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 때는 이 막걸리 한 사발이 보약이제"

[맛이 있는 풍경 75] 혀끝 톡 쏘며 깊이 스며드는 새콤달콤한 맛 '개도막걸리'

등록 2009.05.26 17:05수정 2009.05.26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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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도막걸리 선소에서 처음 맛본 개도막걸리! ⓒ 이종찬


나그네는 막걸리를 무척 좋아한다. 소주, 맥주 등 다른 술이 아무리 많이 있어도 끝까지 막걸리를 고집한다. 오죽했으면 살가운 벗들과 생맥주집에 가서도 나그네보다 먼저 벗들이 주인에게 따로 부탁해 막걸리를 시켜줄까. 물론 삼겹살을 구워 먹을 때만큼은 막걸리를 잠시 제쳐두고 소주를 마시기도 한다.   


사실, 나그네도 2~30대 젊은 날에는 '주종불문' 하면서 맥주나 소주, 막걸리를 가리지 않고 마셨다. 하지만 40대에 접어들기 시작하면서 이상하게도 막걸리가 아닌 다른 술은 별로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사업을 하다가 쫄딱 망한 뒤 지방으로 내려간 그때 어쩌면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즐겨 먹는 막걸리가 딱 어울리는 술이라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막걸리는 돈이 많이 들지 않았다. 그저 가게에 가서 막걸리 한 병을 사면 주인이 "여기서 먹고 갈 거냐"라고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하면 김치는 거저 내주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막걸리는 목이 타거나 배가 고플 때 한 잔 쭈욱 들이키고 나면 갈증과 배부름까지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어 더욱 좋았다.

나그네가 이처럼 막걸리를 고집하는 까닭은 아마도 어릴 때부터 막걸리에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그네가 어릴 때에는 어머니께서 막걸리를 직접 빚으셨다. 나그네는 그때 어머니께서 막걸리를 거르고 남은 술찌미(술찌꺼기)에 사카린을 넣어 비벼 먹다가 술이 취해 혼땜을 하는 때가 많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아버지 중참 때 막걸리 반 주전자를 들고 논두렁길을 걸어가다가 목이 타면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대고 몇 번 벌컥벌컥 마시곤 했다. 그렇게 달착지근하면서도 시원한 막걸리를 몇 번 마시고 나면 신기하게도 갈증이 싸악 가셨다. 물론 아버지께 주전자를 들고 오다가 술을 쏟았다는 잔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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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소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만들었다는 선소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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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도막걸리 선소 곁 개도막걸리를 파는 선소 슈퍼, 오문수 선생이 앞장서 걸어가고 있다 ⓒ 이종찬


"개도 먹는다는 개도막걸리 맛보았소?"


"몸과 맘이 심들 때는 이 막걸리 한 사발이 보약이제. 요즈음 사람들이야 하도 먹을 게 지천으로 넘쳐나니까 막걸리 요놈을 아주 상머슴 취급하지만 예전에는 막걸리 요놈을 배부르게 한번 먹고 싶어 안달을 했당게. 특히 오뉴월 요맘 때 막걸리 맛이 제일이제. 하긴, 그때는 보릿고개라 해서 어찌나 먹을 게 없었던지......"

전남 여수에서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만들었다는 선소로 들어가면 그 나들목 맞은편에 막걸리를 파는 허름한 집이 하나 있다. 선소 슈퍼. 이곳에 가면 여수, 순천 사람들이 모르면 간첩이라 할 정도로 이름 높은 개도막걸리를 맛볼 수 있다. 개도 막걸리는 천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여수시 화정면 개도(蓋島)에서 전통 방식으로 만든 막걸리를 말한다.

나그네가 개도막걸리를 처음 먹어본 것은 2007년 오월쯤이었다. 그때 인터넷신문 창간 때문에 창원과 순천, 여수를 왔다 갔다 할 즈음, 여수에 살고 있는 조찬현 기자가 "개도 먹는다는 개도막걸리 맛보았소?"했다. 대체 무슨 맛이기에 저리도 호들갑을 떠는가 싶어 조 기자를 따라 개도막걸리를 판다는 선소로 갔다.   

개도막걸리를 파는 그 집은 아주 작고 허름한 구멍가게였다. 그 가게 안에 들어서면 사람들 서넛 앉아 막걸리를 마실 수 있는 비좁은 평상이 하나 놓여 있고, 가게 밖 선소로 들어가는 들머리에 작은 탁자가 두어 개 놓여 있다. 하지만 허름한 구멍가게와는 달리 말쑥한 손님들이 제법 많다. 간혹 연인끼리 막걸리를 마시는 모습도 눈에 띤다.

한 가지 재미난 것은 예전부터 개도막걸리를 마시기 위해 일부러 선소까지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다는 점이다. 하긴, 나그네도 일부러 개도막걸리를 마시기 위해 찾아오긴 했지만. 대체 개도막걸리는 어떤 맛일까. 어릴 때 아버지 중참 때 들고 가던 그 주전자에 든 달착지근하면서도 새콤했던 그 맛일까. 아니면 포천 산장호수에서 먹었던 그 알싸한 맛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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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도막걸리 "아따! 3~4병 먹고 갈 테니까 싸게 싸게 주씨요이~"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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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지 새콤달콤한 묵은지 ⓒ 이종찬


조선시대 때부터 만들었다는 개도막걸리 맛의 비밀은 천제산 물맛

"거 참! 막걸리를 어떻게 만들기에 이런 독특한 맛이 나죠?"
"물맛이제. 개도에 가면 천제산이 있는데 그 산에서 내려오는 물맛이 특히 좋아 막걸리 맛도 좋다 그라제."
"그동안 전국 곳곳에 있는 막걸리란 막걸리는 다 먹어봤는데 이곳 개도막걸리만큼 맛있는 막걸리는 처음이네요. 이러다가 개도막걸리에 완전 중독되것네."
"이 집 주인이 없어서 못 판다고 그라지 않소."

