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고 살아내는 만큼 찍는 사진이라면

[헌책방 책시렁에 숨은 책 41] <大竹省二-照る日 曇る日>과 강원도 춘천 <경춘서점>

등록 2009.06.30 10:08수정 2009.06.30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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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으며 세상 뭇사람 삶을 만날 수 있기도 하지만, 그저 책읽기를 좋아합니다. 사람들을 만나면서 제가 바라보지 못한 모습을 보고, 제가 느끼지 못한 대목을 느끼면서 제 눈과 마음을 한껏 다독일 수 있어 좋기도 하지만, 그예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합니다. 사진을 찍으며 제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다스릴 수 있기도 하지만, 있는 그대로 사진을 좋아합니다.

 

 지난달에 만화책 《신ㆍ엄마손이 속삭일 때》(세주문화) 12권을 보았습니다. 준코 카루베라는 일본 만화쟁이가 《당신의 손이 따뜻할 때》 열 권을 그리고 나서 뒷이야기로 이어 그린 작품으로, 12권까지 하여 스물두 권으로 마무리됩니다. 이 만화는 책이름에도 나오듯 "당신의 손"과 "엄마손" 이야기를 펼칩니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아가씨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짝을 맺으며 아이를 낳아 기르는 엄마가 되어 살아가는 이야기까지 여러 해에 걸쳐 찬찬히 풀어냅니다. 마무리 권인 《신ㆍ엄마손이 속삭일 때》 12권 '그린이 붙임말'을 보면, 그린이가 새를 보러 산에 나들이를 갔을 때 '말 못하는 사람'을 만난 이야기가 짤막하게 나오는데, 그린이가 이이한테 '손말'로 말을 거니 깜짝 놀라면서 아주 기쁘게 손말로 마주이야기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만화책 스물두 권을 넘기는 동안, '이 만화를 그린 분은 틀림없이 손말을 알고 있을 테지' 하고 생각했지만, 이처럼 당신이 손말을 쓰며 '소리말'을 못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그림을 보며 새삼 코끝이 찡했습니다. 그러면서 아주 마땅하다고 느꼈습니다. 소리말 못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만화로 그리려 한다면 '손말을 마땅히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입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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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한자락에 자리한 <경춘서점>이라는 곳은, 몸소 들어가 보아야 '책바다'가 어떠한 곳인지를 비로소 깨닫게 해 줍니다. ⓒ 최종규

춘천 한자락에 자리한 <경춘서점>이라는 곳은, 몸소 들어가 보아야 '책바다'가 어떠한 곳인지를 비로소 깨닫게 해 줍니다. ⓒ 최종규

 

 지난해 겨울, 강원도 춘천으로 나들이를 다녀왔습니다. 춘천에서 김유정문학관을 이끌어 가는 분이 불러 주어 아기와 옆지기와 함께 갔습니다. 여러 날 춘천에 머물며 시내와 문학관을 둘러보는 한편, 춘천에 두 군데 자리하고 있는 헌책방에도 찾아갔습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 여느 시나 군에는 헌책방이라는 데는 거의 씨가 말라 버렸습니다만, 춘천에는 제법 큰 새책방이 여러 곳 있고, 짜임새있는 헌책방이 두 군데 있습니다.

 

