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가톨릭보다 개신교도의 자살률이 높을까

[이 시대에 읽어야 할 명저⑨] 뒤르켐의 <자살론>으로 보는 자살의 원인과 해법

등록 2011.02.20 20:39수정 2011.03.11 11:20
0
원고료로 응원
자살 공화국, 대한민국의 자화상

통계청이 작년에 발표한 '2009년 사망원인 통계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는 2009년 한 해 1만5413명, 하루 평균 42.2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인구 10만 명당 31명꼴로, 2008년의 26명보다 무려 19.3% 증가하였다. 이 같은 자살률은 90년대 초반부터 증가하기 시작해, 90년대 후반 금융위기를 거친 이후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특히 지난 30년간 자살률 추이는 거의 400% 증가에 육박한다. 이 같은 현상은 경이적이며, 세계에서도 거의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다.

우리나라 자살률은 OECD 회원국 가운데 독보적 수준으로, OECD 평균 자살률이 10만 명당 11.2명인 것을 생각하면 거의 3배에 가까운 수치다. 우리나라는 이제 과거 자살률에 있어 항상 1위를 차지한 헝가리를 멀찌감치 따돌리고 영광(?)스럽게 세계 제1위에 등극하였다. 이러니 대한민국을 자살공화국이라고 말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정말 자살 문제는 대한민국 최대의 사회 문제다.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 ⓒ 청아출판사

<자살론> 한 번 읽어 볼만한 책


이런 상황에서 오늘 소개하는 책 <자살론>(에밀 뒤르켐 지음, 황보종우 옮김)은 자살의 사회적 의미와 원인을 분석하고 그 대안을 만들어 나가는데 성찰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이 책은 사회학의 초석을 쌓은 뒤르켐이 39세에 지은 책으로 사회학의 영원한 명저이다. 다만, 사회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선명히 그 내용이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럴 때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가며 뒤르켐의 사회학, 그리고 이 책의 의미를 이해해 나가는 것도 방법이라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뒤르켐과 베버를 비교하면서 사회학의 의미를 전달한 <사회는 무엇으로 사는가?>(김광기 지음)는 괜찮은 참고서가 될 것이다.

ⓒ Wikipedia

에밀 뒤르켐(Emile Durkheim)은 1958년 프랑스 로렌지방 에피날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예나 지금이나 프랑스의 수재들이 입학하는 파리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여 보로도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하였고, 그 후 파리 소르본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는 일찍이 사회학의 고유방법론을 확립하는 데 기여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분업, 자살, 가족, 국가, 사회정의 등 당시 서구사회가 직면한 사회적 문제의 본질을 밝히는데 주력하였다.

뒤르켐은 당대에 오귀스트 콩트, 막스 베버와 더불어 세계적인 사회학자의 반열에 올랐으며 그의 사회학 방법론에 따른 뒤르켐 학파의 선구자가 되었다. 1917년 5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자살론>(1897) 외에도 <사회분업론>(1893), <종교생활의 기초형태>(1912) 등이 생전에 출간되었고, <교육과 사회학>(1922), <사회학과 철학>(1924), <사회주의>(1928), <사회학 강의>(1950), <프래그머티즘과 사회학>(1955) 등이 사후에 출간되었다.

<자살론>의 사회학적 의미는 무엇인가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다른 영역의 이야기를 하자니 부담감이 앞선다. 그러나 용기를 내서 좀 아는 척을 해보자. 그렇지 않으면 오늘 소개하는 이 책의 의미를 제대로 설명도 못 하고 단순히 책 소개를 하는 데 그칠 수 있으니 말이다.

사회학이라는 학문은 그리 오랜 역사를 가진 학문이 아니다. 19세기 후반에 시작되었으니 학문의 후발 주자임이 분명하다. 사회학이 학문의 반열로 올라가는 데 뒤르켐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왜일까. 그것은 그가 사회학의 연구방법과 연구대상을 정확히 설정함으로써 사회학을 다른 학문과 구별되는 독자적 학문으로 대접받을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에밀 뒤르켐의 <사회학적 방법의 규칙들>. ⓒ 새물결


이 말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뒤르켐의 또 다른 저서 <사회학적 방법의 규칙들>(윤병철 외 옮김)을 읽으면 보다 분명해진다. 그러나 이것을 읽지 않는다 해도 뒤르켐은 자신의 연구방법론을 <자살론>의 머리말이나 서론 부분에서 충분히 말하고 있다.

뒤르켐은 사회학이 '사회적 사실을 사물로서, 개인의 외부에 존재하는 실체'로서 연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뒤르켐 사회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면 여기에서 '사회적 실체'란 무엇일까. 이를 위해서는 먼저 '사회' 자체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사회는 개인의 실체를 넘는 집단적 실체를 의미한다.

