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읽기 없이 사진찍기에 갇힌 한국 사람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6] 박도 엮음, <지울 수 없는 이미지 2>

등록 2009.11.09 11:00수정 2009.11.09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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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지울 수 없는 이미지 2
- 사진 : 한국전쟁 미군 종군기자
- 엮은이 : 박도
- 펴낸곳 : 눈빛 (2006.6.25.)
- 책값 : 35000원

 (1) 사진읽기와 사진찍기


골목길을 사진으로 담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골목길을 사진으로 여러 해 또는 여러 달 담은 다음에 사진잔치를 여는 분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김기찬 님을 빼놓고 '골목길 이야기'를 사진책으로 엮어 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아니, 아직까지 한 사람도 없다 할 만합니다.

사진으로 담을 만큼 눈에 뜨이거나 마음을 사로잡는 모습이 되는 골목길이라고는 하지만, 책으로 엮었을 때에는 팔기가 썩 힘들어 출판사에서 꺼리기 때문일까요. 김기찬 님 앞으로나 뒤로나 골목길을 찍는 사람은 많으나 김기찬 님이 이른 사진예술에는 가 닿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사진감은 골목길이라고 하나, 정작 골목동네 삶자락을 건드리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얼마 앞서 인천 송림4동 골목길 한켠에서 사진잔치가 열렸습니다. 이곳 인천 송림4동 골목동네를 사진으로 담은 분이 그곳에 있는 골목집 담벼락에 사진 서른 점쯤을 붙이며 조촐하게 마련한 자리입니다. 빗줄기 꾸준하던 일요일 아침에 화평동부터 걸어 송현1ㆍ2ㆍ3동을 거쳐 송림2동과 6동을 지나 4동에 다다르며 담벼락 사진 몇 점을 가만히 들여다보았습니다. 딱히 이 사진잔치를 구경할 마음에 송림4동까지 걷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골목동네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담아서 어떻게 보여주려고 했는지 궁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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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동네 사람으로서 골목마실을 하며 사진을 담아 봅니다. 골목길이란 뒤떨어진 곳도 어두운 곳도 꾀죄죄한 곳도 할아버지와 어린이가 있는 곳도 아닌, 똑같이 사람 사는 곳인데, 이 모습을 꾸밈없이 담아내는 사진쟁이 찾기란 너무 힘듭니다. ⓒ 최종규


번들번들한 종이에 뽑은 사진을 들여다봅니다. 피식 하는 웃음조차 나지 않습니다. 슥 한 번 둘러보고는 다시 더 들여다볼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사진이 붙은 담벼락 옆으로 난 골목으로 조용히 들어갑니다. 잠자리채와 어울리고 있는 꽃그릇에는 가을 김장거리가 자라고 있습니다. 빗줄기 떨어지는 골목집 처마와 처마 사이는 좁아 작은 우산임에도 반을 접어서 걸어야 합니다. 골골샅샅 새삼스레 골목을 돕니다. 옆으로 이어진 송림4동 천주교회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성모님한테 꾸벅 절을 하는데, 둘레에 떨어져 있는 가을 나뭇잎 빛깔이 퍽 곱구나 싶어 사진 한 장 담습니다. 제 사진기와 렌즈는 화각이 좁아 울긋불긋 빛깔이 어우러지는 천주교회 안마당과 골목동네 이웃집을 나란히 사진 한 장에 우겨 넣지 못합니다. '참 안 되는구나' 하고 생각하다가 문득, '굳이 한 장에 우겨 넣어야 하지는 않잖아?' 하고 새롭게 생각합니다. 있는 그대로 좋으니까요.

그러면서 깨닫습니다. 왜 나는 저 담벼락에 붙은 사진들이 못마땅하다고 느끼고 있는가를. 골목동네와 골목동네 사람을 찍으려 했다는 저 사진들은, 곰곰이 따지면 골목동네를 찍지 않았습니다. '골목동네 느낌이 나도록 하는 풍경'을 하나 찍었고, '골목동네 사람들 얼굴 모습'을 하나 찍었습니다. 그러니까, 골목길을 찍은 사진이 아니라 '골목길 풍경'을 찍은 사진이요, 골목집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찍은 사진이 아니라 '사람들 얼굴'을 찍은 사진인 셈입니다.


