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운반해온 시간의 발자국이여

정년 맞아 새 시집 펴낸 '팽이'의 시인 이우걸

등록 2009.02.13 16:09수정 2009.02.14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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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걸 시인의 새 시집 표지 '나를 운반해온 시간의 발자국이여' 는 정년을 앞 둔 시인의 고통이 담겨 있다 ⓒ 정용국

▲ 이우걸 시인의 새 시집 표지 '나를 운반해온 시간의 발자국이여' 는 정년을 앞 둔 시인의 고통이 담겨 있다 ⓒ 정용국

이우걸 시인을 한 마디로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는 모든 면에 있어서 '반듯한'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1973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한 이래 <지금은 누군가 와서><빈 배에 앉아><저녁 이미지><네 사람의 얼굴><그대 보내려고 강가에 나온 날은><나는 아직도 안녕이라고 말할 수 없다><사전을 뒤적이며><맹인><아, 마산이여> 등의 시집과 몇 권의 평론집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시인으로서의 행보가 그렇다. 또한 1974년 교단에 발을 디디며 현재 밀양교육장으로 정년퇴임을 며칠 앞둔 그의 또 다른 행보도 역시 반듯하기 이를 데 없다. 늘 잘 정돈된 머리와 세련되게 차린 외모도 너무 단정해서 샘이 날 정도니까.

 

 그랬던 그가 정년을 맞으며 출간한 시집 <나를 운반해온 시간의 발자국이여-천년의 시작>을 내면서 책 서문에 이런 말을 하며 그간의 고뇌를 털어 놓았다. '삼월이 되면 천근같은 사무실의 키를 넘겨주고 들판으로 숲으로 또는 바다로 나갈 것이다. 그동안 숨어서 울던 피로들 그 고통의 소리들을 이 시집에 담았다' 기실 '반듯한' 모습으로 시의 독자와 교육계에 남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두 현장에서 좋은 모습으로 버텨준 이우걸 시인께 먼저 박수를 보낼 일이다.

 

 이번 시집의 해설을 쓴 서울대 장경렬 교수도 저자와의 20년에 걸친 만남을 소회하면서 '인간 이우걸의 진솔함'을 제일의 덕목으로 꼽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만남으로 감지된 것이 아닌 이우걸의 인간됨과 시인으로서의 작품성을 통한 튼실하고도 일관된 변화와 숙성의 과정으로 보인다. 먼저 장교수가 극찬한 시인의 대표작을 그냥 넘길 수는 없겠다.

 

쳐라, 가혹한 매여 무지개가 보일 때까지

나는 꽂꽂이 서서 너를 증언하리라

무수한 고통을 건너

피어나는 접시꽃 하나.

 

                                  -'팽이' 전문-

 

이 시는 그동안 너무 많은 해설과 품평을 통하여 재탄생한 작품이라 또 다른 덧붙임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처음 만난 독자들을 위해서 장경렬 교수의 찬사를 붙이면 이렇다.

 

"가혹한 매를 견디는 팽이의 이미지와 시인의 모습이 겹쳐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시조와 시조시인들을 향해 그가 한결같이 보듬어 안고 있는 진솔한 사랑의 마음 때문이리라. 우리 시대는 그가 사랑하고 아끼는 시조에 대해 냉정하기만 하다. 냉정할 뿐만 아니라 무시하거나 폄하하기까지 한다. 이런 가혹한 매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는 시조시인이 다름 아닌 이우걸이다. 그는 무수한 고통을 건너 피어나는 접시꽃 하나와도 같은 시조 작품 창작을 위해 온 마음을 다하고 있다. 어찌 보면 '팽이'라는 시조 자체가 무수한 고통을 건너 피어난 하나의 접시꽃 일 수 있으리라."

