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각대장 중학생,10년이 지나고 나니...

[공모- 2000년의 나, 2010년의 나] 스펙터클하게 바뀐 건 없지만

등록 2010.03.04 17:19수정 2010.03.04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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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다음날 학교가기 전에 뜨신 밥 먹는 학생이었을 뿐


푸르른 동산, 드넓은 운동장, 봄이면 흐드러지게 피는 벚꽃 속에서 붉은 볼에 살며시 미소 짓는 청순한 여중생이었다. 이른 나이에 김주열군 뺨치도록 정치의식도 투철하여 일찍부터 사회 운동에 투신했으며 주변 교우들과의 사이 또한 돈독했다…라고 회상하면 좋겠는데, 결론을 말하자면 10년 전이 나는 앞에 늘어놓은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냥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 가고, 조용히 앉아 있고, 숙제 안 하면 벌 받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지각해서 고등학교 입학식 때도 중학교 학생 주임 선생님께 맞은 종아리 붓기가 안 가라앉았다는 것 정도. 뭔가 특별한 일을 굳이 따지자면, 다른 사람보다 머리가 약간 컸던 중 1때 담임을 3년간 짝사랑했다는 사실 외에는(그때 복도에서 선생님 볼 때마다 으악! 소리를 지르며 도망간 건 선생님이 싫어서가 아니었고요) 생각나는 게 딱히 없다.

"역시 짝사랑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야! 동네에서 나가 다른 인생을 찾아보겠어!"를 소심하게 외치며 멀리 사대문 안에 있는 (전통만 오래된) 학교에 진학했지만 거기서도 별거 없었다. 여전히 친구 사귀는 데 서툴렀고, 만화를 읽으면서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학교 옥상에서 "이회창이 선거에 붙으면 안 돼. '옥탑방'이라는 말의 뜻을 모른다잖아"라며 친구와 선거 관련 대화를 나눈 거 말고는 딱히 이렇다 할 정치의식도 없었다.

어머니의 뉴스 즐겨찾기 목록에 <오마이뉴스>가 있었던 건 기억나지만, 당시 나는 뉴스란 따분한 것이라며 읽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된 날 엄마와 나는 함께 흥분했다. 엄마야 역사적 주관이 뚜렷한 상태였겠지만, 나는 마치 만화에서 적과 싸우는 주인공이 이긴 것과 비슷한 것이라고 상황을 받아들였다. "와, 파란 옷 입고 나오는 나쁜 놈들이 지고 노란색 옷을 입은 영웅이 이겼어!"(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정말 딱 여기까지였다)

어려서부터 "나는 왜 이렇게 모자랄까"라는 말을 소심한 마음 속에서 주억거리며 자기 비하하는 것만은 남들보다 특출(?)났다. 심지어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그 버릇만큼은 오래된 고민의 세월만큼이나 뿌리 깊게 박혀 있다. 대학교 때 와서야 내 외골수 성격을 받아준 배려심 두둑한 선배들(왜 전부 아저씨들인지는 모르겠다)을 만나 하나 둘씩 콤플렉스를 극복해갔지만,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에는 자기 비하가 마음속에 지닌 신념조차 회의하게 만드는 도돌이표가 되어 있었다.


10년 넘게 인생 과제로 붙들고 있는 인생의 화두는 "별 볼일 없을지라도 좋다. 너 자신은 충분히 사랑받을 가치가 있으니, 너 스스로 자신을 사랑하라"였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심지어 사회생활을 겪어내고 촛불을 들고 나간 그 순간까지, 이 화두는 단물 다 빠질 때까지 물에 넣는 다시마마냥 줄기차게 우려먹게 된다.

너 인생 제대로 한 번이라도 살아봤어? 안 해봤으면 말을 말어!

사교성 부족에 자의식 과잉이었던 나는, 막연히 제 취향이 독특하다는 생각에 "나는 남들과 달라. 무리지어 다니지 않고 직업도 작가가 되어 뭔가 다른 걸 추구해 보겠어"라고 단언하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심지어 남들은 취업 준비하느라 도서관에서 각종 공무원 교재를 붙들고 현실과 씨름할 때도, 난 뭔가 작가스러운 직업을 가질 거란 생각에 제대로 스펙하나 쌓은 게 없었다.

이렇게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아이 같이 겁 많은 사람으로 살아오다가, 우연히 작은 지역 신문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사회에서는 성격이 어눌하다고 봐주는 사람도, 너는 원래 그런 애구나 하며 맞춰주거나 피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사소한 언행에서부터 부딪히면서 사람들에게 나 자신에 대한 안 좋은 평가를 끊임없이 들어야 했다.

