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것이 세상을 지배한다

제1회 전국 시각장애인 시 공모전

등록 2009.04.17 11:06수정 2009.04.17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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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부터 경남문인협회(회장 김복근 시인)와 부산점자도서관은 공동으로 시집 '손끝으로 세상을 열다'를 점자판과 녹음판으로 제작해서 부산ㆍ경남의 시각장애인들에게 경남 시인들의 시를 선물해 오고 있으며, 2008년에는 '손끝으로 세상을 열다' 시각장애인 독후감을 현상공모하여 많은 장애인들의 호응을 얻었다.

 

이에 힘입어 2009년 봄을 맞이해서 제1회 전국시각장애인 창작시 현상공모전을 열었다.  입상된 작품들은 2009년에 출판될 경남문인협회 점자시집에 수록될 예정이다. 세계적인 경제위기로 모두가 어렵고 우울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 이 때 천우코텍(대표 이정희)의 후원으로 이 행사가 시각장애인들의 시심을 일깨워주는 따사로운 봄 햇살 같은 선물이 되기를 갈망하면서 여기에 장애인들의 시와 심사평을 싣는다. 심사평을 그대로 게재하는 이유는 이 글이 심사를 떠나 작품들을 아주 세밀하게 조망하여 잘 된 평론의 수준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기대하리라 믿기 때문이다.

 

제1회 전국시각장애인 창작시 현상공모에 응모한 시들을 김복근(경남문협 회장. 시인), 이상옥(창신대 문창과 교수. 시인), 이달균(경남문협 이사. 시인) 세 명의 심사위원들이 진지하게 읽었다. 35명이 보내준 110편의 응모작품은 평소 심사에 임하는 자세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이끌고 있다.

 

우선 시각장애를 가진 이들은 어떤 눈으로 세상의 창을 내다볼까, 마주친 대상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어떻게 표현할까 몇 가지 의문이 교차했다. 아니, 솔직히 말해 그런 시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고 고백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 가졌던 그런 의문이야말로 괜한 고정관념이었음을 금방 알게 된다.

 

응모작 몇 편을 읽는 순간 아, 내가 보는 것을 그들도 보고, 내가 분노하고, 갈망하는 것을 그들도 똑같이 느끼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이 만져지는 대상이든 심상에서 그려낸 어떤 것이든 자신의 것으로 가져와 언어로 형상화하는 능력은 우리의 상상을 충분히 뛰어넘는 것이었다.

 

우리는 평소에 습작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않은 이들이 문단의 문을 두드리거나 실제 문단  속으로 들어와 기성 문사가 된 경우를 간혹 본다. 이번 심사를 통해 공통적으로 느낀 바는 심사위원을 포함한 기성문인들이 자신에게 거울을 비춰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반성을 하게 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지의 차용과 언어의 조탁, 대상을 새롭게 인식하는 능력이 일정한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 입상 작품을 보면 심사평이 괜한 찬사가 아님을 알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우선 심사위원들의 손에 가장 오래 남은 작품은 최우수작으로 선정된 신성철씨(1950년생)의 '성냥'이다. 전문을 보자.

 

고 쬐끄만 암자 속

말라깽이 납자들이 모여

앉지도 못하고

포개포개 누어서 참선하는 곳.

 

부처도 쇠북도 목탁도 뒤집어쓰고

모시고 울리며 두드리는데

도솔천 미륵불 기다릴 것 없다.

내 한 몸 불태우면 그만이지.

 

한 어둠 사르는데 스님 하나 죽는다.

까까머리 불꽃에 네 번뇌를 사뤄라 사뤄라

온 몸으로 온 몸으로 죽어 주리라.

 

성냥 한 갑을 놓고 이만한 상상력을 보여주기란 쉽지 않다. 전문적인 시 공부를 얼마나 하였는지, 시집은 원하는 만큼 읽을 기회가 주어지는지 제대로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현대시를 많이 읽고, 나름대로 오랜 습작과정을 거친 흔적은 역력하다.

 

그냥 한 번 소용되는 성냥불을 불교적 화두로 치환시켜 요리하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시적 완성도를 위해 군더더기를 없애려고 노력한 모습도 좋다. 그리고 성냥의 의인화를 통해 소신공양에 이르는 모습을 괜한 폼 잡지 않고 조금은 익살스런 표현으로 그려낸다. 비록 문학적 세련미와 철자, 띄어 쓰기 등이 다소의 흠결을 보이지만 이만하면 충분히 최우수감이 된다 싶어 만장일치로 이 작품을 밀었다.

