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모두 타죽이게 할 전쟁이니까

[그림책이 좋다 67] 레이먼드 브릭스, <바람이 불 때에>

등록 2009.07.04 14:51수정 2009.07.04 14:51
0
원고료로 응원
- 책이름 : 바람이 불 때에
- 글ㆍ그림 : 레이먼드 브릭스
- 옮긴이 : 김경미
- 펴낸곳 : 시공사 (1995.11.7.)
- 책값 : 7000원

 (1) 남녘나라에서 군대라는 곳


군대에 갔다 온, 또는 군대에 갔다 오지 않은 어른들은 젊은이한테 이야기합니다. "군대에 갔다 오면 사람 된다."

어릴 적부터 익히 들은 이 말마디는 어린 제 생각과 삶을 온통 뒤흔들었고, 군대에 끌려갈 날을 앞둔 젊은이가 된 제 생각과 삶 또한 온통 뒤흔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무렵, 저 같은 아이들 또는 젊은이들한테 이런 말마디를 읊은 어른들이 '모두 군대에 갔다 왔는지'는 여쭙지 못했고, 여쭐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 어른들이 군대에 갔다 오신 다음에 "사람이 되셨는지"를 궁금해 하지 않았습니다. 그예, 내 발등에 떨어진 불이며, 내가 국가대표 운동선수가 되어 금메달을 목에 걸거나 돈이 아주 많거나 나라밖으로 떠나거나 하지 않으면 군대에 끌려가야 한다고만 생각했습니다.

a

겉그림. 만화와 같은 짜임새로 엮은 그림책입니다. ⓒ 최종규


.. "다녀왔소." "다녀오셨어요? 오늘 아침은 좋았어요?" "응, 좋았어. 별 일은 없었지. 사는 게 너무 지루하고 재미없어." "퇴직했으니까 그렇죠, 제임스. 당신 좀 우울해 보이는데?" "응, 아침 내내 공립도서관에서 신문만 봐서 그렇지." "흥, 그까짓 쓰레기 같은 것들! 난 절대로 신문은 안 봐요. 〈스타〉지만 빼고요." "여보, 당신도 국제 정세를 좀 알아야 해. 결국엔 우리도 강대국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을걸." "신문엔 정치니 스포츠니 하는 것들만 잔뜩 실려 있잖아요." ..  (1쪽)

군대에 갔다 오고 나서도 어른들은 말합니다. "남자는 군대에 갔다 오지 않으면 사람이 안 된다."


군대에 갔다 온 저는 어른들한테 여쭙니다. "네, 저 군대에 갔다 왔습니다." "그래? 어디 있었는데?" "강원도 양구 산골짜기에 있었습니다." "……." 때때로 해병대 나온 분들이 있어 좀더 꼬치꼬치 물으실 때에는, "강원도 양구 도솔산에 있었습니다. 도솔산부대 들머리에 '해병대 전적비' 있는 줄 아시지요? 해병대 나오셨으면 '도솔산의 노래'라는 노래 아시지요?" "……."

우리 아버지는 당신 아들한테 "너는 군대에 가서 사회를 알아야 해." 하고 틈틈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들은 군대에 갔다 왔습니다. 아버지도 강원도 양구에 있었다고 합니다. 딱 한 번, 아버지와 어머니는 인천에서 양구까지 면회를 왔습니다. 일고여덟 시간도 넘게 걸려 겨우 부대 밑자락 검문소에 닿으신 아버지와 어머니는 부대 들머리까지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무렵은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어떠한 차도 우리 부대 앞까지 올라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해안마을(펀치볼)로 넘어가는 산꼭대기에 자리잡은 도솔부대는 한 해에 꼭 닷새쯤 해를 볼 수 있는 기막힌(?) 곳이었는데, 아버지와 어머니는 군인들이 행군을 해서 한 시간 반 남짓 걸어내려와야 하는 산 밑자락에서 아들을 기다리셨습니다. 그때 눈밭을 헤치고 겨우겨우 걸어내려가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뵈니 아버지는, "에이, 세상에 이런 곳이 다 있어? 어떻게 이런 데에서 사람이 살아?" 아버지 말씀마따나 그곳은 사람 사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곳 마을 분들은 군부대 옆에 깃들며 살림을 꾸리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중대가 모시는 대대에는 해마다 10월 끝무렵이면 장갑차 한 대가 떨어져서, 눈이 오는 날이면 장갑차가 슥슥 밀어 주고, 다음으로는 제철차가 슥슥 민 다음, 우리들 땅개가 줄줄이 늘어서서 싸리비와 눈삽으로 눈을 치워내곤 했습니다. 눈이 오면 으레 m 단위로 왔으니까요. 아무튼,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면회를 오신 다음부터 아버지 입에서 "너는 군대에 갔다 와야 해." 하는 말은 가뭇없이 사라졌습니다.