비오는 일요일 한낮을 지날 무렵, 낮은 산자락에 자리한 작은 골목집 안마당에서 남자 어르신 여럿 목소리가 왁자하게 울려퍼집니다. 남자 어르신 여럿은 겨울을 부르는 비를 맞이하면서 술 한잔을 즐기고 있습니다. 담벼락에서 까치발을 하면 어르신들이 어떻게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지 들여다볼 수 있고 사진으로 담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슬그머니 지나칩니다. 저로서는 어르신들 목소리만으로도 술내음을 맡았습니다.

재능대학교 높은 건물이 우람하게 올려다보이는 달동네 꼭대기에 닿습니다. 나무전봇대랑 사이좋게 어울려 있는 골목집 한 채는 담벼락에 무청을 말리고 있습니다. 사진 석 장 담습니다. 이 삶자락이 고스란히 아름답다고 느끼기에, 한 장이나 두 장, 때로는 석 장쯤 사진으로 담습니다. 한 번에 한 장쯤 찍는다고 하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나중에 다시 찾아와서 다시 한두 장 새롭게 담습니다. 그런 뒤 또 찾아와서 새삼스레 한두 장 다시 담고, 이러기를 여러 해 되풀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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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청을 말리는 달동네 꼭대기 골목집은 어여쁩니다. 작은 크기로 보면 흔들림이 적은데 원판은 꽤 흔들렸습니다. 비를 맞으며 한손에 우산 한손에 사진기 들고 찍으니 흔들리고 맙니다. 다음에 다시 찾아와서 또 한 번 찍어야지요. ⓒ 최종규


저는 헌책방을 사진에 담을 때에도 이렇게 해 왔습니다. 한 번 찾아가서 그날 찍은 사진만으로도 그 헌책방 이야기를 낱낱이 보여줄 수 있도록 사진을 찍기도 하지만, 그날 한 번 찾아가는 발걸음만으로 사진을 마무리할 수 없다고 느낍니다. 이렇게 헌책방 사진을 찍은 지 벌써 열한 해를 넘기고 있는데, 단골로 다니는 헌책방마다 그 한 곳을 찍은 사진만 모아도 사진책 여러 권 낼 만큼 되었다 하지만, 제 마음은 '아직 멀었다'입니다. 헌책방이 스스로 담아내고 있는 햇수와 너비와 눈물과 깊이가 어떠한데 고작 열 몇 해 사진을 담고 이야기를 듣고 온몸으로 부대꼈다고 해서 그곳을 '알'고 '보'았고 '느꼈'다고 하면서 섣불리 사진책 하나를 마무리할 수 있겠습니까.

글을 쓰는 사람은 퍽 바지런히 글을 읽습니다. 내가 쓰는 글과 견주어 다른 사람이 쓰는 글을 아주 많이 읽습니다. 내 글을 한 줄 쓰려고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책으로 치면 열 권 넘게 읽습니다. 때로는 백 권쯤 읽습니다. 웬만큼 훌륭하다고 느낄 만한 분들 책이라면, 이분이 이 한 권을 써내기까지 읽은 다른 사람 글책은 자그마치 만 권이나 이만 권쯤은 된다고 느낍니다. 훌륭한 책을 만날 때마다 이 책을 태어나도록 이끌어 준 또다른 책 만 권을 헤아립니다.

