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대신 호미 들고 밭에 간다

등록 2010.02.24 10:47수정 2010.02.24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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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은 나 홀로 서기가 시작된 해였다. 직장인으로 별 탈이 없이 살았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은 IMF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깨져버렸다. 회사에서는 인원의 반을 감원한다는 목표로 남아야 할 사람과 나가야 할 사람을 가리는 방법은 간단했다. 맞벌이 부부는 정리 1순위였다. 한 사람이라도 벌 수 있으면 형편이 나은 것 아니냐는 논리였던 것 같다. 그렇게 해서 부부는 각자의 회사에서 맞벌이라는 이유로 정리되었다.


몇 달간 실업급여를 받으며 새 직장을 구하느라 무던히도 애썼던 기억이 난다. 면접 때마다 학벌과 경력이 만만치 않은 이들과 나란히 앉아 있는 것으로도 반쯤은 포기도 했었다. 어쨌든 경력사원으로 재취업이 되었지만, 회사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더구나 인터넷이 결합한 신기술에 적응해야 하는 일은 진땀이 났다. 그동안 기술이랍시고 배웠던 것들은 구석기시대의 돌도끼가 돼버린 느낌이었다. 결정은 확실했다. 이번에는 내가 회사를 정리하고 독립을 하겠다며 새천년의 시작을 앞두고 사표를 냈다.

말은 사업하겠노라고 했지만, 자본도 기술도 내세울 게 하나도 없었다. 당시 벤처기업이 떠오르면서 소호(SOHO,Small Office Home Office)라는 소규모의 회사창업이 유행하기도 했는데, 대부분이 IT에 기반을 둔 사업이라서 나와는 거리가 멀었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는데, 우연하게 펼쳐든 컴퓨터 잡지에서 컴퓨터튜닝이라는 외국의 기사를 보고는 머리가 번쩍했다. 그 분야는 전혀 모르는데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과 함께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해야만 성공 가능성이 높아 보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방 하나를 작업실로 이용하며 기술개발(?)에 몰두했다. 사용하고 있던 컴퓨터를 무소음으로 만들겠다며 스펀지와 스티로폼으로 내부를 도배했다. 결과는 조용했지만, 보온밥통이 된 컴퓨터는 높은 열 때문에 멈추었다. 중앙처리장치(CPU)의 성능을 높이기 위한 오버클록(OVER-CLOCK) 기술을 시도하느라 값비싼 CPU는 중고를 사들여 최대 클록을 높이는 개조를 하다가 칩을 태워 먹는 일도 수차례나 되었다.

결국, 내부 부품의 성능을 높이는 개조작업은 포기하고, 컴퓨터 내부가 보이도록 케이스의 옆판을 절단하고 투명한 아크릴로 교체하는 상품을 만드는데 까지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1년여의 시간을 보낸 후에야 정식으로 사업자등록을 하고 쇼핑홈페이지를 열게 되었다. 10주년을 맞은 오마이뉴스와의 인연도 그때부터 시작되어 회사 상호와 도메인 이름도 똑같이 오마이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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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D를 이용하여 직접 제작한 칼라팬은 대박 이였다. ⓒ 오창균

1500만원의 창업대출을 받아서 시작한 3평짜리 작업장에서 첫 주문은 한 달 만에 들어왔다. 그 후로도 한 달에 서너 건 정도의 매출은 점심값도 안되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라서 튜닝외에도 틈틈이 컴퓨터조립으로 월세라도 보태고 있었지만, 1년 만에 대출받은 돈은 바닥이 났다.


주문은 없어도 튜닝에 대한 매력에 푹 빠져 있던 때라서 이것저것 만들어 실험도 하며 바쁘게 지내느라 무기력할 틈도 없었다. 국내에는 튜닝상품이라고 할만한 것들이 없던 때라서 외국 사이트를 많이 참고하며 만들어봤는데, 그중에 LED(발광다이오드)를 이용한 칼라쿨링팬이 큰 성공을 거뒀다. 이후, 알음알음 입소문을 타면서 튜닝전문업체로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3~4년은 거의 점심때도 없이 늦은 밤까지 일만 했었다. 외주거래처도 고정적으로 일감을 주었고, 막내동생이 1년 정도는 일을 돕기도 했다. 국내외의 업체에서 제휴하자는 제안도 들어왔지만 거절을 하고, 언론에서도 몇 차례 취재협조가 있었지만 거절했던 것은 처음부터 1인 기업 체제를 유지하겠다는 뚱딴지같은 결심이 있었기에 혹시나 일이 커지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한창 잘 될 때에는 좀 더 확장을 하거나 용산 컴퓨터상가에도 판매점을 만드는 것을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욕심낼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컴퓨터 튜닝을 내세운 업체들도 속속 생겨나면서 국내의 튜닝시장도 번성하는가 싶더니 반짝 특수에 끝나고 컴퓨터업종의 불경기까지 겹치면서 수익성도 악화하여 하나둘씩 소리없이 사라져 버렸다. 10년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처음부터 혼자 할 수 있는 정도의 일이면 만족하겠다는 소신이 있었기 때문인것 같다.


올해로 10년, 지난 2월 23일에 사업자폐업 신고를 했다. 국세청 홈페이지에서 클릭 몇 번만으로 간단히 끝나버린 것에 조금은 허탈했다. 직접 세무서를 방문하여서 했더라면 어떤 감정의 동요라도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이제는 그만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을 한 것은, 지난 10년간 컴퓨터의 변화발전은 튜닝이 크게 필요하지 않을 만큼이 되었고, 일이 일로만 느껴지는 무기력과 함께 처음처럼의 열정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다음 일을 생각하면서 폐업을 예상한 것은 2년 전 쯤이다.

10년 전으로 다시 돌아가보면, IMF위기때 많은 이들이 자의반 타의반 귀농대열에 들어섰다. 그 당시 나도 귀농으로 인생의 전환점을 찾아보고자 했었지만, 아내의 강력반대로 포기했었다. 지금 돌아보면 준비 없는 귀농은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컸고, 아내의 생각이 옳았다. 같이 귀농을 약속했던 친구는 가족 모두가 농촌으로 떠났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등 몇 차례의 어려움 속에서 지금은 강원도 화천에 정착했다.

농업을 인생의 마지막 직업으로 결정하고서 관련단체나 책을 통해서 틈틈이 귀농준비를 하는 중에 도시농업을 알게 되면서 농사는 농촌에서나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깨지는 계기가 되었다. 도시농부학교에서 본격적인 농사법을 배웠고, 옥상의 남는 공간을 이용해서 작은 텃밭과 스티로폼 상자를 재활용하거나 근교의 주말 텃밭에서 농사를 시작한 지 1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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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의 빈공간을 이용하여 만든 텃밭. ⓒ 오창균


얼마 전에는 생태텃밭강사 교육과정을 마치고, 유치원과 학교에서 텃밭수업도 진행하고, 생태텃밭 교육을 위한 농장을 만드는 농사일도 부지런히 해야 한다. 누군가는 농사로 어떻게 먹고 살려고 하느냐며 걱정을 하지만 진짜로 먹고 살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농사를 해야 한다는 신념이 생겼고, 나 자신을 믿는다.

덧붙이는 글 | '2000년의 나, 2010년의 나' 응모글


덧붙이는 글 '2000년의 나, 2010년의 나' 응모글
#도시농업 #튜닝 #컴퓨터 #귀농 #텃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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