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에 천 권 읽기, 또는 한 권 읽기

[책이 있는 삶 123] 나는 책을 어떻게 읽어 왔는가

등록 2009.12.18 11:51수정 2009.12.18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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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한 해에 천 권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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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쓴 다섯째 낱권책입니다. 이제까지 나온 책보다 앞으로 나올 책에 더 마음을 쏟아야겠지만, 책이 나온 날 하루는 그저 마음을 놓고 쉬고 싶습니다. ⓒ 호미

제가 쓴 다섯째 낱권책입니다. 이제까지 나온 책보다 앞으로 나올 책에 더 마음을 쏟아야겠지만, 책이 나온 날 하루는 그저 마음을 놓고 쉬고 싶습니다. ⓒ 호미

보름쯤 앞서 퍽 늦은 밤, 서울 신촌에서 택시를 타고 인천으로 돌아왔습니다. 택시삯은 4만 2천 원이 나옵니다. 서울에서 인천까지 택시로 달려 본 일이 또 있었나 헤아려 보니 국민학교 다니던 아주 어릴 때가 떠오릅니다.

 

1980년대 첫무렵에 아버지 어머니 형 나까지 네 식구는 서울에 있는 작은아버지 댁에 들르고 인천으로 돌아오는데 서울역에서 막차가 끊어져 하는 수 없이 택시로 달렸습니다.

 

이무렵에 서울에서 인천으로 총알택시로 돌아오는 삯이 2만 원인가 3만 원쯤 아니었느냐 싶습니다. 이무렵 2만 원과 어젯밤 4만 원은 몹시 다릅니다. 어떻게 보면 택시삯이 그리 안 올랐다 여길 수 있고, 달리 보면 오늘날 여느 사람들 살림살이가 썩 나아지기 어렵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스물 몇 해 만에 택시에 몸을 싣고 서울에서 인천으로 돌아오면서 '끔찍한 지옥철에 안 시달리고 이렇게 느긋하게 오갈' 수 있으니 더없이 많은 사람들이 자가용을 끌며 고속도로를 내달리겠구나 싶습니다. 잔뜩 오른 술기운에 해롱거리면서도 '자가용과 헤어지지 못하'는 사람들이 딱하다고 느낍니다.

 

젊은 일꾼이 모는 택시는 배다리 헌책방골목 어귀에서 멈춥니다. 더 가서 집에서 내리면 한결 나을 테지만, 여기까지 오니 집으로는 걸어가고 싶습니다. 택시삯으로 4만 2천 원이나 치르는 주제에 집까지 달리면 더 나올 1천 원을 아깝다고 생각합니다. 참 바보스러운 모습이라고 홀로 생각을 하면서 무거운 가방을 끙끙거리며 짊어지고 걷습니다. 이날은 저한테 다섯 번째 낱권책인 <생각하는 글쓰기>(호미)가 막 나온 날이라, 이 책을 펴내 준 분들하고 즐겁게 술잔을 기울였거든요. 가방에는 막 나온 따끈따끈한 책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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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퍼키스와의 대화>라는 얇은 책. 올해 나온 책 가운데 무척 돋보이는 '얇으면서 안 얇은' 책입니다. ⓒ 안목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라는 얇은 책. 올해 나온 책 가운데 무척 돋보이는 '얇으면서 안 얇은' 책입니다. ⓒ 안목

땀을 쪽 빼며 집에 닿으니 쓰러지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쓰러지지 않고 가방에서 책을 하나 꺼냅니다. 어제 나와서 받은 책 가운데 가장 깨끗한 녀석을 골라 출판사 이름이 새겨진 봉투에 넣어 잠들어 있는 옆지기를 살며시 깨운 뒤 "여보, 드디어 남편이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이 나왔어요." 하고 내밀고는 아기 옆에 쓰러집니다. 밤새 아기 기저귀 갈기는 고단한 옆지기가 해 줍니다.

 

이튿날 아침에 깨어나서 제 가방에 담긴 다른 책들인, 어제 서울 나들이를 하며 장만한 만화책 <터치> 9권과 10권을 꺼냅니다. 지난 밤 쌓인 기저귀를 빨아야 하는데, 빨래는 조금 뒤에 하자며 게으름을 부리고 만화책을 읽습니다.

 

아다치 미츠루 님 만화 <터치>는 11권에서 끝나는데, 어제 책방마실을 할 때에 11권은 일부러 안 샀습니다. 아끼며 야금야금 읽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아기하고 놀면서, 옆지기와 함께 아기한테 밥을 먹이며 만화책을 읽습니다.

 

옆지기는 남편 책을 읽어 줍니다. 어제 어울린 책마을 일꾼이 저한테 "최종규 씨는 한 해에 책을 몇 권쯤 읽어요?" 하고 물었을 때 "한 해에 천 권쯤은 사서 읽어요" 하고 말씀드리며, "뭐, 천 권을 읽는다지만, 저보다 훨씬 많이 읽는 분이 많은데요. 하루에 열 권이라도 읽을 수 있는데요. 저는 책으로 살고 책을 만들며 사니까요" 하고 덧붙입니다. 1월 1일부터 어제까지 사들인 책은 천 가지가 넘을 텐데, 올해 저한테 가장 돋보인 책은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안목)라는 아주 얇은 녀석입니다.