'주택 분양'이라는 개념도 없는데 동네 주택 분양 관련 총회에 참가해 조폭들이 일렬로 늘어선 현장에 간 적도 있다. "대통령 선거에 혁혁한 공을 세운 제군들 수고했다"며 모여든 해병전우회 정기 총회는 또 뭔고? 회사들이 공고에 명시한 출퇴근 시간이 '구라'라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일 주일도 안 걸렸다. 글로라도 어떻게든 먹고 살아야겠다며 후생 복지 따지지 않고 아무렇게나 지원서를 내 들어간 신문사에서 있던 건 단 3개월.

하지만 거기서 사회의 자질구레하고 이상한 장면을 많이 볼 수 있었다. 한 할머니가 철거 용역의 발에 짓밟힌 사건 때문에 시청 앞에서 집회가 벌어졌지만 그때 내가 취재하러 간 이벤트는 서울시 신청사 준공식이었다. 당연히 신문에는 삽으로 땅을 파는 멋들어진 모습만 나왔다.

회사 생활은 당연히 나와 맞지 않았다. 근데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해도 딱히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어린 시절, 나한테 맞는 삶의 모습을 상상으로만 그리며 살아온 자신이 처음으로 괘씸하게 느껴졌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이제껏 내가 아무 것도 할 줄 모른다는 사실만을 주억거리며 실없는 허무주의에 빠져 있었다.

아무리 재능 없어도 울먹거리며 손 놨던 10년 동안 그림 한 장이라도 그리고 글 한 줄이라도 제대로 써봤으면 자유 기고가라도 했겠다(누가 써줄지는 장담 못하지만)! 책을 읽더라도 생각 없이 볼 게 아니라 사회와 내 삶의 연관 관계를 생각하며 좀더 치열하게 읽어볼걸.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제껏 살아오면서 책을 마지막까지 읽어본 적도 거의 없었다. 난 무언가를 '하면서' 살아온 게 아니라 무언가를 하는 내 모습을 '상상만' 해왔을 뿐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느끼던 때, 나는 '촛불'과 만났다. 더불어 처음으로 삶의 현장 속에서 사람들의 생활 모습, 그들이 호흡하는 공기를 가까이서 느꼈다. 피부로 느껴지는 삶의 질감은 아무리 단순한 사건임에도 관념을 초월했다.

사람들은, 세상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남들은 이미 겪은 일일지 몰라도 내게는 너무나 생경한 경험이었다. 그 느낌을 우연한 기회에 <오마이뉴스>로 송고했고 내 글은 기사로 채택되었다. 덕분에 예전에는 사람과 단 몇 분 말 섞는 것도 힘들어했던 내가 사람들을 십 분 이상 말을 섞는 법을 터득했다. 조금씩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배워가면서 조금씩 타인을 배려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내 삶은 얼마나 바뀌었을까.

그래서 무엇이 바뀌었는가 하면...

아침이면 이제는 학교가 아닌 회사에 간다. 지하철까지 앉아서 가는 건 좋은데 버스로 갈아타면 사람이 미어터진다. 일본 드라마 <드래곤 사쿠라>를 보고 "나도 공부할 테다!!"라고 마음 먹고 나서 엉뚱하게 인문학 공부를 시작했다. 출퇴근길 험해서 딴 직장 가고 싶은데 이력서는 쓰는 족족 떨어진다. 취업도 만만하지 않구나. 내가 잘 하는 건 뭘까? 뭘 해먹고 사나? 검도 3단이긴 해도 이건 당장 돈벌이가 안 되는데. 역시 학교 다닐 때 전교 1등을 해야 했어.

인생이 뭔가 스펙터클하게 바뀔 줄 알았는데, 별 차이가 없다. 어릴 때와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젠 돈 벌 걱정까지 해야 한다.

그래도 얼마 전에는 한국 근현대사 관련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다. 출퇴근길에 자고 싶은 마음을 달래가며 한 달도 훨씬 넘게 걸렸다. '인문학 인생 역전'이라는 슬로건에 혹해서 생전 읽지도 보지도 못했던 인문학 책 읽기 모임에도 나간다. 비록 철학자라고 등장하는 칸트나 니체, 들뢰즈가 뭔 말 하는지는 하나도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알아먹는 말 몇 마디 정도는 나오겠지.

가끔 주말에 시간이 나면 집에 놀러온 남자친구를 재워두고 오마이뉴스에 송고할 기사도 쓴다. 사소하지만 조금씩 세상과 나 사이의 간격을 조금씩 좁혀나가려고 시도 중이다. 여전히 내가 뭘 잘하는 지, 뭐가 될지 잘 모르는 요즘 젊은이인 나. 그래도 10년이란 시간은 "너의 이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라고 언명했던 칸트의 말처럼 조금은 용기 있게 세상 속에 나를 드러내도록 만들어주었다. 모자라도 그 자체로 자신을 인정하고 하나둘 뭔가를 해나간다는 데 의미가 있다.

사실 지금 이 순간마저 "난 왜 이렇게 모자랄까"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지만 여하튼, 내 몸을 움직여 뭔가를 해나간다. 어떤 결실을 맺게 될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10년 후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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