.

"미스 김, 이리 오세요."

그 때서야 그녀는 침대에 엉거주춤 앉아 있는 이강국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이강국의 팔에는 링거가 꽂혀 있었다. 의사가 환자에게 물었다.

"기침은 가라앉으셨나요?"
"훨씬 나아졌습니다."

김수임은 이강국의 시선을 피해 벽으로 눈을 돌렸다.

"공기 좋은 데에 가셔서 요양하시며 얼마 동안 약을 복용하시면 될 텐데 물론 사정이 그렇지 못하시겠죠?"

의사는 이강국이 어떤 일을 하는지 알고 있는 듯했다.

"숨이 차지는 않으신가요?"
"많이 좋아졌습니다. 치료 덕분에."
"보호자는 안 오셨나 보죠?"

이강국은 씩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김수임은 함흥에서 나윤숙과 같이 만난 이강국의 처를 떠올렸다. 원장은 김수임에게 다가오라는 손짓을 했다. 김수임은 앞으로 가 의사와 이강국의 사이에 섰다.

"이 분은 내 비서입니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이 버튼으로 비서에게 연락하시기 바랍니다."

김수임은 고개를 숙였다 들며 이강국의 얼굴을 흘깃 보았다. 이강국은 그녀의 은밀한 시선을 다사로운 미소로 받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네가 누구인지 안다는 표정이었다. 김수임도 나도 너를 안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의사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 그대로였다.

김수임의 몸에서는 엷은 비린내가

과장실로 돌아온 김수임은 손을 씻었다. 떨리는 가슴과 달아오르는 얼굴을 과장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등에 대고 의사가 말했다.

"대단하신 분입니다. 미스 김. 잘 돌봐 드리세요. 신원이 노출되면 안 되는 분이라서 간호사를 따로 배정하지 않은 겁니다. 각별히 유의하기 바랍니다."

며칠 후 이강국은 충청도와 전라도 사이를 흐르는 금강의 연락선에 몸을 싣고 있었다. 경성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종착지인 장항에 내린 그는 배로 갈아 타 군산으로 가고 있었다. 그는 군산에서 간단한 일을 처리한 후 다시 광주로 갈 예정이었다. 광주에 가서 방직공장의 공원으로 은신해 있는 박헌영을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박헌영이 사람을 보내 긴히 상의할 일이 있으니 한 번 내려와 달라고 했던 것이었다.

연락선은 하늘 높이 치솟은 장항제련소 굴뚝을 뒤로 하고 황해의 탁류에 거침없는 하얀 포말을 만들며 달리고 있었다. 멀리 맞은편 해안에 군산항이 있었다. 항만의 오른쪽으로 이어져 있는 월명산의 낮은 구릉들이 한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이강국은 식민지 경제 수탈을 가장 뚜렷이 드러내는 항구 도시 군산을 바라보며 우울한 감회에 젖어들었다. 그는 작년 경성고무공장의 파업으로 군산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지들을 떠올렸다. 이제 그 자신도 수배된 몸이라서 면회조차 할 수 없었다. 동지들의 서글서글했던 눈동자가 그의 눈앞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배가 군산 쪽으로 가까워지자 그는 째보선창쯤에서 강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생선 비린내를 맡았다. 군산항에는 거대한 배 두 척이 정박해 있었고, 그 아래 상류 쪽으로는 수없이 많은 고깃배들이 닥지닥지 붙어 있었다. 그는 도도히 흐르는 탁류에 눈을 주었다. 다시 비린내가 그의 코끝을 스쳤다. 순간 그는 김수임의 몸에서 맡았던 엷은 비린내를 떠올렸다. 늦은 밤 노크도 없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온 김수임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를 기억하시지요?"

이강국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두 팔을 벌렸다. 김수임은 이강국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오랫동안 격정을 누르고 지내왔던 남녀는 앞뒤 재지 않고 몸부터 섞었다. 이강국은 감옥으로 뜨개질을 해 왔던 김수임이 그렇게 마냥 순진하기만 한 처녀가 아니었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몸에서 풍긴 엷은 비린내에서 그녀가 범상하지 않은 풍상을 체험한 여인임을 직감한 것이었다.

다음 날 이강국은 만경 들판을 걷고 있었다. 그는 익산을 거쳐 전주로 가야 했지만 아무래도 기차로 가는 일이 위험할 것 같았다. 그는 정읍까지만 무사히 갈 수 있다면 그곳에서 광주까지 이르는 안전한 길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도보를 선택한 것이었다.

가을 들판은 식민지의 것이라고 해서 외관이 크게 다를 리는 없었다. 들녘에서는 추수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여기저기 허리를 굽혀 일하고 있는 농부들의 밀짚모자가 들썩거리고 있었다. 까마득히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광활한 들판에는 성숙한 벼들이 노란 구름처럼 물살을 치고 있었다.

물론 그 비옥한 볍쌀들은 모두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옮겨질 운명임을 이강국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모처럼 대하는 조국의 자연으로부터 혁명의 에너지 같은 것들을 새삼 충전하고 있었다. 농부 행색의 그는 밀짚모자의 챙을 올려 한없이 정겨운 조국의 들판을 감동적인 눈빛으로 둘러보면서 걸어 나갔다.

뭉게구름이 그를 따르고 있었고, 가을 햇살과 서쪽에서 부는 바람이 그의 어깨와 가슴에 머물거나 부딪치고 있었다. 이제 가을걷이가 끝나고 서리가 만들어질 때쯤이면 만경 들판의 하늘은 낮게 찌푸릴 터인데, 어느 날인가 그 하늘에서 눈이라도 여한 없이 내린다면 식민지 넓은 들판의 설움마저도 잠시나마 덮어 버릴 것이었다.  

눈 내리는 만경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는 깊은 땅 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 하던/ 잔뿌리였더니... (안도현, <서울로 가는 전봉준>에서)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는 데 기여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약 200회까지 연재됩니다.


덧붙이는 글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는 데 기여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약 200회까지 연재됩니다.
#이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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