 춘천교대 졸업사진책 여러 권에다가 강원도 전화번호부를 구경하는 가운데, 남인천여자중학교 1969년치 졸업사진책까지 만납니다. 인천 학교 졸업사진책을 춘천에서 만나다니! 모르는 일이지만, 인천에서 태어나 학교를 다녔던 분이 춘천 둘레로 시집을 가던 때 챙겨 간 졸업사진책이었을 텐데, 어찌어찌 일이 있어 헌책방으로 흘러들게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으레 부산에 가면 부산 둘레 학교 졸업사진책이, 대전에 가면 대전 둘레 학교 졸업사진책이 나오는데, 이렇게 다른 곳 졸업사진책이 나오는 까닭은 남달리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 사진쟁이 '大竹省二'라는 분이 담아낸 사진책 《갠 날 흐린 날(照る日 曇る日)》을 살며시 집어듭니다. 서른 해를 묵은 사진책은 겉을 두꺼운 종이상자로 쌌으나, 한국땅에서 이 사진책을 간수하신 분이 어디엔가 처박아 놓았는지 헐고 다쳤습니다. 마음에 안 들어 책이 이리 되도록 두었는지, 이분 또한 어찌어찌 일이 있어 이렇게 간수했는지 모를 노릇입니다. 《갠 날 흐린 날》에 담긴 사진을 살피면, 먼저 절반쯤 아가씨 사진인데 알몸 사진이 많습니다. 절반을 넘어가니 '사람 사진'이 나오고, 책끝에 '사진찍은이 발자취'를 예전에 찍은(1940년대에) 사진 몇 장과 함께 밝혀 놓습니다. '大竹省二' 님이 1940년대에 찍었다는 사진은 '길에서 얻은 사진(스냅사진)'이거나 '사람 사진(인물 강조 사진)'으로, 《갠 날 흐린 날》에 담은 사진하고는 조금 다른가 싶었으나 사진을 찍는 마음결이나 매무새는 한결같구나 하고 느낍니다. 어떻게 보면 그런저런 사진이요, 어찌 보면 이냥저냥 사진이라 할 테지만, 이분은 당신이 가장 잘 알거나 좋아하거나 아끼는 모습을 사진으로 즐겁게 담았다고 느낍니다. 당신 사진 삶을 기나긴 해에 걸쳐 끊이지 않으며 사랑해 왔다고 느낍니다. 얼마나 더 사진일을 했는지는 알 길이 없고, 이 사진책 말고 어떤 작품을 선보였는지 또한 알 노릇이 없습니다만, 사진기를 쥐려면 내 손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를 시나브로 깨닫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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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책 <갠 날 흐린 날>은 책상자가 따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 최종규

사진책 <갠 날 흐린 날>은 책상자가 따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 최종규

 

 스스로 좋다고 느끼는 책은 한 번 읽어 끝내지 않기 마련입니다. 여러 차례 거듭 읽습니다. 거듭 읽는 동안 늘 책상맡에 놓아 둡니다. 해마다 한 차례 새롭게 들추며 새 빛줄기를 얻는데, 이러한 책들이란 누구보다 나한테 기쁘고 아름다운 책입니다. 글쓴이 그린이 찍은이를 만난 적이 없다 하여도 책 하나를 징검다리로 만나는 동안, 서로를 속속들이 알아가고 사랑하기에 책읽기가 흐뭇한 길동무 구실을 합니다. "인천에서 춘천까지 헌책방을 찾아 책을 사러 오셨어요?" 하는 〈경춘서점〉 아주머니한테는, 저 같은 헌책방벌레 한 마리를 이날 처음 만났으니 이렇게 말씀하시게 됩니다. 저 또한 다음에 다시금 춘천 나들이를 하여 〈경춘서점〉에 들르지 않고서야 이곳 책흐름과 책내음을 섣불리 말할 수 없을 테지요.

 

 그래도 한 가지 말할 수 있습니다. 강원도 춘천 헌책방 〈경춘서점〉 간판과 책시렁을 살며시 돌아보고 쓰다듬는 동안, 이 헌책방 한 곳이 반세기에 가까운 햇수에 걸쳐 춘천사람 누구한테나 책씨를 뿌려 오고 있었음을 느꼈다고. 춘천에 뿌리내리며 글쓰고 그림그리고 사진찍는 사람이 왜 많을밖에 없는가를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음을 느꼈다고. 사진책 《갠 날 흐린 날》에는 찍은이 '大竹省二'라는 분이 사랑하고 즐기면서 잘 알고 있는 삶자락이 더없이 담뿍 담겨 있다고.

