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과 인간] 미·일 전세를 뒤집은 미드웨이해전

[김갑수 역사팩션 145] 3부작 '열두 개의 눈동자' 편

등록 2008.10.30 15:50수정 2008.10.30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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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주호는 봄이 무르녹고 있는 후지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위도가 부산과 비슷한 후지산의 봄 날씨는 화창하기 이를 데 없었다. 후지산맥은 해발 고도 3천 미터가 넘는 봉우리가 스무 개씩이나 된다고 했다. 그리고 꼭대기에는 사계절 내내 만년설이 쌓여 있었다.

그런 후지산이라고 하더라도 계절의 변화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후지산은 바야흐로 형형색색의 봄단장을 하고 있었다. 삼나무 숲 사이마다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목련과 개나리와 진달래 들도 벚꽃과 질펀히 합세하여 현란한 모자이크를 만들어 놓고 있었다.

후지산은 일본인들의 영산(靈山)이었다. 일본인들은 신년 꿈에 후지산을 보면 운수가 대통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이듬해 일본인 가운데 과연 몇이나 후지산 꿈을 꾸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후지산에서 본 미군기의 동경 공습

임주호는 후지산 정상 아래에 자리 잡은 온천 마을 하꼬내에 닷새째 머무르고 있었다. 학병 거부로 제적당한 그는 더 이상 일본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귀국하면 어떤 시련이 닥칠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후지산은 동경에서도 보일 정도로 높은 산이었다. 그는 언젠가는 한 번 가보리라고 생각했던 후지산에서 일본 체류를 마무리하고 싶었다. 그래서 급히 여비만을 달랑 챙겨 후지산으로 온 것이었다.

임주호는 호텔에서 나와 마당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는 숲길을 걷고 싶었다. 종달새가 하늘 위로 날아올랐고 초롱새의 울음이 들려왔다. 그는 강렬한 햇빛에 눈살을 찌푸리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서둘러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아버지는 바로 귀국하라고 했지만, 그에게는 곧장 귀국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할 만한 이유가 몇 개 생겼다. 귀향하는 조선인 학생들을 태운 부관연락선 한 척이 며칠 전 미국 잠수함의 공격으로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가 귀향을 서둘렀다면 그 배에 타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이 없는 거였다.


다음으로 그는 후지산에서 경이로운 장면을 목격했다. 어제 그가 3000미터 고도의 휴게소에 갔을 때였다. 그의 발아래로는 구름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그는 구름 아래의 어디쯤에 동경이 있을 것인지를 가늠해 보았다. 구름 때문에 동경이 보이지는 않았다. 대신 그의 눈에는 구름 위에 퍼지고 있는 아름다운 저녁노을이 들어왔다.

순간 그는 후지산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수십 대의 비행 물체를 보게 되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떠 다가오고 있는 물체들을 식별해 보았다. 틀림없는 비행기였다. 수십 대의 비행기가 구름 위 하늘에서 처박히듯이 구름을 뚫고 하강하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놀라운 장면이었다. 드디어 미 공군의 동경 폭격이 개시된 것이었다. 동경은 후지산이 뿜어낸 용암과 화산재로 만들어진 도시라고 했다. 그만큼 동경은 후지산에서 가까이 있었다. 임주호는 동경이 폭격을 당하고 있는 것을 후지산에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근해에서 연락선이 미 해군 잠수함에 당하고, 수도 한복판이 미 공군 폭격기의 공습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면 이제 일본이 오래 버틸 수는 없다고 보아야 했다.

태평양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킨 미드웨이해전

진주만 공격에서 미국의 해군에 치유 불능의 타격을 입혔다고 자부한 일본군의 사기는 충천했다. 실제로 일본군은 진주만 공격 이후 6개월 동안 거의 모든 전투에서 승리를 이어 나갔다. 일본의 기동부대는 진주만에서 인도양에 이르는 바다 위쪽을 장악했다. 이는 태평양의 절반 이상이 반달꼴의 형태로 일본 수중에 들어간 것을 의미했다.

그들은 괌에서부터 홍콩, 필리핀, 수마트라,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버마 등을 파죽지세로 점령해 나갔다. 그리하여 그들은 동인도제도와 서부 태평양의 주요 도서 대부분에 일장기를 휘날렸다. 이러한 가공할 전과는 비행기를 가득 실은 항공모함과 이를 호위하는 전함·순양함· 구축함 들의 해상 기동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초전 승리에 고무된 일본은 전술을 전혀 변경하지 않았고, 전력의 재배치를 일절 고려하지 않았다. 요컨대 거함의 대포에 의존하는 함대 결전의 기존 방식만을 고수했던 것이다. 반면 미국은 일본의 공격 전술에 대처하기 위해 새로이 전열을 가다듬으며 파격적으로 해군을 개혁했다. 이것이 뒤늦게 결과로 나타나고 있었다.