 

 이 시집은 시인이 서문에서 말 했듯이 자신의 정년을 맞으며 그간의 무수한 번민을 털어놓은 작품들이 많다. 그 중 '자리'라는 제목의 시를 보자

 

야생초 꽃잎 같은 나비들이 날아다니고

철거된 청사 벽돌만 흩어져 있는 구석에

아직도 품위를 갖춘

안락의자가 남아 있다

 

- 한 때 피 튀기는 계략이 있었을 거야

- 스스로의 오만에 취해 한껏 부풀어 올랐을 거야

철없는 봄 햇살들이

깔깔대며 떠들고 있다

 

                                       - '자리'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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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걸 시인 그는 정년을 맞아 더 울창한 시조의 숲으로 갈 것이다 ⓒ 정용국

▲ 이우걸 시인 그는 정년을 맞아 더 울창한 시조의 숲으로 갈 것이다 ⓒ 정용국

 밀양 교육장이라는 작은 직함에도 인사권의 이야기나 시설비의 쓰임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있었을 것이다. 그 안락의자에 숨어 있는 가시를 어찌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알 수 있을까. 그 자리에서 '품위'를 지킨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므로 '철없는 봄 햇살들이/ 깔깔대며 떠들고 있다'라고, 단체장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갈 길이었음을 시인은 에둘러 자책하고 있다.

 

 끝으로 한 편의 시를 더 읽어보자. '넥타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시편은 직장인의 일상이 손에 잡힐 듯 그려져 있다

 

넥타이를 매고 나면 나는 뱀 같다

교활한 혓바닥과 빈틈없는 격식으로

상대를 넘어뜨리는 이 도시의 터널에서.

 

나의 너털웃음을 그는 알고 있을까

내 웃음이 꾸며 주는 청록빛 넥타이 속엔

지난밤 내가 숨겨 둔 간계가 있다는 걸.

 

넥타이는 어둠 속에서 비로소 눈을 뜬다

예리한 핀 아래 눌려 있던 욕망들이

일제히 사슬을 벗고 제 얼굴을 드러낸다.

 

                                 - '넥타이' 전문-

 

 넥타이를 매야 남자의 정장은 완성된다. 아무리 멋진 양복을 입었다 하더라도 넥타이가 없으면 정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빈틈없는 격식'이 되는 것이다. 특히 관가에서의 정장은 엄격하다 못해 답답해 숨이 막힐 지경이 아닌가. 보다 못한 어느 대통령은 솔선해서 노타이 차림을 장려한 적도 있지 않았는가 말이다. '교활'과 '격식', '간계'와 '욕망' 들이 모두 이 넥타이 속에 숨어 있는 것이라고 시인은 보고 있다. 이러한 직장의 모든 '치레'들을 넥타이라는 상징적 액세서리를 들어 아주 극명하게 표현한 시다.

 

이우걸 시인은 이 시집에서 참 할 말이 많았나 보다. 하긴 36년이라는 교직생활을 마감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긴 장편소설일 것이다. 초년교사 시절의 풋풋한 이야기에서 교감, 교장, 교육장에 이르는 길은 겉으로 순탄해 보일는지 몰라도 사연의 연속이었을 것이리라. 편편에 숨어 있는 세상살이의 어려움과 이를 정면으로 이겨낸 경험자의 노련한 시각도 돋보인다. 마침 이우걸 시인의 시집 출판을 기념한 모임이 교육계 후배들과 문인들이 나서서 기획하고 있다니 보기 좋은 일이다.

 

이제 관직을 떠나 새로운 길을 가게 될 이우걸 시인의 새 행보가 자못 궁금하다. 선생이여 부디 36년 동안 맨 길고 답답했던 넥타이를 시원하게 풀어내시고 베 잠뱅이에 모시적삼으로 갈아입고 들로 숲으로 나가 '그동안 숨어서 울던 피로들'에게  보약 한 첩 대접하시라!

2009.02.13 16:09 ⓒ 2009 OhmyNews

나를 운반해온 시간의 발자국이여

이우걸 지음,
천년의시작, 2009


#이우걸 #나를 운반해온, 천년의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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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한국작가회의, 한국시조시인협회 사무총장. 한국문학평화포럼 사무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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