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과 인간] 장준하, 별빛 차가운 밤의 탈영극

[김갑수 역사팩션 144] 3부작 '열두 개의 눈동자' 편

등록 2008.10.29 15:15수정 2008.10.29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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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가 처음부터 쓰카다 부대에 배속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서주 북산에 있는 수송대에 잠시 머물렀었다. 예정대로라면 그곳에서 탈출을 감행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단신으로 탈출을 할 수가 없었다. 일본군 장교는 무시로 조선인 학병들을 위협했다. 만일 한 명이라도 탈출하면 탈출자는 사형이고 나머지 조선인 학병에게도 무서운 보복이 가해진다고 했다. 그것은 조선인 학병을 막기 위한 이른바 연좌제 같은 것이었다.

장준하는 은연중에 조선인 학병들의 눈치를 떠보았다. 그는 은밀히 조선인 학생 몇에게 탈출 의향을 물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모두들 두려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들 중에는 내심 탈출을 원하면서도 실패가 두려워 감히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일본 군인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체념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일본군 중에서도 장교가 된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는 녀석도 있었다.

일본인보다 더 미운 조선인들

얼빠진 놈들...장준하는 그런 조선인이 일본 군인보다 더 미워질 때가 있었다. 때때로 조선인들이 보이는 비굴한 행동은 그에게 민족적인 모멸감을 느끼게 했다. 일본인 고참병이 외출했다가 밖에서 밥을 사먹고 들어오면 배가 부르니 군대 음식을 적잖이 남기는 경우가 있었다. 그들은 몇 젓가락을 휘젓다가 선심 쓰듯 식반을 던져 주었다. 그럴 때에 우르르 몰려가는 조선인의 모습을 보며 장준하의 가슴에서는 뜨거운 피가 솟구쳤다.

보다 못한 장준하는 몇 동료들에게 말하여 '잔반불식동맹'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는 창자가 뒤틀리는 한이 있어도 민족의 자존심만은 지키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장준하의 잔반불식동맹을 비웃는 조선인도 있었다. 그 중에 매부리코 조선인이 있었다. 매부리코는 고참병이 밥을 던져주면 먼저 가로채려 하는 정도를 넘어 숫제 두 손을 밥과 국에 넣어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고는 급히 돌아서서 혼자 그 밥을 먹어치우고는 했다.

매부리코는 조선 신병에게는 무자비하게 군림했다. 그때 마침 수송 부대에서 6,7명의 집단 탈주 사고가 일어났다. 그러자 조선인 학도병에 대한 눈초리가 더 험악해졌다. 조선인에 대한 군기 교육이 부쩍 강화되어 모두들 몸과 마음이 괴로워졌다. 그럴 즈음의 일요일, 매부리코가 조선인 신병들을 세워 놓더니 느닷없이 칼을 뽑아드는 것이었다.

"어떤 놈이 또 도망을 치겠느냐? 도망자는 이 칼로 죽일 것이다."


장준하가 보기에 매부리코는 한계를 넘고 있었다. 그는 매부리코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매부리코가 든 칼에 선뜻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비정한 어조로 속삭였다.

"이봐! 아무리 군대라도 너무 심한 짓을 해서는 안 되는 거야. 탈출한 친구들도 나름대로 그들이 지닌 애국심으로 그리한 것 아닐까?"

매부리코는 장준하를 잠시 노려보더니 슬그머니 칼을 자루에 넣었다. 그는 볼멘소리로 장준하에게 말했다.

"나도 반도를 위해 이러는 것이야."

장준하는 격분을 참느라 지그시 눈을 감고 입술을 굳게 오므렸다. 속에서 치어 오르는 불길을 억누르느라 얼굴이 창백해졌다. 웬 일인지 매부리코는 장준하를 어려워했다. 훗날 그 매부리코가 해방된 남한에서 육군의 최고 책임자가 되리라고는 당시의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탈영을 위한 정지 작업

그런 분위기에 있다가 쓰카다 부대에 전속된 것은 장준하에게 행운이었다. 게다가 수송대와는 달리 새로 만난 세 명의 조선인 학생은 장준하의 탈출 제의를 수락하기까지 한 것이었다. 세 동지의 수락을 얻어낸 그 날 밤 그는 잠자리에 누워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자신의 신에게 감사 기도를 올렸다.

결행에 앞서 마지막으로 걸리는 얼굴들이 있었다. 고향에 있는 가족들이었다. 자신의 탈출이 그들에게 어떠한 형식으로라도 여파가 미칠 것이라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는 사상이 불온하여 탈출한 것이 아님을 부대에 심어주는 것이 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의 말대로 '불령'하여 탈출한 것이 아니라 조선인에 대한 일인 고참병의 부당한 학대와 차별 때문에 탈출한 것처럼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소 꺼림칙한 면이 있었다. 이유야 어떻든지 그것은 기만행위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망설이던 차에 그의 양심 문제를 해결해 줄 자격이 있는 자가 나타났다. 실제로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장준하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식기를 취사장에 반납할 때였다.

