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도 쓸쓸해? 손톱 깎아줄게

손톱으로 만나는 서정

등록 2010.01.04 11:34수정 2010.01.19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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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주는 중압감 때문인가 보다. 뭔가 해야 할 일이 있는데 하고 싶지가 않다.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사실은 애매하다. '이렇게' 생각하면 시급하게 얼른 해야 할 일이고, '저렇게' 생각하면 아무 중요할 이유가 없는, 시시하기 짝이 없는 일이어서 빈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다는 느낌이 되어 버린다.


이런 때는, 이렇게도 뒤숭숭하고 누구 찾아올 사람도 없으면서 있는 것처럼 앉았다 일어섰다가,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서 읽히지도 않는 책을 빼 들었다가 도로 꽂으며 남몰래 한숨이나 쉬어대는 시간에는 손톱을 깎아야 한다. 어제 이미 깎은 손톱이라 해도, 한 번 더 만지작거리며 내 몸에 드러난 각질을 느끼고 있노라면 바람난 마음이 어느덧 차분하게 제자리를 찾는다.

도시의 작은 셋방에서 비 오는 날 손톱을 깎고 있노라면, 안 그래도 작은 내가 더 한층 작아진다는 느낌이어서 금방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마당이 널찍한 시골로 온 뒤로는 그런 느낌이 아마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손톱을 깎으면서도 그 일에 집중적으로 몰입하지 않고, 가끔 귀에 들리는 새소리에 관심을 갖기도 하고 하늘을 쳐다보는 등 딴짓을 해대는 동안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이름 모를 슬픔이 그만 스스로 물러나 버리는 것이다.

"엄마도 쓸쓸해? 손톱 깎아줄까?"
"응? 응, 그려."

어머니는 마치 오래 전부터 대기하고 있었던 것처럼 두 손을 쓱 내민다. 언제나 그렇다. 목욕을 하자 하면 언제나 한 번씩은 '아까 했다'는 식으로 몸을 빼지만 손톱 발톱은 다르다. 어디 무슨 소풍이라도 약속된 아이처럼 낙낙한 표정이 되어 두 손을 내밀고, 발톱도 깎아야 한다면서 양말을 벗었다가 금방 잊어먹고 도로 신기도 한다.

그렇게 양말을 벗었다가 다시 신고 나면, 놀랍게도 어머니는 그 사이에 벌써 손톱이랑 발톱이랑 모두 깎았다는 듯이 무연하게 텔레비전을 응시한다. 아들이 기구를 들고 다가앉아서 손가락을 잡으면, 그제야 다시 손톱을 기억해내고는 낙낙한 표정이 되어 손이 너무 반질하고 깨끗해서 창피스럽다는 등 수다스러워진다. 이럴 때는 가끔, 늘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아주 가끔, 나도 치매에나 걸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또한 먹먹하게도, 어머니 손톱은 깎이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내 손톱은 잘라질 때 느낌이 약간은 부드럽고 그리 멀리 날아가지 않지만, 어머니 손톱은 마치 돌이라도 자르는 것처럼 깎이는 순간 부스러지거나 아니면 톡 튀어서 찾아내기 어려운 곳까지 멀리 날아가 버리곤 한다. 체내 수분이 그만큼 적어졌다는 증거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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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너무나 반들해진 어머니의 손 ⓒ 김수복


손톱이나 발톱에 흥미를 갖고 들여다본 지도 꽤 오래 되었다. 손에는 손톱이 있고, 발에는 발톱이 있으며, 머리에는 머리카락이 있는데 귀에는 왜 아무런 보호 장치도 없나,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놓고 밤잠을 못 잔 시절도 있었다. 그때 찾은 답이라는 것이 이렇다.

머리는 단독으로 헤딩 같은 것을 할 수 있고, 발도 단독으로 뭔가를 할 수 있으며, 손도 역시 능동적으로 뭔가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부속이지만, 귀는 절대로 단독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오직 들어오는 것만을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기관이기 때문에 별도 방어기제가 필요치 않다는, 지금 생각하면 입에서 절로 피식 소리가 나오는 해답이지만, 그때는 사뭇 위대한 발견이라 여기며 우쭐대기도 했었다. 

먼 옛날, 인류의 직립보행을 전후한 시기에 손톱이나 발톱은 필경 공격과 방어에 유용한 무기였을 것이다. 식량을 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연장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손톱을 깎다 보면 내가 마치 자발적으로 무장을 해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는 아무도 공격하지 않는다는, 공격할 이유도 없고 공격할 만한 적도 없다는 선언처럼 여겨진다. 그러니까 손톱을 깎는 행위에서 느끼는 안정감은 어쩌면, 순수하게 더불어 살고 싶다는 욕망(?)의 충족에서 오는 편안감인지도 모르겠다.

싸워야 할 적도 많고, 보여야 할 위엄도 많았던 고대 왕들은 손톱을 치장하는 일에 상당히 많은 공력을 들였던 것 같다. 특히 이집트의 파라오나 중국의 황제들 이 손톱을 어떤 상징으로 활용했는가는 남아 있는 여러 형태의 그림들이 잘 말해주고 있다. 네일숍을 찾는 현대의 수많은 선남선녀들은 바로 그 왕의 후손들인지도 모른다. 하긴 핏줄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누구인들 왕가와 인연 없는 사람이 있으랴. 하다못해 단군할아버지의 후손이라는 공인(?)된 문헌을 증거로 제출할 수도 있겠으니 말이다.

