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축제로 바라본 유대인 전통

[책갈피] 게오르그 루카치 <소설의 이론>

등록 2009.06.10 14:11수정 2009.06.10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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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유대인들의 시각은 우리와는 사뭇 대조적이다. 이는 <탈무드>에 나오는 다음의 이야기로도 확인할 수 있다.

화물을 만재한 배가 두 척 항구에 떠 있다. 한 척은 출항하려 하고 있으며 한 척은 막 입항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배가 떠나갈 때에는 성대하게 전송하는데, 들어올 때에는 별로 환영하지 않는다. 탈무드에 의하면 이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습관이다. 떠나가는 배의 미래는 알 수 없다. 폭풍을 만나 배가 가라앉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왜 성대하게 전송하는 것일까. 긴 항해를 끝내고 배가 무사히 돌아왔을 때야말로 커다란 기쁨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한 가지 임무를 완수했기 때문이다.


인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에는 모두가 축복한다. 이것은 아이가 마치 인생이라는 바다에 배를 띄운 것과 같은 것으로서, 그 미래에는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 병으로 죽을지도 모를 것이며, 그 아이가 무서운 살인범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이 영원의 잠에 들어갔을 때, 그가 인생에서 무엇을 해왔는가를 모든 사람이 알고 있으므로, 이때야말로 사람들은 축복해야 하는 것이다. (마빈 토케이어, <탈무드>)

만약 유대인의 전통적 시각으로 노무현 전대통령의 죽음을 바라본다면 그것은 아마도 가장 성대한 축제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한국인의 정서로는 죽음을 축제로 승화시킨다는 것이 그리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 죽음은 영면(永眠), 말 그대로 영원의 잠 속으로 침잠하는 것이므로 굳이 떠들썩한 축제를 벌일 필요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대하는 심정의 끝자락엔 유대인의 전통적 사고방식과 일맥상통하는 지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록 죽음이 축제와 동일시될 순 없겠지만 죽음에 대한 의식(儀式)이 굳이 무겁고 어두울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고 보니 시작은 엄숙해도 끝날 때쯤이면 왁자지껄한 잔치처럼 변하는 우리의 전통 장례행사도 궁극적으로 유대 관습과 다를 게 없어 보인다.

과연 죽음도 삶의 일부에 불과한 걸까? 아니면 삶이 죽음의 일부인 걸까? 모든 경계가 그렇듯이 삶과 죽음의 경계 역시 선명하게 구분하기 어렵다. 칼로 불을 가를 수 없는 것처럼(그리스 격언). 문득 폴 틸리히의 "경계선은 앎을 얻기에는 가장 좋은 곳이다"라는 한마디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마찬가지로 노무현 전대통령의 삶과 죽음도 어느 것이 삶이고 어느 것이 죽음이라고 양단(兩斷)할 수 있을까? 비록 그분은 가고 없지만 언젠가 밤하늘의 별로 다시 돋아날 것을 믿는다면.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게오르그 루카치, <루카치 소설의 이론>)

소설의 이론

게오르그 루카치 지음, 김경식 옮김,
문예출판사, 2007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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