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과 인간] 학병 거부한 임주호의 시련과 고뇌

[김갑수 역사팩션 147] 3부 '열두 개의 눈동자' 편

등록 2008.11.02 14:07수정 2008.11.02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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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후지산에서 내려온 임주호는 기차를 타고 시모노세키에 갔다. 부관연락선을 타고 조선에 가기 위해서였다. 그가 2등 승객 출입구로 들어섰을 때였다.

"야아, 조센징. 이리 와."

일본 형사가 임주호를 불러 세운 것이다. 형사는 임주호를 배 아래에 있는 큰 홀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는 학병을 피하려 집으로 도피하는 조선 학생 백여 명이 붙들려 있었다. 일본 형사들은 욕지거리를 섞어 가며 조선 학생들을 심문하고 있었다. 어떤 형사는 동경제대 교복을 입은 한 학생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내리치기도 했다.

임주호는 말없이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 만약 형사가 자기 머리를 때린다면 그는 어떻게 할 것인지를 잠깐 생각해 보았다. '네가 내 머리를 손으로 때린다면 나는 내 머리로 네 얼굴을 받을 수밖에는 없어. 그러니 제발 내 몸을 건드리지는 말아다오.'

형사는 임주호에게 학병 지원서를 건넸다. 다행히 임주호를 심문하는 형사는 다른 형사들보다 현저히 의욕이 적었다.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일본 형사도 있구나. 하기야 네 놈들이라고 군국주의가 다 좋은 것은 아니겠지.'

임주호는 형사의 말을 경청하는 태도를 취했다.

"조선인으로서 황군의 장교가 되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다. 옛날 같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오래 가지 않는다."
"저는 지금 학병 지원 문제로 아버지께 상의를 드리러 가는 길입니다. 제 아버님은 경성 반도호텔을 운영하고 계시는데 학병에 반대하실 분이 아닙니다."


형사는 반도호텔을 아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여기서 서명한다면 제 아버님은 명예롭지 않게 생각하실 겁니다. 그러니 집에 가서 아버님의 축하를 받으며 지원하고 싶습니다."

일본 형사는 임주호를 놓아 주었다. 그는 이등 선실로 다시 올라가 눈을 붙였다. 다음 날 그는 부산에 내려 기차를 타고 상경했다.

한편 아들의 귀국에 대비하여 임주호의 아버지는 일본인 기관장들을 호텔로 초빙해 자식의 학병 문제를 거론했다.

"에미 없이 자란 외아들입니다. 누나는 외국에 가 있어 자식이라고는 그 녀석 하나뿐입니다. 그러니 선처를 부탁합니다."

그는 기관장들을 접대하고 적지 않은 돈을 찔러주었다. 모든 것을 아들이 도착하기 전에 해 놓아야 하는 일이었다. 이런 사실을 아들이 알게 되면 크게 반발할 것이 뻔했다.

조선인 육군 상사 송요찬

귀국 일주일 후 임주호는 경기도청 노무과의 소환을 받았다. 노무과의 일본인 관리는 학병 대신 노동수용소로 보내질 것이라고 말했다. 관리의 말대로 그는 일제의 노동어용령에 따라 서울 성동역 부근의 노동훈련소로 보내졌다. 경성제대 공과대학 인근의 그곳에는 경성제대, 혜화전문, 보성전문을 비롯한 조선인 학생 200여 명이 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2주 동안 교육과 훈련을 받았다. 새벽 5시에서 밤 9시까지의 일과는 길고도 지루했다. 그들 200명은 강당같이 넓은 마루 홀에서 한꺼번에 잠을 잤다. 난방 장치는 장작을 때는 난로 두 개뿐이었다. 추위가 심했지만 종일토록 시달린 그들은 기진맥진한 채 바로 잡이 들었다. 그들을 감시한 것은 조선인 지원병 출신의 육군 상사 두 명이었다. 그 중 하나는 훗날 남한의 육군 대장이 되는 송요찬이었다.