 

 ㄴ. 한 해에 한 권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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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좋았던 책을 여러 차례 곱씹습니다. 곱씹을수록 새맛이 나기 때문입니다. ⓒ 리수

읽고 좋았던 책을 여러 차례 곱씹습니다. 곱씹을수록 새맛이 나기 때문입니다. ⓒ 리수

조그마한 목숨이 인형이나 그림책이나 연필을 한손에 쥐고는 다가와 아빠 무르팍에 털썩 앉습니다. 조그마한 목숨은 아빠가 인형놀이 해 주기를 바라고, 그림책을 한 장씩 넘기며 읽어 주기를 바랍니다. 연필로 그림을 그려 주기를 바라며, 곁에서 함께 놀아 주기를 바랍니다.

 

아미쉬 사람들 이야기를 담은 책 <임세근-단순하고 소박한 삶>(리수,2009)을 읽으면, "가족이 모두 모여 세 끼 식사를 함께하는 것을 가정생활의 기본으로 삼고 있는 아미쉬 가정에서 가장이 도시락을 들고 나가 하루 종일 가족과 떨어져 있는 것 자체가 문제를 야기하는 원인이라고 보는 것이다.

 

농사일을 하면서 어린 자녀를 데리고 다니고, 텃밭을 일구는 어린 딸아이에게 호미를 쥐어 주어야 할 아빠와 엄마를 아미쉬 가정의 어린 자녀들로부터 빼앗아가기 때문이다(257쪽)"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아미쉬 집안이 아닌 우리 집안일 때에도 매한가지입니다. 집식구 가운데 누구 한 사람이 멀리 돈 벌러 나가며 오래도록 집을 비우면 이 집안은 식구들이 오붓하게 어울리며 사랑과 믿음을 나누기 힘듭니다.

 

세 끼니 밥 먹을 겨를뿐 아니라 하루 내내 서로 무엇을 하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야기를 나누기 벅찹니다. 서로서로 고단하니까요. 오늘날 우리 터전은 논밭일하고 멀어지며 회사나 공공기관에서 일자리를 얻는 쪽으로 크게 바뀌었습니다. 앞으로도 논밭일을 할 사람은 늘어나지 않으리라 보이며, 논밭일을 '우리 식구 조촐하게 먹고살 만큼 꾸리는 작은 살림'으로 이끌기란 더없이 어려우리라 봅니다. 지식을 넓히고 기술을 뽐내어 새로운 값어치를 일구어 내려고 하는 세상 흐름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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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권짜리 두툼한 이야기책 <지로 이야기> 1권 겉그림. 올해에 나온 책을 돌아보면, 이만 한 책이 생각 밖으로 퍽 드물지 않았나 싶습니다. ⓒ 양철북

세 권짜리 두툼한 이야기책 <지로 이야기> 1권 겉그림. 올해에 나온 책을 돌아보면, 이만 한 책이 생각 밖으로 퍽 드물지 않았나 싶습니다. ⓒ 양철북

조그마한 목숨을 함께 돌보는 아빠는 몸과 마음이 몹시 아픈 엄마를 함께 보살필 틈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며 지냅니다. 지난 넉 달에 걸쳐 서울로 일을 나오며 새벽부터 밤까지 아기와 엄마를 집에 남겨 놓았기 때문입니다.

 

더 보살핌을 받아야 할 사람들을 나란히 남겨 두면서 일을 나가야 하는 아빠는 돈 버는 일이 썩 내키지 않았습니다. 아니, 더 많은 돈을 벌도록 해 준다는 일이 조금도 반갑지 않습니다.

 

우리 식구한테는 그날그날 먹고살 수 있을 만한 벌이면 넉넉하기 때문입니다. 집삯을 내고 밥값을 대면서 때때로 책 한 권 장만하여 읽을 수 있으면 기쁘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은 자신들이 아이들의 세계를 규정한다고 믿지만 어른들의 세계에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언제나 아이들이다.(1권 606쪽)" 세 권짜리 <지로 이야기>를 쓴 시모무라 고진이라는 일본사람은 이야기 사이사이에 당신이 보내 온 삶에 굵게 마디진 깨달음을 살며시 끼워넣습니다.

 

어쩌면 깨달음이라기보다 어린 날부터 온몸과 온마음으로 받아들인 넋이라 할 만할 텐데, 우리 가운데 '어른과 아이 사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느낍니다. 다만, 알고는 있되 몸으로 옮기지 않으며, 알고 있다고 여기며 내 삶으로 삭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아기 아빠인 저는 아기 아빠이자 한 사람을 서로 보살필 옆지기로서 제 몫을 알맞게 해 오지 못했습니다. 천 가지 책을 읽고 만 가지 책을 살폈다 하더라도 한 사람 삶을 덜 읽거나 못 읽었을 뿐 아니라, 가슴으로 껴안고 삼키는 몫에 게을렀습니다. 더 많은 돈을 바라지 않는다면 마땅히 더 너른 사랑을 바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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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는 하루 내내 놀기에 바쁘며, 아빠 엄마 흉내를 내며 책 들여다보기도 하느라 부산합니다. ⓒ 최종규

아기는 하루 내내 놀기에 바쁘며, 아빠 엄마 흉내를 내며 책 들여다보기도 하느라 부산합니다. ⓒ 최종규

덧붙이는 글 | - 이 글은 <시민사회신문>에 함께 싣습니다.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2009.12.18 11:51 ⓒ 2009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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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글쓰기 - 내 마음을 살리는 말 한 마디

최종규 지음,
호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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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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