"이 더러운 반도 놈아!"

취사장의 일본인 상병은 장준하의 깨끗한 식기를 더럽다고 트집 잡고 있었다. 그는 장준하의 가슴 앞으로 주걱을 들이대며,

"다시 씻어 와라, 이놈아."

라고 말하며 눈에 핏발을 세웠다. 장준하는 말없이 수도로 가서 식기를 다시 헹구어 갖다 주었다. 취사병은 눈을 부라리며 장준하의 식기를 받았다.

늦은 밤 장준하는 내무반장 우에다 군조를 찾아갔다. 그는 양식 있는 일본인에 속했다. 내무일지를 쓰던 그는 장준하에게 자리를 권했다. 장준하는 선 채로 비통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사실 저는 오늘 탈영을 결행하려다 이곳으로 온 것입니다."

우에다는 놀란 눈빛으로 장준하의 얼굴을 살폈다. 장준하는 미리 대사는 물론 표정까지 연습하고 온 터였다. 우에다는 장준하의 말을 그대로 믿어 주었다. 그는 심각하다 못해 두려운 표정으로 장준하의 말에 동의를 표해 주었다.

다음 날 일조점호에 중대장은 취사병을 모든 대원 앞에 불러 세웠다.

"너 같은 놈 때문에 고등교육을 받고도 천황을 위해 이 험한 전장까지 자원해 온 학도병들이 탈출하는 것이다."

중대장은 손수 몽둥이를 들었다. 취사병이 엎드려 맞는 동안 장준하는 성경 구절을 속으로 암송하고 있었다.

'죄 없는 자 있거든 저 여인을 돌로 쳐라.'

차가운 별빛과 북풍, 그리고 은빛 철조망

일본 군인들은 천황의 하사품이라는 도라지 술에 취해가고 있었다. 장준하는 이제 모든 시나리오는 끝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무반은 말 그대로 취흥이 도도해지고 있었다. 장준하와 세 동지는 일본인들의 취기가 오를수록 다소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공이 보장된다는 법은 전혀 없었다. 성공보다는 실패의 확률이 더 높은 거사의 목전에서, 그들은 오늘 이 탈출은 자신들에게 부하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거듭거듭 새기고 있었다.

일석점호가 끝나자 장준하의 가슴이 돌연 방망이질을 시작했다. 그는 밖으로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에서는 차가운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세 동지도 주섬주섬 따라 나왔다. 그들은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예민하게 느꼈다. 네 명의 조선 청년은 피 말리는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이윽고 네 사람은 눈짓을 주고받으며 내무반에 들어가 목욕 행장을 들고 나왔다. 목욕탕은 철조망과 반대편에 있었다. 목욕탕으로 향하던 그들은 갑자기 변소를 끼고 돌며 몸을 숨겼다. 철조망 밖 느티나무에서 만나자는 사전 약속이 되어 있었다. 물론 철조망은 각자 알아서 넘기로 했다.

장준하는 보초 지점을 염두에 두고 땅에 엎드렸다. 그는 목욕 행장을 조용히 밀어 놓고는 두 외등의 중간 지점으로 포복을 시작했다. 그는 숨을 다 쉬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숨을 쉬려고 해도 호흡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4,5분 동안 배를 땅에 문지르며 기어갔다. 마침내 은빛 철조망이 눈앞에 번뜩였다. 그는 번뜩이지 않는 철조망을 골라서 잡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철조망을 움직여 보았다.

철조망은 두 길 정도의 높이였다. 그는 몸을 일으켜 철조망을 잡고 매달렸다. 그는 숨을 한 번 고른 후 침착히 한 발 한 발 올려 디뎠다. 가까스로 철조망 맨 위를 넘어간 그는 그대로 몸을 솟구쳐 뛰어 내렸다. 그는 반대편 땅바닥에 소리 없이 고꾸라졌다.

그때서야 그는 동지들이 생각났다. 그들도 철조망을 무사히 넘었는지... 그러나 머뭇거릴 상황은 아니었다. 그는 고구마 밭고랑을 따라 동쪽으로 걸었다. 그는 차츰 걸음의 속도를 높였다. 얼마 후 그는 고구마 줄기를 무수히 걷어차며 빠른 속도로 내달리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옥수수 밭을 거의 통과했다. 밭의 끝 둔덕에 멈춘 그는 느티나무의 위치를 확인했다. 놀랍게도 먼저 도착한 세 동지가 장준하를 기다리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는 데 기여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태평양 전쟁의 실상과 중경 임시정부가 소개되고, 제국주의에 도전한 매혹적인 인간들의 삶이 펼쳐집니다.


덧붙이는 글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는 데 기여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태평양 전쟁의 실상과 중경 임시정부가 소개되고, 제국주의에 도전한 매혹적인 인간들의 삶이 펼쳐집니다.
#장준하 #쓰카다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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