모든 학생들이 매일 마룻바닥에 앉아 일본 천황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반성문을 써야 했다. 일본 통치에 대한 감사의 글을 쓰기도 했다. 그리고 매일 일본군 장교와 형사들에게 불려가 심문을 받았다. 한밤중에 불려간 학생들이 얻어맞으며 지르는 비명이 내무반에까지 들려왔다. 임주호 차례가 되었다. 그는 아버지가 일러준 대로 대답했다.

학병에 지원하지 않은 것은 충성이 없어서가 아니고 건강이 안 좋으신 아버님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버지를 돌보아야 하므로 멀리 갈 수가 없었다고 했다. 실제로 아버지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일본인 장교가 형사에게 눈짓을 보냈다. 임주호는 아버지가 미리 손을 써 놓은 것을 모른 채 자기에게는 이상하게도 행운이 연속된다고 생각했다.

교육·훈련이 끝나가고 있었다. 조선인 학생들은 어디로 끌려가게 될지 몰라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난로 주변에 둘러앉았다. 짧은 기간이었어도 정이 든 그들은 한데 모여 이별의 밤을 보내고 있었다. 이런저런 얘기들이 오갔다. 그러다가 울컥해진 그들 중의 하나가 말했다.

"우리 도쿄음악학교 학생들에게 이별의 노래나 한 곡 들어 보자."

그들 가운데 노래를 빼어나게 부르는 학생이 있다고 했다. 성악가라는 것이었다. 임주호는 청승맞게 웬 노래냐고 말했다. 성악가 학생도 내키지 않는 듯 사양했다. 그런데 다른 학생들이 자꾸 권했다. 성화에 못 이겨 그가 조그맣게 노래를 시작했을 때 갑자기 출입문 쪽에서 고함 소리가 들렸다.

"바카야로!" 조선인 상사 송요찬이 달려와 슬리퍼로 성악가 학생을 때리기 시작했다. 모두들 겁에 질려 보고만 있었다. 임주호는 슬며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송요찬의 팔을 성큼 잡았다.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그럴수록 더 손아귀에 힘을 보탰다.

"같은 조선인끼리 왜 이러십니까?"

무슨 이유인지 송요찬은 임주호의 얼굴을 힐끗 보더니 팔에서 힘을 풀었다.

"의리가 있어서 좋다. 모두 어서 취침!"

그는 싱겁게 외치더니 밖으로 나가 버렸다. 200명 학생들의 눈동자가 일제히 임주호를 보고 있었다. 임주호는 너무도 쑥스러워 얼른 자리에 누워 버렸다. 임주호는 호출되지도 않고 무사히 그 날 밤을 넘겼다.

다음 날 아침 몇몇 학생들이 임주호에게 와 악수를 청했다. 어젯밤 일 때문이었다. 그들은 자기 이름을 대고 작별 인사를 했다. 경성제대 학생 하나는 임주호의 학교를 물었다. 순간 임주호는 자기가 다니던 학교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치과대학이란 것만 생각났다. 그래서 미소를 짓는 것으로 대충 얼버무렸다. 그들이 가고 나서야 그는 자기가 다니던 학교 이름을 생각해내고는 피식 웃었다.

강제 노동 수용소에 수용되는 학병 거부 조선인들

다음 날 임주호를 비롯한 학병 거부 학생들은 경의선 기차를 탔다. 해주 근처의 시멘트 공장으로 가 노역을 한다고 했다. 임주호는 화물차의 바닥에 앉아 아버지와 누나를 생각하고 있었다. 임주호는 가족이  모두 모여 단란하게 살 수 있는 삶이란 나라가 없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 들었다. 그는 자신이 왜 이 시간에 원하지 않는 장소에 있어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그는 이 부조리한 현실이 무엇에서 기인하는 것인지를 명확히 알고 싶었다. 친구들은 일본의 침략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는 꼭 그것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는 않았다. 만약 친구들의 말이 맞는다면 일본이 패망하고 조선이 독립하게 되면 문제가 다 해결될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이 독립한다고 하더라도 왠지 조선인들에게는 자유로운 삶이 쉽게 보장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는 일본에 빌붙어 동족을 탄압하는 조선인들을 생각해보았다. 교육대의 조선인 상사 송요찬 같은 자가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들은 어느 면에서 조선인을 지배하려 하는 일본인보다 더 나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독립이 된다 해도 타인을 지배하려는 사람들은 여전히 있을 것이었다.