 

함께 보낸 3편도 수작이다. '강간당한 봄'의 한 구절은 "전깃줄에 매달려 울부짖다가/ 창문을 두드리며 몸부림하다/ 투두둑 치맛단 터뜨리는 소리를/ 잠결에 어렴풋이 듣고 말았습니다."라고 바람과 꽃잎의 개화를 그리고 있는데 표현은 물론 제목부터가 상당한 내공을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까지 경합했던 작품은 고영제(1947년생)씨의 '올챙이묵'과 김현주(1969년생)씨의 '정자행(行)'이다. 두 편 다 수작이었으나 신성철씨의 장점이 더 돋보여 부득이 우수작에 만족해야 했다. 아쉬움은 다음 기회에 만회하길 바란다.

 

"봄눈이 내려도 묵은 묵맛이다./ 강물이 풀려도 그 맛이 그 맛이다./...(중략)...사람들은 꼬리가 길다/ 그 꼬리를 흔들며 여기까지 왔다./ 눈 부스스 비비며 왔다./ 강냉이가루 반죽이 손 마디마디에서 독립할 때/ 펄펄 끓는 솥에 잠수해버린 올챙이 봄눈이 내려도 묵은 묵 맛이다." -<고영제 '올챙이묵'>  부분

 

"풍화된 노후의 산허리를/ 구불구불 감고 있는 길/...(중략)...정자바다가 있다....(중략)...매운 해풍에/ 깃털을 빗질하고 부리를 벼리며/ 비상을 준비하는 저 물새들처럼,/때로 삶의 질곡이/ 우리를 더욱 단단히 옹이지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중략)....바람이 여기저기 흩어 나누어놓았을 체온으로/ 오소소 몸을 떠며 돌아와도/ 마음만은 그득그득 따스한/ 새벽 정자행 -<김현주  '정자행(行)'>부분

 

'올챙이묵'은 강원도 지역에서 주로 해 먹는 민속음식이다. 올챙이묵을 소재로 했지만 '묵'과 '올챙이'라는 두 단어를 따로따로 기능하게 한 후 나중에 절묘하게 하나로 융합시키는 묘미를 보여준다. 사람들의 꼬리는 올챙이와 무관치 않고, 끓는 솥에서 제 모습을 만들어 가는 묵은 봄눈이 와도 역시 묵으로 묵묵히 존재한다. 꽤나 담담하게 멋이면 멋, 맛이면 맛, 올챙이묵의 제 맛을 알맞게 녹여내고 있다.

 

'정자행(行)'은 새벽바다를 지나다 마주친 풍경들을 한 폭의 수채화처럼 그려내었다. 서정시 본연의 자세를 잘 보여준다. '바람이 여기저기 흩어 나누어놓았을 체온'같은 표현은 아름답고 감각적이다. 그냥 춥다고 체감하는 것을 바람이 체온을 흩어 나누어놓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분 역시 4편의 시를 함께 응모하였는데, '파니핑크' 같은 작품은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밖에도 이진규(1947년생), 이희준(1962년생), 김지윤(1964년생), 신성남(1959년생), 황인철(1978년생) 씨 등 다섯 분을 장려로 뽑는다. 이진규씨의 '점자에 관한 리포트'는 시각장애인이 아니면 쓸 수 없는 생생한 체험을 보여준다. 사변적인 느낌으로 흐를 위험이 있는 소재지만 이미지의 알맞은 짜임을 통해 재미있게 그려낸다. 김지윤씨의 '무관심'은 디지털 시대의 글쓰기를 보여주는 이채로운 시다. 현대인의 쉽게 만나고 쉽게 잊는 특징을 접속과 끊김으로 해석하는 재능을 높이 산다. 이희준씨는 호흡을 길게 끌고 가는 힘이 눈길을 끈다. 조금 더 열정을 안으로 다독이면 좋은 시를 쓸 재능이 엿보인다. 신성남씨는 특이한 소재를 차용해 와 잘 형상화 하는 장점이 있다. 자신의 의지로 무궁화를 피우려는 마음을 지루하지 않게 연출하고 있다. 황인철씨는 '독도'를 잘 버무려내었다. 시사적인 관심은 글 쓰는 이에겐 필수적인 것이다. 다만 독도가 누구나 아는 독도일 필요는 없다. 나의 창을 통해 바다 본 신선한 독도였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이번 시각장애인들의 시를 보면서 눈뜬 장애를 앓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진작 장애를 극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의외로 건강하다는 것을 느꼈다. 언어를 다루는 특유의 진지함은 본받고 싶은 부분이다.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은 것이 훨씬 많다. 실제 그 보이지 않는 것이 세상을 지배한다. 신(神)은 보이지 않지만 전지전능하고, 마음은 잡히지 않지만 다독이고 다스린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상상력의 산물이란 문학 역시 어디에서 오는지 보이지 않는다. 두려움과 겸손은 거기서 온다.

2009.04.17 11:06 ⓒ 2009 OhmyNews
#장애자 시공모전, 경남문협, 점자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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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한국작가회의, 한국시조시인협회 사무총장. 한국문학평화포럼 사무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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