.. "여보, 아무래도 전쟁이 일어날 것 같소. 그래, 곧 전쟁이 터질 거라네." "글쎄요, 그래도 당신은 징집되지 않을 거예요, 제임스. 당신은 너무 늙었잖아요." "고맙구려. 그래도 난 당신보다 두 살이나 적어." "어쨌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승리의 그날까지 다시 소매를 걷어붙이고 허리띠를 동여매고 철모를 써야겠죠." "이번엔 그럴 것 같지 않고. 이번 전쟁은 빅뱅이론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아. 그건 모드 똑똑한 과학자들이 생각해 낸 거요." ..  (1∼2쪽)

군대를 마치고 사회로 돌아올 무렵, 행보관은 전역하는 우리를 앞에 두고 "너희들 주제에 사회에 나간다고 뾰족한 벌이도 없을 테니 공사판에 나갈 텐데, 공사판에 나갈 때면 우리 부대 야상을 꼭 입고 가라. 그러면 오천 원은 더 준다."고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거짓말이 아닌 소리였는데(1998년도), 우리들이 강원도 양구 산골짜기에 있는 동안 배운 일이라면 삽질과 곡괭이질과 마대질과 산타기 따위였습니다. 이른바 막일은 실컷 배운 셈이었습니다. 아니, 한 달 일삯 8000∼1만 얼마에 실컷 막일을 해 온 셈이었습니다. 그무렵 사회에서는 막일을 하면 하루에 3만 원을 받았는데, 우리는 군인이기 때문에 군대 막일을 하루 일삯 300원으로 새벽부터 밤까지 죽어라 해 온 셈이더군요.

이리하여,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재주'를 배운다는 군부대에서, 우리 부대원들은 하나같이 '배운 것 없는 사람이 먹고사는 재주'만 신나게 배운 셈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어릴 적 동네 어르신들이 하신 말씀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그 부대를 나오면서 제 앞가림은 막일터에 나가면서 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 "이번엔 방공호도 없다니 왠지 이상해요. 그땐 우리 집 정원에 앤더슨 방공호가 있었어요. 지금도 기억나요. 우린 방공호 주위에 한련을 잔뜩 심고 입구를 초록색으로 칠했어요. 정말 예뻤는데, 옆집에서는 방공호 위에다가 양배추를 심었죠." "맞아. 우리 집에선 모리슨 방공호를 설치했어. 난 그 안에서 잤어. 그 안에다 여자들 사진을 잔뜩 붙였지. 베티 그래블, 앤 셸턴, 패트리샤 록. 잠자리에서 촛불을 켜고 책을 읽다가 천장을 까맣게 그을렸지." "그래요. 2차대전 때에는 정말 좋았어요. 방공호, 등화 관제, 경보 해제 사이렌, 홍차, 공습 경보대, 피난민들. 런던의 아이들은 그때에 처음으로 소를 보았고, 라디오에선 처칠의 목소리. 아홉 시 뉴스, 베라 린의 노래, 노동자 큰잔치 프로그램을 방송했고. 옥수수밭 너머 푸른 하늘에선 스피트파이어와 허리케인이 몰려왔고, 도버 해협의 하얀 절벽으론 독일군이 밤바다 쳐들어왔죠. 그땐 좋았어요." ..  (7쪽)

a

속그림 ⓒ 시공사


스무 살 젊은 나이에 군대에 들어가 스물셋을 앞두고 사회로 돌아왔습니다. 한창 펄펄 끓는 나이에 군대에 있는 동안, 제 얼굴과 몸과 말결과 마음밭은 크게 달라졌습니다. 군대에 가기 앞서 책을 즐겨읽기는 했어도 아주 좋아하지는 않았는데, 스물여섯 달 있으면서 책을 한 권도 읽지 못했습니다. 신문 한 장 읽은 적이 없습니다. 사회에 나오고 보니, 2005년 가을부터 2007년 겨울까지 세상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알 길이 없었습니다. 저는 바보가 되었습니다.

