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과 인간] 로스앨러모스 황무지에 선 임수경

[김갑수 역사팩션 142] 3부 '열두 개의 눈동자' 편

등록 2008.10.25 19:19수정 2008.10.25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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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은 어둡다

임수경이 들어간 로스앨러모스 연구소는 도시에서 살던 학자들에게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여행은커녕 이동의 자유도 제한되었다. 전쟁이 끝나면 실업자로 전락할 위험이 따르기도 했다. 게다가 군의 지휘와 통제를 받는 연구소라서 독창성이 발휘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임수경은 아인슈타인의 추천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물론 원자폭탄 같은 엄청난 인류 살상 무기가 개발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다만 그녀는 획기적인 폭탄의 개발 연구임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상은 일본이 될 것이라고들 했다.

임수경은 어서 전쟁이 끝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일본의 적성국인 미국 출신 학자로서 조선 땅에 섣불리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일본이 패망하게 되면 식민지 조선에도 긍정적인 변화가 닥치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미국 정부가 주관하는 연구와 실험에 의연히 동참하기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참여한 연구와 실험이 그토록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죽이는 결과를 낳을지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그 일에 뛰어들지 않았을 것이었다. 사실 미국 정부가 로스앨러모스에서 진행시킨 맨해튼프로젝트는 인류사상 초유의 대량살상무기를 만드는 파괴적이고 음습한 공작에 불과한 것이었다.

"나는 어두운 영혼을 가졌습니다."

물리학자들과의 첫 만남에서 이런 말을 했다는 그는, 파란 섬광이 로스엘러모스의 상공에 번뜩일 때, “주여 이런 일은 가슴을 짓누릅니다”하며 고통스러워했다고 한다.


"나는 이제 파괴자가 되었다. 죽음의 신이 되고 만 것이다."

일본 본토에 두 개의 폭탄이 떨어진 날에 그가 한 말은 이것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미국 대통령 집무실에서 그는 트루먼에게 열 손가락을 갈퀴처럼 만들어 보이며 말했다.

"각하, 내 손에는 피가 묻어 있습니다."

그는 물리학자 오펜하이머로서 원자폭탄을 최초로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한 맨해튼 프로젝트의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장이었다. 트루먼은, '그 얼간이는 원자탄보다 더 무서우니 자기에게 데려오지 말라 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미국 뉴멕시코주 로스앨러모스는 완벽한 황무지였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동쪽으로 뻗어 있는 로키산맥과 사막에 드문드문 서 있는 가시선인장밖에는 없었다. 그곳에서 극비리에 공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작은 에피소드를 빼고는 모든 일이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로스앨러모스 서쪽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초원이 나타나는데, 연구단지가 조성되어야 할 그곳에 웬 이상한 기숙사 학교가 하나 있었던 것이다. 그 학교는 개교한 지 30년쯤 되었는데, 허약한 부유층 자녀들을 위해 세워졌다고 했다. 학생들은 난방이 되지 않는 통나무집에서 살았고, 눈 내리는 겨울에도 반드시 교복을 입어야 했는데 유별나게도 교복의 하의는 반바지였다.

미국 정부는 50만 달러의 후한 비용으로 보상했다. 그것은 작은 학교 건물과 부지, 학교 소유의 트랙터 두 대와 60마리의 말 값을 파격적으로 계산한 금액이었다. 학교를 비우라고 했는데도 교장은 전혀 난감해하지 않았다. 얼마 후 학교는 땅값이 더 싸고 날씨가 한층 더 혹독한 곳으로 옮겨갔다.

군인 베어드와 천재 파인만

임수경은 창문 너머로 치솟고 있는 모래 폭풍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두 손에 연구 차트와 커피 잔을 들고 서 있었다. 낮 기온이 며칠 계속 높은 뒤에는 어김없이 모래폭풍이 일어나고는 했다. 모래폭풍은 뜨거워진 공기의 대류 현상으로 일어나는 것임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솜처럼 고운 모래 가루가 모여 산덩이 크기로 만들어져 사막을 떠다니는 것이 모래폭풍이었다. 그것이 갑자기 방향을 틀어 연구소 쪽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연구소에 와 있는 미국의 젊은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을 생각했다. 그는 경박하고 치기가 넘쳤다. 그는 모래폭풍이 또 언제 올 것인가를 순식간에 계산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계산은 번번이 적중했다. 놀랍게도 그는 자기의 계산이 적중할 때마다 한 번도 으스대지 않는 일이 없었다. 모두들 그를 천재로 인정해 우대했지만 임수경만은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천재면 뭘 해, 콤플렉스투성인 걸.'

그녀는 차라리 파인만 같은 경박한 물리학자보다는 베어드 같이 순수한 면이 있는 군인이 덜 나쁘리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조국에 있는 동생 주호를 떠올렸다. 동생도 좋은 교육만 받는다면 파인만보다 못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베어드가 보내 온 편지를 생각했다. 베어드는 며칠 전 마지막 편지를 그녀에게 보내왔다. 베어드는 중령으로 진급한 날 이 편지를 쓰게 되어 기쁨과 슬픔이 교차한다고 운을 떼었다. 그러나 진급의 기쁨은 미스 임과 이별해야 하는 슬픔에 비해 너무 사소할 뿐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베어드에게 연민을 느꼈다. 그리고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미스 임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불편하게 해 미안할 따름이라고 사과했다. 그리고 자기는 필리핀 파견을 자원했다고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임수경은 마음이 아팠다. 처지를 바꿔 생각해 볼 때 그것은 안쓰럽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자기가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그가 자기의 사랑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정황이라면 그것은 지독히 슬픈 일임에 틀림없었다.

임수경은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섰다. 물리학자들이 모여 잡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임수경에게 손짓으로 인사했다. 그녀는 조그만 동작으로 목례를 하며 자리에 앉았다. 언제나 목소리가 큰 것은 파인만이었다.

"우리가 여기서 뭘 하는지 아나요?"
"그럼 알지. 원자폭탄을 만들지."

다시 파인만이 묻고 누군가 대답했다.

"폭탄은 얼마나 커야 할까요?"
"그보다는 연쇄반응을 지속시킬 수 있는 최소 규모를 알아내는 일이 중요하지."

"폭탄 안쪽으로 되돌려 보낼 반사벽으로는 어떤 물질이 좋을까, 그리고 우라늄은 얼마나 순수해야 할까요?"

파인만은 자기가 잘 알고 있는 것을 일부러 묻고 있는 것 같았다. 임수경이 다가갔을 때  물리학자들의 화제는 사랑으로 바뀌어 있었다. 역시 대화를 주도하는 것은 파인만이었다.

"우리에게는 사랑을 관습으로 보는 능력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지속하려 하지 않고 일시적인 선행이나 보이스카우트 같은 돌출 행동을 하곤 하지요. 그래야 여성의 사랑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는 멍텅구리들이 많아요."

파인만은 임수경을 쳐다보며 다시 알은 체를 했다. 그는 임수경에게 자기의 말이 맞지 않느냐고 동의를 구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동의한다는 어떤 표시도 내지 않았다.

'사랑이 관습일까. 그러면 사랑이 지겨워지지 않을까. 사랑이 뭔지를 모르기 때문에 저런 말을 하지. 사랑을 관습으로 보는 남자보다는 차라리 보이스카우트가 낫겠다.'

그녀는 이런 생각들을 서둘러 하면서 천천히 스프를 저었다.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해 보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덧붙이는 글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해 보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로스앨러모스 #오펜하이머 #맨허튼프로젝트 #원자폭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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