 

― 강원도 춘천 〈경춘서점〉 : 033) 254-7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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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책 <갠 날 흐린 날>은 절반쯤 이와 같은 사진을 담았는데, 이이는 처음에는 '다른 길'에서 사진을 찍던 분입니다. ⓒ 최종규

사진책 <갠 날 흐린 날>은 절반쯤 이와 같은 사진을 담았는데, 이이는 처음에는 '다른 길'에서 사진을 찍던 분입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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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모르는 노릇이지만, <갠 날 흐린 날>을 펴낸 분은, 처음에는 당신 둘레 삶자락에서 사진을 얻었는데, 나중에는 '모델을 얻어서 찍는 사진'으로 탈바꿈합니다. ⓒ 최종규

잘 모르는 노릇이지만, <갠 날 흐린 날>을 펴낸 분은, 처음에는 당신 둘레 삶자락에서 사진을 얻었는데, 나중에는 '모델을 얻어서 찍는 사진'으로 탈바꿈합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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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갠 날 흐린 날>을 곰곰이 들여다보는 동안, '똑같이 모델을 얻어 사진으로 담더'라도, 똑같지 않은 사진이 됨을 느낍니다. ⓒ 최종규

<갠 날 흐린 날>을 곰곰이 들여다보는 동안, '똑같이 모델을 얻어 사진으로 담더'라도, 똑같지 않은 사진이 됨을 느낍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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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갠 날 흐린 날>을 엮어낸 이는, 사람을 좀더 가까이에서 파고들며 그이 온 모습을 담아내려고 당신 사진길을 고쳐 나갔을는지 모릅니다. ⓒ 최종규

어쩌면, <갠 날 흐린 날>을 엮어낸 이는, 사람을 좀더 가까이에서 파고들며 그이 온 모습을 담아내려고 당신 사진길을 고쳐 나갔을는지 모릅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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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갠 날 흐린 날>을 낸 이가 첫무렵에 담은 사진을, 책 뒤에 긴 글과 함께 몇 장 실어 놓았습니다. ⓒ 최종규

<갠 날 흐린 날>을 낸 이가 첫무렵에 담은 사진을, 책 뒤에 긴 글과 함께 몇 장 실어 놓았습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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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지난날에는 이와 같은 사진이 한 사회 삶자락을 보여주고, 오늘날에는 '예쁜 모델이나 이름난 어르신'을 꾸밈없이 보여주는 사진이 우리 사회 삶자락을 보여준다고 할는지 모릅니다. ⓒ 최종규

생각해 보면, 지난날에는 이와 같은 사진이 한 사회 삶자락을 보여주고, 오늘날에는 '예쁜 모델이나 이름난 어르신'을 꾸밈없이 보여주는 사진이 우리 사회 삶자락을 보여준다고 할는지 모릅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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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 제가 발디딘 자리에서 사진을 찍게 됨을, <갠 날 흐린 날>을 보면서 다시금 느낍니다. ⓒ 최종규

저마다 제가 발디딘 자리에서 사진을 찍게 됨을, <갠 날 흐린 날>을 보면서 다시금 느낍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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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한 사람들 곁에 있을 때에는 수수한 사진을 찍습니다. 도쿄 한복판에 있을 때에는 도쿄 한복판을 찍고, 연예인이나 모델 둘레에 있을 때에는 연예인이나 모델을 찍습니다. 다만, 어디에서 누구를 찍든 사람이요 삶이며 내 모습과 발자취입니다. ⓒ 최종규

수수한 사람들 곁에 있을 때에는 수수한 사진을 찍습니다. 도쿄 한복판에 있을 때에는 도쿄 한복판을 찍고, 연예인이나 모델 둘레에 있을 때에는 연예인이나 모델을 찍습니다. 다만, 어디에서 누구를 찍든 사람이요 삶이며 내 모습과 발자취입니다. ⓒ 최종규

덧붙이는 글 | - 이 글은 사진잡지 <포토넷>에 함께 싣습니다.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2009.06.30 10:08 ⓒ 2009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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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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