아, 부대에 딱 두 가지 신문이 들어왔는데, 하나는 '스포츠○○'이었고, 하나는 'ㅈ일보'였습니다. 이 신문은 소대장과 중대장이 보았는데, 어쩌다가 슬쩍슬쩍 넘겨본다든지 철지난 신문을 차곡차곡 모아 태워 위장크림으로 만든다고 할 때에 살펴보기는 했으나, 이런 신문으로는 세상을 하나도 읽을 수 없었습니다.

위에서는 고참이, 옆에서는 동기가, 아래에서는 후임이 읊조리는 온갖 상소리와 욕지꺼리를 듣고 따라하고 익숙해지면서 사회에서 제 말투는 '못난 건달깡패나 외는 말투'로 받아들여졌고, 여러 해 동안 반 벙어리처럼 되어 사람들 앞에서 말문을 열기 어려웠습니다. 툭하면 욕이 튀어나와 "너 왜 그렇게 바뀌었니?"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느덧 예비군이 끝나고 민방위가 되었으나 군대 적 말투와 몸짓을 모두 털어내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그 짧은 스물여섯 달, 아니 짧지 않은 스물여섯 달에 걸쳐 젊은 넋한테 아로새겨진 숱한 삶자락은 제가 눈을 감는 날까지 길디길게 이어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느 누구라도 한창 푸르고 젊고 싱싱하던 때에 겪고 부대낀 이야기들이 오래도록 또아리를 틀 테니까요.

.. "지금 페인트칠을 하려는 건 아니죠, 제임스?" "유리창을 하얗게 칠해야 해." "왜요?" "방사능 때문인 것 같아. 햇빛을 막으려고 온실을 하얗게 칠하는 것처럼 말이지. 지침서에 나와 있어." "정말 그렇게 더울까요?" "글쎄, 잘 모르겠지만 히로시마에서는 해가 천 개나 떠 있는 것처럼 더웠대. 그러니 꽤 더울 거야. 게다가 지금 강대국들은 훨씬 더 성능이 좋은 걸 만들고 있어. 과학이 엄청나게 발전했으니까." "페인트가 커튼에 묻지 않게 조심해요! 먼저 커튼부터 떼냈어야죠. 정말 생각이 없군요." ..  (8∼9쪽)

대한민국에서 군대에 가지 않으면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셈이라는 이야기를 곧잘 듣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분들치고 '땅개로 밑바닥에서 굴렀던 분'은 거의 없다고 느낍니다. 하사관이든 장교이든 간부로 있던 분들, 또는 여느 보병이었으나 후방에 있던 분들, 또는 전방에 있었어도 행정병으로 있던 분들이 으레 이러한 이야기를 합니다.

생각해 보면, 여느 땅개로 군대에서 젊은 나날을 보내야 했던 분들은 우리 사회에서 '말할 힘'이 거의 없는 밑바닥 일터에서 조용히 일만 하고 있는 개미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농사를 짓거나 공장에서 기계를 다루거나 길바닥에서 장사를 하거나 할 뿐, 신문이든 잡지이든 방송이든 책이든 인터넷이든, 이런저런 데에 당신 목소리를 한 번이라도 낼 만한 자리에 있어 본 적이 없는 이들이라고 느낍니다.

수십 킬로그램에 이르는 완전군장을 메고 소총을 메고 탄약상자를 들고, 또는 박격포를 셋으로 나누어 지고, 또는 무반동총을 홀로 낑낑거리며 군장 위에 얹고, 또는 부대 깃발과 무전기를 목아지에 얹고 하루 동안 쉼없이 걸어야 했던, 이러는 가운데 소대장이나 중대장이나 하사관 물통까지 덤으로 군장에 끼워들고 걸어야 했던 땅개 가운데에서는 "대한민국 남자는 군대에 가서 나라사랑을 배워야 한다"는 말을 섣불리 안 한다고 느낍니다. 고엽제 상자를 둘이 나누어 들고 군사분계선으로 날라 '시계청소'를 한다며 헬멧으로 퍼서 뿌리던 땅개들은, 진지구축을 한다며 시멘트와 돌과 모래와 물을 한 짐씩 이고는 네 시간 남짓 산길을 타고 올라 내려놓고 낮밥을 먹은 뒤 다시 네 시간 남짓을 걸어내려오며 하루 일을 마치던 땅개들은, 겨울철 보급로 눈길을 치울 싸리비를 만들어야 한다며 밤을 새워 몇날 며칠 수천 개에 이르는 싸리비를 만드느라 잠 못 자고 눈이 퉁퉁 붓던 땅개들은, 장마철에 보급로 무너지면 안 된다며 밤새워 삽자루 들고 온몸이 비에 흥건히 젖은 채 물골작업을 하던 땅개들은, 어설피 "남자인데 군대에 안 가?" 하는 말을 꺼내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저는 아직까지도 제가 상병일 때 병장이던 고참이 "종규야, 우리 천 삽 뜨고 허리 한 번 펴기 하자!" 하면서 웃던 얼굴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이삼백 삽쯤 뜨고 허리를 펴려고 하니, "어, 아직 천 삽 되려면 멀었는데?" 하면서 삽자루로 후려패려고 높이 쳐들고 웃음 띠던 얼굴 또한 잊을 수 없습니다.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a