그날 우리는 가게 안에 앉아 개도막걸리를 시켰다. 마음씨 좋아 보이는 50대 중반 남짓한  주인에게 막걸리를 시키자 2병 이하는 팔지 않는다 했다. 조 기자가 "아따! 3~4병 먹고 갈 테니까 싸게 싸게 주씨요이~" 하자 주인이 묵은지와 멸치볶음, 다시마무침, 열무김치, 풋고추와 된장을 밑반찬으로 내놓는다.   

안주로 두부(2천5백원) 한 접시 시킨 뒤 개도막걸리 병을 들어 세차게 몇 번 흔들어 병을 비스듬이 기울여 뚜껑을 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탄산가스가 들어 있는 막걸리가 분수처럼 치솟아 올라 옷과 술상을 몽땅 버리기 일쑤다. 물론 어떤 이는 막걸리 병을 꾹꾹 몇 번 눌러 탄산가스를 약간 빼낸 뒤 뚜껑을 따는 사람도 있긴 있다. 

두껑을 따서 잔에 막걸리처럼 허연 잔에 개도막걸리를 따르자 우유처럼 뽀오얀 막걸리가 거품을 뽀글뽀글 뿜어 올린다. 풋고추 하나 된장에 포옥 찍어 아삭아삭 씹어 먹은 뒤 시원한 개도막걸리를 입에 대자 사이다처럼 톡 쏘는 듯한 맛 속에 새콤달콤한 맛이 입안을 확 감돈다. 그대로 한잔 쭈욱 들이키자 커~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선소를 바라보며 처음 맛본 개도막걸리! 하지만 다른 막걸리 맛과 별 차이는 없는 듯했다. 근데, 참 신기한 것은 개도막걸리는 마시면 마실수록 새콤달콤 혀끝을 톡 쏘는 맛과 함께 깊은 감칠맛이 자꾸만 당긴다는 점이다. 사이다 맛도 아니면서 사이다처럼 톡 쏘며 혀끝을 맴도는 독특한 감칠맛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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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고추와 된장 묵은지와 멸치볶음, 다시마무침, 열무김치, 풋고추와 된장을 밑반찬으로 내놓는다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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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도막걸리 묵은지에 싸먹는 손두부도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 이종찬


개도막걸리가 세상 시름 물고 썰물지고 있는 선소

"오늘 영 기운이 없어 보이요"
"며칠 연휴 때 고향 다녀오느라 개도막걸리를 통 못 먹어서 그런 것 같소"
"내 그럴 줄 알고 3~4병 사왔소"
"하, 그 개도막걸리가 사람 입맛을 확 바꿔놓아 버렸소. 다른 막걸리는 맛이 없어서 통 못 먹을 것 같으니, 이 일을 우짠다 말이요"
"이곳에서 그냥 눌러 살면 될 거 아니요"

그때부터 나그네는 개도막걸리 맛에 포옥 빠지기 시작했다. 나그네가 하도 개도막걸리를 좋아하자 조 기자는 아예 출근길에 개도막걸리를 3~4병씩 사들고 왔다. 그렇다고 나그네가 아침부터 개도막걸리를 마신 건 아니다. 개도막걸리를 냉장고에 넣어둔 뒤 하루 일이 끝나기 무섭게 개도막걸리를 마셨다. 마치 보약처럼 하루에 3~4병씩.

하지만 그 다음날 아침 취기가 돌거나 머리가 아팠던 때는 한번도 없었다. 그런 어느날 하루는 조 기자가 개도막걸리가 떨어졌다며 여천에서 파는 막걸리를 사왔다. 하지만 여천 막걸리는 개도막걸리가 지닌 독특한 톡 쏘는 맛이 없었다. 그 뒤 여수나 순천 등지에서 나오는 막걸리도 골고루 맛보았는데 역시나 개도막걸리 맛에 비길 술은 아니었다.   

조선시대 때부터 만들기 시작했다는 개도막걸리. 나그네는 요즈음에도 순천이나 여수에 내려갈 때마다 반드시 선소에 들러 개도막걸리를 마신다. 개도막걸리를 마시기 위해 순천이나 여수를 찾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지난 달 중순께 여수에 갔을 때도 선소에 들러 흐릿한 정신을 톡 쏘는 개도막걸리를 꿀꺽꿀꺽 마셨다. 마치 게걸들린 사람처럼.

선소 앞바다를 바라보며 마시는 개도막걸리 맛! 텁텁하지도 않고 뻑뻑하지도 않으면서 사이다처럼 술술 넘어가는 순하면서도 새콤달콤한 깊은 맛! 오뉴월 경제보릿고개로 몹시 힘겨운 이맘 때,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만들었다는 선소를 바라보며 살가운 벗들과 마주 보며 개도막걸리 한잔 마셔보라. 세상사 시름이 선소 앞바다에 몽땅 썰물지리라.  

덧붙이는 글 | <유포터>에도 보냅니다


덧붙이는 글 <유포터>에도 보냅니다
#개도막걸리 #여수 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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