태평양에서 미일 역전의 불꽃은 미드웨이에서 피어올랐다. 미드웨이 해전은 승부의 방향을 되돌리는 불길이 된 것이다. 미드웨이는 하와이에서 서쪽으로 140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섬이다. 면적이 한국의 여의도 정도가 될까 말까한 이 작은 모래섬은 위치상 엄청나게 중요한 전략적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만일 이 섬이 일본의 수중에 든다면, 하와이의 미국 해군기지가 일본 육상 폭격기의 항속 거리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일본은 수월하게 다시 진주만을 공격할 수 있게 된다. 만약 일본 전투기가 진주만 기지를 다시 공격한다면 하와이의 전략적 가치는 사실상 붕괴되고, 최악의 경우 미 해군은 본토 서해안까지 철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치달을 수도 있었다.

때문에 일본 해군 수뇌부는 미드웨이 상륙 작전을 진작부터 입안해 놓고 있었다. 미드웨이에 상륙하면 필경 미국의 태평양 함대가 달려올 터였다. 일본은 이 기회를 타서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격파하겠다는 작전을 세운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일본은 무려 160척이나 되는 함대를 미드웨이와 알류산 열도에 분할 배치하는 대규모 양동작전을 펼쳤다.

이처럼 일본은 미드웨이 작전에 전운(戰運)을 걸다시피 했다. 왜냐하면 전쟁이 장기화될 경우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태평양에서 주도권을 장악하여 미 본토에까지 압박을 가해 놓고 휴전 교섭에 들어갈 요량이었다. 요컨대 일본은 단기결전주의에 명운을 걸어 놓고 있었다.

일본의 해군 수뇌부 회의의 최고 서열은 야마모토 연합사령관이었다. 그는 호소가와 중장과 나구모 중장 그리고 다나까 소장 등에게 임무를 부하한 후, 작전의 개요를 다시 상기시켰다.

"우리 연합함대가 미드웨이를 공격하면, 적의 태평양함대는 반드시 반격해 온다. 지난 6개월 동안 우리의 목적 달성을 지연시켰던 적의 항공모함들을 이번 기회에 고철로 만들어야 한다. 만에 하나 적의 태평양 함대가 이 싸움에 걸려들지 않더라도 우리는 미드웨이와 알류산이라는 최고 가치의 전진 기지를 얻게 되는 것이다."

1942년 5월 29일, 항공모함 4척을 위시하여 잠수함· 수송선까지 합쳐 무려 350척에 달하는 일본 함정이 미드웨이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여기에는 1100대의 비행기가 추가되고 10만 명의 병력이 동원되어 있었다. 그들은 모든 전파를 차단한 채 미드웨이를 향해 항진해 갔다. 그러나 사전에 이를 통신 암호 해독으로 알아낸 미국이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기다리고 있는 줄을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일본 해군, 이순신 이래 400년 만의 패배

이 거대한 승부의 갈림은 단 5분의 시차로 인해 이루어진다. 양측의 항공모함이 조우하며 시작된 대회전은 어느 쪽의 폭격기가 상대의 항공모함을 먼저 때리느냐에 승패가 달려 있었다. 양국의 항공모함 군단이 조우했을 때, 일본의 함재기들은 항공모함 공격용 어뢰와 폭탄 장착을 마치고 막 발진하고 있던 차였다.

이에 반해 미국의 폭격기들은 미리 와서 구름 속에 숨어 있었다. 이것은 미국의 항공모함이 일본의 허를 찔러 일본의 예상보다 일찍 미드웨이에 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1차 공격에서 미드웨이 기지를 폭격하면, 미국의 항공모함이 달려올 줄 알았는데, 이미 미국의 항공모함은 미드웨이에 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비행기들은 급히 돌아가 항공모함 공격용 어뢰와 폭탄을 부리나케 장착해야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구름 속에서 나온 미국의 폭격기들은 바로 눈 아래에 있는 일본 항공모함에 무차별 폭탄 공격을 감행했다. 그것은 일본 비행기보다 정확히 5분 먼저였다. 일본 해군력의 대들보였던 4척의 항공모함, 적성(赤城 아카키)· 비룡(飛龍 히류)· 창룡(蒼龍 소류)· 가하(加賀 가가)는 모두 격침되었다. 전사자도 일본은 미국의 10배가 넘는 3700명이나 되었다. 그 중에는 숙련된 비행기 조종사 100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최상의 작전으로 대등한 전력에서 압승을 일궈낸 미군 지휘관은 체스터 니미츠 해군 제독이었다. 그는 훗날 미드웨이 해전을 정보전의 승리라고 회고하면서 조선의 이순신 장군을 거론했다.

"미드웨이 해전의 승리는 정보전의 승리였다. 기습을 노리던 일본군은 오히려 우리에게 기습당했다. 일본군은 중대한 과오를 범했고 미군 지휘관들은 이 과오를 잘 이용했다. 일본 해군으로서는 16세기 말 조선의 이순신 장군에게 당한 패배 이후 최초의 대 패배를 감수한 것이었다."

미군 해군 제독 체스터 니미츠는 최소 4, 5백 년 동안의 일본 해군 전사를 꿰차고 있었던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는 데 기여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제국주의의 실상과 이에 도전하는 매혹적인 인간들의 삶이 소개됩니다.


덧붙이는 글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는 데 기여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제국주의의 실상과 이에 도전하는 매혹적인 인간들의 삶이 소개됩니다.
#미드웨이해전 #후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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