어머니가 젊었던 시절에 손톱은 분명 하나의 훌륭한 연장이었다. 이가 많았던 시절에는 서캐와 이를 툭 툭 눌러서 죽이는 무기이기도 했다. 무기나 연장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지 않더라도, 손톱이든 발톱이든 굳이 따로 시간을 내어 깎을 필요가 없었다. 밭에서, 논에서, 산에서 하루 종일 일을 하다 보면 손톱이든 발톱이든 절로 닳아서 없어졌다.

손톱이 그렇거늘 손인들 깨끗하고 매끄러울 리 없었다. 농번기 내내 혹사를 당한 손등은 겨울이면 쩍쩍 갈라져서 피가 비쳤다. 서울로 시집간 고모나 사촌 누나들이 이따금 사다 주는 콜드크림 같은 것들은 화장품이라기보다 갈라진 손등을 치유하는 약품으로나 유용하게 쓰였다.

그렇게 훈련되고, 그렇게 길이 들여진 어머니는 손이 험한 것을 부끄러워하기보다는 오히려 깨끗해지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자식들이 어쩌다 어머니 손이 너무 험해서 창피하다고 투정이라도 부릴라치면 어머니는 한동안 말없이 하늘을 쳐다보곤 했다. 그리고는 정말로 창피한 것은 손이 아니라 마음이 더러워지는 것이라고, 큰소리도 아니고 나직한 목소리로 가만히 마치 혼자서 중얼거리듯이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손발이 터서 갈라지고 핏기가 비친다는 것은 놀지 않고 일을 한다는 것이고, 놀지 않고 일을 한다는 것은 아프지 않고 건강하다는 것이며, 아프지 않고 건강하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관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손발이 험하다는 것은 도둑질이나 사기질에는 관심도 없고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증거인 것이니, 꿈에서라도 부끄러워 할 일은 아니고 자랑스러워 할 일이라는 어머니의 일관된 주장 앞에서 자식들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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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지고 부르튼 험한 손이 아닌 대신 이제는 손가락 관절이 옆으로 휘어졌다. ⓒ 김수복


6년 전이었다. 심장에 이상이 생겨 수술을 받고 육 개월여 동안 아파트 생활을 해야만 했던 어머니는 하루에도 열두 번씩 당신의 손을 골똘히 들여다보곤 했다. 자식들은 생전 처음 어머니의 손이 사람 손 같아졌다고 즐거워했지만, 어머니는 금방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당신 스스로가 한심해서 견딜 수 없다는 듯 입술을 삐죽거리며 짧게 한 마디 하시곤 하는데 그 내용이 사뭇 충격적이었다.

"농사꾼은 농사꾼 손이 있는 것인디, 나는 인제 농사꾼도 못 되고 어쩔까."

어머니의 그 말씀을 듣고 새삼스럽게도,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었다. 아름다움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앎+다움이라는 케케묵은 생각을. 그랬다. 어머니에게 있어 아름다움이란 자기가 지금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가를 명확하게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당신 손이 깨끗하게 윤기가 흐르는 것을 못마땅해 하고 미안스러워 하면서도, 며느리나 조카며느리의 손은 또 예쁘다고, 어떻게 이렇게 예쁠 수도 있는지 모르겠다고 감탄을 아끼지 않는 어머니이고 보면, 확실히 어머니에게는 고루한 인습이라거나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다고 말할 수만은 없는 뭔가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어머니는, 당신의 손이 깨끗해졌다는 것을 창피해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자랑스러워 하지도 않는다. 어머니는 다만, 손톱을 깎는 그 시간을 즐길 뿐이다. 아들이 어머니의 손을 잡고, 톡, 톡, 그렇게 소리를 내는 그 순간의 느낌을, 마무리를 할 때의 살짝 간지러운 느낌을, 그 친밀감을, 유대감을 느끼며 사르르 눈을 감고 입가에 미소를 띤 채로 금방 잠이라도 들 것 같아지는 것이다.

어머니의 그런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문득, 문득, 이제는 지워져 버린 내 발자국이 떠오르기도 한다. 내게도 한때 아내가 있었다는 것이, 오 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몇 번인가, 두 번인가 세 번인가(음, 이 정도뿐이었나) 깎아준 적이 있었다는, 그때의 그림이 눈앞에 어렴풋이 잡히기도 한다.

그런데 왜 서너 번 밖에 안 되는 것일까. 오 개월이라면 짧다 해도 날 수가 있는데 그 많은 날들을 무엇으로 소모했던 것일까. 이런, 이런 바보 같으니,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 이런 식으로 내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손톱을, 발톱을 깎는다는 것은 이렇게도, 아주 뜻밖의 진한 서정을 발견하는 시간이기도 한 것이니, 그러니 어찌 이 손에 손톱이 있다는 것을 감사하지 않을 수 있으랴. 
#손톱 #서정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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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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