속그림. 늙은 가시버시가 주고받는 이야기투로 엮은 <바람이 불 때에>는, 수수하면서 조촐한 여느 사람들 삶에 따라 '전쟁 문제'를 파헤쳐 보여줍니다. ⓒ 시공사


 (2) 대포동미사일이 걱정된다면

북녘에서는 대포동미사일을 만든다고 합니다.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가는 미사일을 만든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은 수천 킬로미터뿐 아니라 수만 킬로미터를 날아갈 만한 미사일을 갖추고 있습니다. 러시아에도 있고 중국에도 있으며, 프랑스와 영국과 독일도 갖추고 있지 않으랴 싶습니다. 일본에는 이런 미사일이 없겠지만, 미사일보다 무시무시한 이지스함이 있고, 남녘나라이든 북녘나라이든 꿈꿀 수 없는 엄청난 군무기를 갖추고 있습니다.

남녘땅에 있던 핵미사일을 미국이 도로 가져갔는지 모릅니다만, 미국이 남녘땅 핵미사일을 미국땅으로 가져갔거나 일본 류우큐우(오키나와)로 가져갔든, 이 핵미사일은 언제든지 북녘땅쯤 송두리째 날릴 수 있습니다. 단추 하나만 누르면.

.. "화장실은요?" "요강 같은 걸 들여놔야지." "제임스 블록스 씨, 미리 말해 두지만, 난 품위 있게 위층으로 갈 거예요." "하지만 여보, 돌아다녀선 안 돼. 국가적 비상 사태 열나흘 동안은 안 된다고." "그럼, 좋아요! 요강은 어떻게 비울 거죠?" "저, 그냥 화장실에 버려야 할 것 같은데." "방금 화장실에 가서는 안 된다고 했잖아요!" ..  (9쪽)

일본은 한국과 대만과 중국과 태평양 섬나라를 식민지로 삼았고, 유럽은 지구에 그려진 모든 나라를 식민지로 삼았으며, 미국은 일본이 식민지로 삼았던 나라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가운데 쿠바와 중남미 아메리카를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베트남을 프랑스에 이어 식민지로 삼으려다가 쓴맛을 보았고, 쿠바라는 물좋은 식민지는 카스트로와 체게바라 일당(?)한테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쿠바를 빼앗긴 좋은(?) 쓴맛을 발판 삼아 칠레 아옌데 정부가 들어설 때 숱한 미사일과 헬리콥터와 탱크로 대통령궁을 박살내고 민주인사 목아지를 베어 죽이면서 식민지 넓히기를 힘차게 이어나갔습니다.

.. "세상에! 그럼 이젠 누가 지휘를 하지?" "꼼푸터겠죠." "'국민연금증서와 의료보험카드와 출생증명서를 상자에 보관할 것.'" "여기 쓸 만한 게 있어요, 여보. 속을 비울게요." "고맙소. 상자는 안전한 곳에 둬야겠소. 그런데, 안전한 곳이 어디지?" ..  (13쪽)

우리 나라는 우리보다 힘여린 나라를 식민지로 거느리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보다 돈없는 나라에 공장을 세우고 있으며, 우리보다 돈적은 나라에서 싼 물건을 사들여 나라안 일꾼과 가게가 무너지도록 하고 있습니다. 싼 물건을 사서 쓰는 우리들은, 제값 받고 팔아야 할 물건을 만드는 우리 이웃이 굶어죽도록 내몹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가르기 앞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 이웃이 만든 '옳은 땀'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자 하지 않으면서, 이웃나라에서 '싸게 내다 파는 달콤한 맛'에 홀려 머저리가 되었습니다. 앞에서 총칼 들고 밀어닥친 군부대 식민지는 아니지만, 뒤에서 돈다발 들고 킥킥거리는 부자들 놀음놀이 식민지라고 느낍니다.