옛말에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인다고 했습니다. 제가 읽기로는 훌륭한 책이지만, 이 책을 쓴 분은 늘 부끄럽다고 여기겠지요. 그래, 글쓴이는 부끄럽다고 여기는 읽는이는 훌륭하다고 받아들인 책 하나는 수많은 다른 책나라로 다리를 이어 주는 노릇을 합니다. 다 다른 사람들과 새로운 사람들한테 조용히 인사를 건네면서 나 스스로 더욱 담금질을 하고 좀더 갈고닦기를 하라고 어깨를 토닥입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퍽 게을러 다른 사람 사진을 거의 안 읽습니다. 아예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글쓰기에 앞서 글읽기가 있듯이, 그림그리기에 앞서 그림읽기가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진찍기에 앞서 사진읽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진읽기는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진쟁이 스스로 사진읽기를 제대로 하지 않는 가운데 사진찍기만 무턱대고 나섭니다. 마치, 다른 사람 작품을 들여다보는 일이 내 사진을 더럽히거나 얼룩지게 하기라도 하듯이. 괜히 영향을 받거나 비슷한 틀이 나오도록 하기라도 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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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각이 좁은 제 사진기와 렌즈로는 이만큼 찍으면 잘 잡은 셈입니다. 그러나 꼭 이만큼만 담을 수 있기에, 저는 저 나름대로 골목동네를 '왜곡을 덜 하'면서 있는 그대로 담을 수 있기도 하다고 느낍니다. ⓒ 최종규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거룩하고 뛰어나고 빼어나고 훌륭했던 글쟁이와 그림쟁이는, 눈을 감는 마지막날까지 다른 사람 글과 그림을 들여다보고 읽어내고 삭여내어 받아들이려고 무던히 애썼습니다. 누구나 스스로 빚어낸 글과 그림 부피보다 다른 이 글과 그림을 받아들인 부피가 훨씬 큽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 글과 그림을 흉내내지 않으며 당신 글과 그림을 일구었습니다.

오늘날 사진쟁이들은 다른 사람 작품을 거의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창조나 개성을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생각힘이 없습니다. 넋이나 얼 또한 없습니다. 외려 죽은 작품만 쏟아집니다. 그리고, 죽은 작품만 숱하게 쏟아내면서 스스로 죽어 있는 작품인지 아닌지 깨닫지 못합니다.

흔한 말로 한국땅에서 사진기 다룬다는 사람이 천만이 된다고 하는데, 더없이 아름다운 사진책 하나가 천만 권 팔리기를 바랄 수 없다손 치더라도 만 권조차 아닌 천 권마저 팔리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 우리 모습이 이렇습니다. 백 권이나마 팔리면 잘 팔린 셈입니다. 한 해 동안.

모두들 읽기는 하지 않는 주제에 '내가 사진을 얼마나 잘 찍었는지 좀 들여다보쇼!' 하면서 끝없이 당신들 작품을 쏟아내기만 합니다. 알음알음으로 서로서로 사진잔치에 찾아가 주기는 하지만, 서로서로 찾아가 주어도 서로서로 어떤 사진을 어찌어찌 찍었는가를 살피지 멋힙니다. 살폈어도 속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습니다. 잘못 찍었으면 나무라고 엉뚱하게 찍었으면 꾸짖으며 형편없이 찍었으면 다그쳐야 합니다. 그렇지만 사진찍기에 앞서 사진읽기가 안 된 요즈음 사진쟁이들은 '사진말하기'조차 할 줄 모릅니다. 아니, '사진말하기'는 생각해 본 적이 없겠지요.

이리 비틀 저리 뒤틀 하면서 갈팡질팡이요 엉망진창입니다. 새로운 사진쟁이라면서 이름과 얼굴 들이미는 사람은 넘쳐나는데 하나도 새롭지 못합니다. 사진예술을 한다고 내세우고 있으나 하나도 예술다움을 느끼지 못하겠습니다. 2009년 사진밭이 쑥대밭이라 한다면, 사진찍기에 앞서 사진읽기를 할 줄 알거나 하려고 힘쓰는 사진쟁이를 찾아보기 어려운 데에서 골칫거리가 싹트고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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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울 수 없는 이미지> 2권 겉그림. ⓒ 눈빛


 (2)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두 번째 이야기

박도 할아버지는 지난 2006년에 《지울 수 없는 이미지 2》을 내놓았습니다(2004년에 1권, 2007년에 3권을 냈습니다). 당신이 찍은 사진이 아니지만, 당신이 엮은이 이름을 걸었습니다. 모르기는 몰라도, 참말 모르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누가 찍었는지 왜 찍었는지 알기 쉽지 않은 사진들을 알뜰히 그러모아서 사진책을 엮었습니다.

