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K연쇄살인] 괴물이 되지 않도록 항시 경계해야

김갑수 통일추리소설 BK연쇄살인사건 (38회) 단상(斷想)

등록 2009.11.15 10:03수정 2009.11.15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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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발톱만 따로 지문 검사를 해 보셨냐는 겁니다."

이번에는 유천일이 자신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실례지만 진공금속채취기가 있으신지요?"

유천일이 머뭇거리자 안동준이 대신 대답했다.

"없습니다."

조수경이 말한 방법은 증거물을 진공 상태의 통에 넣고 금과 아연을 증발시켜 증거물에 입힘으로써 유류 지문을 현출하는 방법이었다. 그것은 매끄럽고 딱딱한 표면에 있는 지문을 채취하는 데 효과적이며 오래된 지문도 현출이 가능한 방법이었다.

조수경은 사체의 손발톱을 모두 모아 서울로 보내 지문 채취를 다시 해 보자고 제안했다. 유천일이 안동준의 얼굴을 살피자 그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그들은 사체들의 손발톱을 인민배우의 몸에서 채취된 범인의 정액과 함께 서울로 보내는 데 합의했다.


조수경은 왠지 그들의 손발톱에서 뭐라도 나오리라고 직감하고 있었다. 북한의 과학 수사가 의외로 낮은 수준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인민배우를 제외한 다른 희생자에게서 지문 등의 증거물을 찾아내는 데 성공한다면 그것은 수사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우선 범행이 동일범의 소행인지 아닌지, 아니라면 대략 몇 사람의 소행인지를 가려낼 수 있게 되는 일이었다.

조수경은 어프로치 연습을 마치고 아이언 5번을 꺼내 들었다. 그녀는 두세 번 빈 스윙을 해 본 후 풀샷으로 공을 힘차게 날렸다. 공은 한가운데로 똑바로 날아가 강물에 떨어졌다. 그녀는 10여 차례 더 아이언 샷을 해 보았다. 이어서 그녀는 드라이버로 채를 바꿨다.

'서울에서 뭐라도 하나 나오기만 한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사건을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그녀는 드라이버로 호쾌하게 공을 날렸다. 공이 까마득하게 날아가자 옆에서 보던 서양인이"굿 샷!"이라고 소리를 냈다. 조수경은 이마의 땀을 닦았다.

국가 안전보위부 간부 이상준은 부검 결과 독살로 판명 났다고 했다. 간과 비장에서 즉사량의 시산화칼륨이 검출되었다는 것이다. 이른바 청산가리였다. 범인은 희생자가 먹는 식음료에 독물을 섞었을 터이었다.

인민배우는 자신의 스타킹으로 목이 졸려 죽었다. 그녀의 목이나 스타킹에 아무런 지문이나 모발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범인은 장갑을 착용하고 범행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범인은 외모가 뛰어난 여자를 보고 성적 충동을 느낀 것이었다. 그는 교육 받았거나 계획한 대로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가 여인을 교살한 후, 갑자기 성충동이 일어난 것을 보면 그는 이상 성 증세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만약 그가 범행에서 체험한 쾌감을 잊지 못해 또 발작한다면 그는 연쇄살인범이 될 확률이 높다고 할 수 있었다.

조수경은 그가 다시 한 번 범행을 한다면 잡을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다가 스스로 놀라고 말았다. 그 놀람은 은밀하고 뚜렷하게 그녀의 내부에 들어차고 있었다. 수사관이 어서 범인을 잡아 범행을 미연에 방지할 생각은 안 하고 한 차례 더 범행이 저질러지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비열하고 기회주의적인 태도라는 생각이 치밀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지막 공을 날린 후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러고는 강력범죄 수사관들에게 전래되는 경구 하나를 떠올렸다. 그것은 프리드리히 니체가 남긴 말이었다.

-네가 깊은 구렁을 내려다보면 그 구렁 역시 너를 바라본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자신 또한 괴물이 되지 않도록 항시 경계해야 한다.

조수경은 국가안전보위부 간부 이상준의 경우, 의외로 쉽게 실마리가 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그는 납치되지 않고 독살되었다. 그의 주변에는 언제나 군인들이 머물렀을 터이었다. 그는 독신이었는데 그의 사택에는 경비병이 상주했다고 했다. 그것은 범인이 어쩔 수 없이 독살을 선택한 이유라고 볼 수 있었다. 그를 아는 누군가가 음료수 같은 것에 독약을 넣어 그에게 권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다음 날부터 조수경은 김인철과 함께 인민보안성으로 출근했다. 안동준이 그들을 5층으로 안내했다. 두 사람을 위해 전용 사무실과 책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조수경은 자리에 앉아 창 밖을 내다보았다. 깨끗한 거리와 푸른 숲이 보이는 자리였다.

조수경이 안동준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전망이 훌륭합니다."
"조 총경님께 죄송한 말씀 하나 드리겠습니다. 위생실 사용하기가 조금 불편하실 겁니다."
"위생실이라고요?"
"네. 여자 위생실은 1층에만 있습니다."

조수경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김인철이 말했다.

"선배님, 화장실을 말하는 겁니다."

조금 후에 유천일이 나타났다. 네 사람은 오랫동안 수사 방향을 논의했다. 안동준에 의하면 북한에서 일반인이 청산가리를 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했다. 다만 국가안전보위부 같이 특수한 공작을 하는 사람들은 언제라도 자살할 수 있는 독극물을 상비한다고 했다.

정황으로 볼 때 이상준이 먹은 청산가리는 자신의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이상준의 사택을 정밀 점검할 필요가 있었다. 누군가가 그것을 꺼내 이상준에게 먹였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후배가 감식 장비를 가지고 함경도에 한 번 다녀와야 할 것 같아."
"이상준의 사무실을 점검하라는 뜻이지요?"
"분명히 단서가 될 만한 족적이나 잠재지문이 있을 거야. 단 제라찐과 실리콘도 가져가야 할 거야."

제라찐 전사법이나 실리콘 러버법은 범인의 족적을 비롯한 일체의 흔적을 찾아내는 최신 방법이었다. 이 방법을 쓰면 마룻바닥이나 비닐장판, 콘크리트 바닥, 가전제품 등에 묻은 흔적을 찾아내기가 쉬웠다.

함경도 이상준의 사택에는 김인철과 안동준이 가기로 했다.

"선배님은 며칠 혼자 계셔야 하겠군요?"
"서울과 연락도 해야 하고 만나 볼 사람도 있어."

조수경은 아브라함을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미스 조, 나 아브라함입니다."

어제 전화를 받았을 때 조수경은 그가 미국에서 전화를 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뜻밖에도 평양에 와 있다고 말했다.

"고려호텔입니다."

순간 조수경은 엉뚱하게도 아브라함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범인은 남북한을 오갈 수 있는 실력자이다.

조수경은 고려호텔 커피숍에서 아브라함을 만났다. 그는 호텔 현관에 차를 대기시켜 놓았다고 말했다.

"미스 조가 시간이 된다면 옥류관에 가서 냉면을 먹는 게 어떻겠소?"

차에 오른 조수경은 기침을 했다. 아브라함의 향수 때문이었다. 아브라함이 창문을 조금 열면서 말했다.

"미스 조를 만나기에 향수를 안 하고 나왔는데 차에 잔향이 있었던 모양이군요?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문제지요."
#인민보안성 #고려호텔 #괴물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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