나윤숙도 크게 보아 그런 사람에 속했다. 비단 친일하는 사람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임주호가 보기에 이강국이나 장준하는 선량한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쉬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만약 그들에게 권력이 주어진다면 그들이 제국주의자처럼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는 거였다.

가장 무서운 일은 이강국이나 장준하처럼 신념은 뚜렷하면서도, 그들과 달리 심성이 불량한 사람들이 권력을 쥐게 되는 경우였다. 설령 독립이 된다 해도 이강국이나 장준하 같은 사람이 권력이나 주도권을 쥐게 되는 일은 생기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기차가 멎은 곳은 듣던 대로 시멘트 공장이 보이는 간이역이었다. 작은 마을은 온통 회색빛이었다. 온통 시멘트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기 때문이었다. 마을의 지붕과 거리는 물론 언덕과 나무까지도 모두 짙은 회색이었다. 자세히 보니 언덕은 석회암으로 되어 있었다. 임주호는 아름다운 후지산의 봄 정경과 대조되는 시멘트 공장 주변의 자연을 보면서 침울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임주호는 조선의 막노동자들이 묵었던 숙사에 수용되었다. 다섯 명에게 작은 방 하나가 배정되었다. 온돌방은 따뜻했지만 너무도 좁아 누워 잘 때는 몸과 몸이 밀착되었다. 그동안 추위에 떨었던 임주호는 좁더라도 우선 방이 따뜻한 것이 좋았다. 그러나 열흘쯤 지나자 온몸이 가려워 견딜 수가 없게 되었다. 그들은 밤마다 내의를 까뒤집으며 이를 잡아야 했다.

식사로는 대부분 수수밥이 나왔다. 임주호는 감옥에 가면 수수밥을 먹는다는 말이 생각났다. 1주에 한 갑 지급되는 담배는 턱없이 모자랐다. 그러나 그는 담배를 포기하기가 어려웠다. 그나마 혼자 앉아 담배를 피우는 시간이 있기에 어려운 삶을 견딜 수 있을 정도였다.

임주호는 매일 오전 8시에서 오후 4시까지 일했다. 언덕에서 석회암을 부수고 그것을 공장으로 운반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시멘트 화덕을 청소하는 일도 일주일에 두 번 정도 해야 했다. 그는 석탄재와 시멘트가 섞인 원통 화덕에 들어가 쌓인 먼지를 닦아내야 했다. 화덕 안의 온도는 40℃가 넘었다. 숙사로 돌아올 때 그의 얼굴은 언제나 거무죽죽한 회색이었다. 그의 목은 가래가 끓었고 이따금 심한 편두통이 생겼다.

무엇보다 견디기 어려운 것은 노동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이었다. 만약 조국을 위한 노동이라면 어떨는지 그는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고 해서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이 노동이 조국의 독립을 앞당긴다고 해도 그는 노동을 저주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다. '그러나 만약 내가 이 노동을 해서 가족이나 여자를 먹여 살린다면?' 그렇다면 의미가 조금 달라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기회가 되는 대로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어 작업에서 빠지고는 했다.

덧붙이는 글 | 매회 가급적이면 완결성을 갖도록 하기 위해 원고 분량이 다소간 많거나 적을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은 약 200회까지 연재됩니다.


덧붙이는 글 매회 가급적이면 완결성을 갖도록 하기 위해 원고 분량이 다소간 많거나 적을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은 약 200회까지 연재됩니다.
#학병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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