틀림없이 주한미군이 찍은 사진이었을 테며, 종군 사진기자나 사진작가가 찍기도 했을 사진이라고 봅니다. 이 가운데에는 임응식 님이 찍은 사진이 함께 있지 않으랴 싶습니다. 임응식 님은 한국전쟁 때 미군에 사진기자로 들어가서 여러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는데, 모든 필름을 미군한테 내어주어야 했다고 했거든요.

한국땅으로 들어왔던 미국 군부대가 수많은 사진쟁이를 부려서 숱하게 찍고 모으고 한 사진들로 사진책을 엮었는지 그냥 자료로만 간수하고 있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이들 미국 군부대는 한국전쟁 때 찍은 한국땅 한국사람 모습을 내다 버리지 않았습니다. 알뜰하게 건사해 놓았습니다. 우리한테는 없는 우리 삶자락 이야기가 외려 미국땅 어느 관공서 도서관 한켠에 얌전하게 모셔진 채 오래도록 찾는 이 하나 없이 묻혀 있었습니다.

..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은 투명유리로 된 최신의 6층 건물로, 그 규모도 엄청 컸지만 그곳에 소장한 수백만 파일의 각종 기록물의 방대함을 보고는 탄복하였다. 5층 자료실에서 비밀 해제된 한국 관련 사진(주로 한국전쟁 사진)들을 보자 50여 년이 지난 그때가 마치 어제의 일처럼 떠올랐다. 한국전쟁 당시 나는 여섯 살 난 소년으로 기억들이 가물가물 남았는데 그 사진들을 보자 바로 나와 내 이웃들의 살아 있는 모습처럼 다가왔다. 순간 나는 그 사진들을 모두 우리 나라에다 옮겨 놓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을 다 옮겨 오기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행히 자료실에서 사진 스캔은 허용되기에 재미동포에게 스캐너를 빌려서 40여 일 동안 수십만 장의 사진 가운데 480여 매를 골라 컴퓨터에 담아 왔다 ..  (엮은이 말/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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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사진. ⓒ 박도/눈빛


우리한테는 어떤 '기록'이 있고 '자료'가 남았다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이 나라 대한민국에는 기록을 하는 공공기관이 있는지 궁금하며, 기록을 하는 문화예술교육인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자료를 간수하는 공공기관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며, 자료를 그러모으는 문화예술교육인은 또 얼마나 있는지 궁금합니다.

사진은 '기록예술'이라는 이름이 나란히 붙습니다만, 사진을 기록하는 예술로 끌어올리는 사진쟁이는 한국땅에 몇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 한국땅에서 사진을 하는 분들은 '기록'이나마 제대로 하고 있을까요? '예술'이라도 제대로 하고 있을까요? 기록도 예술도 아닌 사진을, 그냥저냥 사진이라는 허울만 뒤집어쓴 채 놀음놀이에 빠져 있지는 않을까요?

《지울 수 없는 이미지 2》을 사둔 지 퍽 되었으나 책을 제대로 펼칠 겨를이 없이 지냈습니다. 책상맡에 두기는 했으나 펼치지 못한 채 두 해 가까이 먼지만 먹이고 있었습니다. 세 시간 남짓 비를 맞고 골목마실을 하며 사진찍기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이 사진책이 보여 다른 일을 젖혀 놓고 한참 여러 번 들여다보았습니다. 이 사진책을 그러께 처음 장만하던 때 보기는 보았겠지만 그때에는 저 스스로 샅샅이 읽어내면서 받아들일 만한 가슴이 못 되었다고 느낍니다. 이렇게 이태를 흘려보내며 골목동네 사람으로 살아온 다음에 비로소 읽어낼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새삼스럽게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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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사진. 이곳이 인천 어디일까를 가늠해 보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 박도/눈빛