.. (잠시 방송을 중단하겠습니다. 정부의 공식 발표가 있겠습니다. 적의 미사일이 우리 나라를 향해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3분 뒤에 폭발합니다.) "맙소사! 여보! 3분밖에 안 남았어!" "어머, 얼른 세탁물 좀 들여놓을게요." "이리 돌아와, 이 바보야, 대피소로 들어가!" (대피하십시오!) "어떻게 나한테 그 따위 말을 할 수 있어요!" "입닥치고 들어가란 말이야!" "전시라고 해서 품위까지 팽개쳐야 하나요?" (집 밖으로 나가지 마십시오!) "입닥쳐! 방송을 듣고 있잖아!" (집 안에 계십시오!) "이날 이때껏 그런 소린 못 들어 봤어요." (절대로 집 밖으로 나가지 마십시오!) "제발 입 좀 닥쳐!" (엎드리세요!) "아, 여보! 오븐을 켜 놨어요." (들어가! 들어가! 들어가라니까!" ..  (17쪽)

그나저나 북녘은 대포동미사일을 뭐하러 만들까요. 핵무기를 뭐하러 만들려고 할까요. 남이든 북이든 먼저 치고 들어가면 먼저 맞은편을 쑥대밭이 되도록 무너뜨릴 수 있다고 하는데, 왜 서로서로 먼저 쳐들어가고 있지 않을까요.

서로가 서로를 쳐들어간다면 누가 땅개가 되어 피를 흘리며 숨을 거두고, 누가 지도자나 사령관이 되어 가슴팍에 훈장을 주렁주렁 달게 될까요.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끝난 자리에는 무엇이 새로 들어서게 되고, 피비린내 나는 싸움은 서로서로 무엇을 더 얻어려고 벌이는 주먹다짐 칼부림 총질이 될까요.

a

속그림. 드디어(?) 핵미사일이 떨어집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그깟 핵미사일이 뭐 대수냐고 하고, 할아버지는 아주 무시무시하니 얼른 몸을 숨겨야 한다고 외칩니다. ⓒ 시공사


 (3) 그림책 《바람이 불 때에》가 말하는 이야기

그림책 《바람이 불 때에》는 힘센 나라들이 서로 악다구니처럼 싸움을 벌인 끝에 서로서로 핵무기를 쏘아대면서 모든 사람들이 가루가 되어 죽어 버린 일을 그림이야기로 담아냅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늙은 가시버시는 옛날 생각(제2차세계대전 때)을 하면서 '이번에도 어찌어찌 견디면 전쟁이란 바람은 지나가겠지' 하고 생각하는데, 이번 바람은 그냥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 목숨을 죽음으로 실어나르는 바람이었습니다.

이리하여, 늙은 가시버시는 핵무기가 퍼뜨리는 병에 걸려서, 또 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도 물과 밥이 다 떨어져 굶어죽었을 테지만, 조그마한 집 조그마한 대피소에 나란히 누워 아주 조용히 숨을 거두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1970년에 영국 그림쟁이가 담아낸 《바람이 불 때에》인데, 1970년 그무렵에도 '핵전쟁'을 걱정해야 할 만큼 사람들은, 아니 숱한 나라 정부들은, 아니 유럽과 미국에다가 러시아 정부들은 서로 누구 힘이 더 센가를 겨루면서 제 밥그릇을 좀더 크게 차지하려는 데에 온힘을 쏟았습니다.

자, 그러면, 1970년부터 마흔 해 가까이 지난 2009년 오늘날 우리 세상은 어떠할까요. 유럽 나라는, 미국은, 러시아는, 일본은, 또 중국은 어떠하지요? 힘있는 뭇나라들은 힘여린 뭇나라 앞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가요. 티벳은 왜 중국한테 짓밟히면서 죽어나야 하는가요. 태평양 섬나라는 어이하여 다국적기업 관광지로 개발되어야 하는가요.