《지울 수 없는 이미지 2》에는 '인천' 모습을 담은 사진이 꽤 많이 실려 있습니다. 아마 이 책에 싣지 못한 인천 예전 모습은 훨씬 많으리라 봅니다. 그도 그럴 까닭이, 미군은 인천을 거쳐 서울로 들어섰으며, 인천에는 대단히 큰 미군부대가 있었으니까요. 요사이야 다른 데에도 미군부대가 엄청나게 많지만, 이무렵을 떠올리면 '서울로 들어서는 문이요 서울을 지키는 문'인 인천이다 보니, 인천에서 미군이 오락가락하며 담은 사진은 따로 한 권으로 묶어도 될 만큼 되지 않으랴 싶습니다.

그러나 그뿐입니다. 인천시 문화부 일을 맡은 공무원은 이 사진책을 알아보지 않습니다. 인천문화재단 공무원 또한 이 사진책을 헤아리지 않습니다. 인천에서 지역학을 한다는 교수님 또한 이 사진책을 껴안지 않습니다. 인천에서 사진을 하고 역사를 하고 무어를 하고 한다는 지식인과 예술인 또한 이 사진책을 보듬지 않습니다.

사진책에 실려 있는 '온통 나무전봇대가 줄을 잇는 저 동네'는 인천 어디메일까를 한참 떠올려 보지만 떠오르지 않습니다. 1950년대 인천은 매우 좁기 때문에 어딘지 어림은 되나 제대로 짚이지 않습니다. 모르기는 몰라도 2009년까지 인천 옛 도심지에 남아 있는 나무전봇대 가운데에는 이때 1950년대에 일찌감치 박아 놓은 녀석들이 비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면서 여태껏 살아낸 녀석일 수 있습니다. 뭐, 꽤나 많은 집들은 쉰 해나 예순 해 역사를 아무렇지 않게 간직하고 있으니까요.

처음부터 끝까지 세 번 찬찬히 읽은 다음 덮습니다. 이제 책꽂이 잘 보이는 자리에 곱게 꽂아 놓습니다. 박도 할아버지가 이 책이름을 지었는지 출판사 편집자나 사장이 붙였는지 모르나, "지울 수 없는 이미지"라는 이름이 무척 잘 어울립니다. 참말로 지울 수 없는 모습들입니다. 잊을 수 있으나 지울 수 없는 모습들입니다. 모른 척할 수 있으나 지울 수 없는 모습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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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사진. 우리한테 지울 수 없는 모습이 담긴 사진책입니다. ⓒ 박도/눈빛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오늘 우리 삶자락을 꾸밈없이 사진으로 적바림해 놓고 있지 않다고 하여도 오늘 우리 모습은 어떻게도 지울 수 없고 감출 수 없고 꾸밀 수 없고 버릴 수 없습니다. 멋진 모습이건 훌륭한 모습이건 더 내세울 수 없으며, 못난 모습이건 모자란 모습이건 뒤에 꿍쳐 놓을 수 없습니다. 모두 우리 모습입니다. 모두 우리 삶입니다. 모두 우리 이야기입니다.

이 나라 사진쟁이가 이 나라 삶자락을 있는 그대로 사진에 여미어 내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 삶은 그예 우리 삶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손으로 우리 삶을 담아내지 못하고,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두 권에 담긴 모습처럼 '딴 나라 사람 손'에 담기는 우리 모습이 될 텐데, 이러하든 저러하든 우리 삶은 우리 삶입니다. 슬픈 일이지만 앞으로 2059년이 되면, 2009년을 돌아보는 사진자료를 그러모을 때 한국 사진쟁이 손으로 담은 사진은 한 장조차 없이 '딴 나라 사람 손'으로 담은 사진만 죽 그러모아서 "2059년판 지울 수 없는 이미지"가 나오지 않으랴 싶습니다. 걱정이 아닌 참모습이요, 슬픔을 넘어 헛웃음입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지울 수 없는 이미지 2 - 한국전쟁에 휩싸인 사람들

박도 옮김,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NARA) 사진,
눈빛, 2006


#사진 #사진책 #사진찍기 #책읽기 #사진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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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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