.. "너무 조용하지, 안 그래?" "그래요, 이상하네요. 기차도 안 지나가네. 자동차도 없어요." "폭발 때문에 모두들 파업했나 봐요." "탄내가 아주 지독해요." "맞아. 하긴, 당연한 일이지." "고기 굽는 냄새 같아요." "그래, 고기파티를 하나 봐. 사람들이 이번 주엔 일요일이 되기도 전에 만찬을 하나 보군.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그럴 거야." "길이 아주 이상해졌어요. 좀 녹은 것" 같아요." "그래서 우유배달부가 늦나 보군. 길바닥 어디에 붙어 버렸나 봐. 전쟁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 걸까? 누가 이기고 있을까?" "걱정 말아요, 여보. 신문에 다 나올 거예요." "생각해 보니까, 신문도 늦는 것 같아." "어제도 우리 집은 빠뜨리고 갔어요." ..  (30∼31쪽)

a

속그림. 늙은 가시버시는 끝내 핵무기에 몸이 망가져서 죽습니다. 죽어 가면서도 죽어 가는 줄 모르고, 두 사람 수다는 그치지 않습니다. ⓒ 시공사


그림책은 아이들이 보라고 그린다고 하지만, 《바람이 불 때에》는 아이들이 보기에 썩 알맞지 않은 그림책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야기가 끔찍해서? 아닙니다. 이야기는 끔찍하지 않습니다. 이야기가 어려워서? 아닙니다. 이야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이야기가 아이들 삶하고 동떨어져서? 아닙니다. 이야기는 아이들 삶하고 가까이 맞닿아 있습니다. 그러면? 그러면 왜?

아무래도 《바람이 불 때에》는 철이 없는 어른이 먼저 보도록 그려내지 않았느냐 싶기 때문입니다. 전쟁을 겪어 보았다고 하거나 전쟁을 안다고 하거나 나라사랑을 하자고 하거나 남북녘이 서로 맞서고 있다고 하거나 세계평화를 걱정한다고 하는 어른들이 바로 이 그림책을 찬찬히 받아들이거나 새기지 않는다면, 이 그림책이 아이들한테 제대로 읽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먼 앞날 세상을 바꿀 테지만, 어른들은 바로 아이들이 자라나는 오늘날 이 세상을 흔들고 있거든요. 오늘날 이 세상을 흔드는 어른들이 우리 삶터를 어떻게 다스리거나 이끄느냐에 따라 아이들 삶과 삶터가 뒤바뀔밖에 없거든요.

.. '그럴 필요도 없지. 어차피 케이크는 모두 탈 테니까.' ..  (17쪽)

모두를 타죽이게 하는 싸움입니다. 핵무기를 앞세운 싸움이든, 재래식 무기를 앞세운 싸움이든, 모두를 타죽이게 하는 싸움입니다. 어린이도 타죽이고 어른도 타죽입니다. 푸름이도 타죽이고 늙은이도 타죽입니다. 고양이도 타죽이고 강아지도 타죽이며, 염소와 송아지와 돼지와 닭을 가리지 않습니다. 진달래와 개나리와 장미와 튤립을 따지지 않으며, 소나무와 잣나무와 방울나무와 감나루를 헤아리지 않습니다.

'싸움이라고 하는 바람'이 한 번 불 때에는 이제 모두들 끝이라고 해야 합니다. 큰 싸움이든 작은 싸움이든, 모든 사람을 타죽이게 하는 불바람입니다. 이리하여, 그림책 《바람이 불 때에》는 아이들한테 읽히기 앞서 어른들이 먼저 찬찬히 읽고 새기고 받아들이며 어른들 삶을 스스로 고쳐야 합니다. 이러는 가운데 이 그림책을 아이들한테 쥐어 주어야 아이들 또한 속속들이 살뜰히 받아먹습니다.

그저 지식이나 정보로만 이 책을 쥐어 준다면, 그예 '세계 명작 그림책이니 아이들 인성발달에 좋겠지' 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쥐어 준다면, 우리 어른들은 또다른 뜻에서 '싸움에 한발 담그는 셈'입니다. 아이들한테 '싸움 솜씨'만을 물려주는 셈입니다. 우리 집 아이와 이웃집 아이한테 싸움을 붙이는 꼴입니다. 내 아이가 다른 아이를 밟고 올라서도록 내모는 짓이 되고 맙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바람이 불 때에

레이먼드 브릭스 지음, 김경미 옮김,
시공주니어, 1995


#그림책 #전쟁문학 #어린이책 #핵무기 #책읽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샌디에이고에 부는 'K-아줌마' 돌풍, 심상치 않네
  2. 2 황석영 작가 "윤 대통령, 차라리 빨리 하야해야"
  3. 3 경찰서에서 고3 아들에 보낸 우편물의 전말
  4. 4 '25만원 지원' 효과? 이 나라에서 이미 효과가 검증되었다
  5. 5 "윤 대통령, 류희림 해촉하고 영수회담 때 언론탄압 사과해야"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