사회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구성되지만 그것은 단순 구성체가 아니다. 일단 사회를 이루면 그것은 개인을 초월하는 별도의 메커니즘을 갖는 별도의 실체가 된다.

A와 B가 모이면 그냥 A+B가 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실체인 C가 된다. A와 B 두 사람으로 구성되는 사회는 그냥 두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속성을 갖게 되는 C라는 사회(아마도 이것은 사회를 만든 A와 B도 이런 속성이 있을 줄은 애당초 몰랐을 것이다)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 C에서 발견되는 현상, 그것이 사회적 실체이고 사회학은 바로 그것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것이다.

위 설명을 들어도 좀 알쏭달쏭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보게 되는 <자살론>의 사회학적 성격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될 것이라 믿는다. <자살론>은 뒤르켐 사회학의 대표적 실례로서 뒤르켐은 자살이라는 사회적 사실을 사물처럼 취급하여 사회학사에서 기념비적 학문적 성과를 냈던 것이다.

뒤르켐은 자살을 한 인간의 내면의 심리학적 측면에서 관찰하지 않고 한 사회에서 일정한 기간 동안 일어난 사실 전체로 보았다. 그렇게 보면 그 전체는 개별 자살 사건의 단순한 합계가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통일성, 개별성 및 그에 따른 독자적인 본질을 가진 새로운 사회현상이 된다. 뒤르켐의 관심사는 한 개인의 자살원인이 아니라 자살의 사회현상이었다. 다른 말로 바꾸면, 그의 관심사는 '그녀가 자살을 왜 했는가'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어떻게 특정 사회에서 자살의 경향성이 일정할 수 있는가'였다.

그렇다. 뒤르켐이 사회학이라는 학문분야를 통해 자살에 대해 알고자 했던 것은 사회 전체의 자살의 경향성에 관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왜, '가톨릭교도보다 개신교도가 자살할 가능성이 높을까', '왜 기혼자보다 미혼자가 자살을 많이 할까', '왜 시골 사는 사람보다 도시 사람들이 더 자살을 많이 할까' 이런 것들이었다.

이와 같은 관심사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중요한 것은 개개 자살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자살률이고, 그 방법론은 통계학이 될 수밖에 없다(주변의 사회학 공부하는 사람을 보라. 매일 하는 것이 통계처리다! 뒤르켐의 후예들이다.). 이러한 방법론으로 자살을 연구하면 자살에 대하여 개인에 대한 심리학적 접근방법에서 알 수 없었던 수많은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이 바로 뒤르켐이 알고자 했던 사회적 현상이자 사회적 실체였다.

<자살론>은 이와 같이 사회학사에서 새로운 이정표라고 할 수 있는 뒤르켐식 사회학 방법론에 따라 본격적으로 연구된 자살에 대한 사회학 보고서이다. 그러니 이 책은 자살 그 자체에 대한 연구서로서의 가치도 있지만 사회학 방법론적 입장에서도 고전으로 취급되는 것이다.

<자살론>의 핵심은 무엇인가

주요 OECD 국가의 자살률 현황. ⓒ 새사연


이 책은 사회적 자살률에 관한 연구서이다. 뒤르켐의 관심은 사회적 자살률에 영향을 주는 것이 무엇이냐에 있었다. 뒤르켐은 우선 비사회적 요인이라고 할 수 있는 정신질환, 인종, 유전, 풍토 등과 같은 요인이 자살률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조사하였다. 그는 통계학적 분석을 한 다음 이런 것들은 예상과는 달리 자살률에 큰 관련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자살률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회'라고 하는 실체에서 비롯되는 사회적 요인에서 비롯된다고 결론을 낸다. 뒤르켐이 각종 자살 관련 통계에서 발견한 사회적 요인으로서의 자살의 원인은 '사회의 응집력' 혹은 '연대력'이라는 현상이었다.

이것은 자살률이 사회의 응집력 정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사회의 응집력이 강한 곳은 약한 곳에서보다 자살률이 더 낮다는 것이다. 물론 응집력이 강하다고 자살이 아예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러한 때 일어나는 자살은 응집력이 약할 때 일어나는 자살과는 그 양상을 달리한다.

<자살론>이 분류하는 자살의 유형

a

영화 <타인의 삶>에서 슈타지에 연행된 뒤 타자기가 숨겨진 곳을 실토하고 비밀정보원 선서까지 한 크리스타가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차에 뛰어 들어 자살하자 드라이만이 뛰어 오고 비즐러는 황망한 모습으로 물러나는 장면. ⓒ 유레카 픽쳐스


자살률에 영향을 주는 것은 사회적 원인이라고 할 때 그 양상은 다 같은 것이 아니다. 뒤르켐은 그 양상을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자살의 사회적 원인을 분석한다. 이 부분이 <자살론>의 핵심에 해당한다. 이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자. 뭐, 그리 어려워할 필요는 없다.

① 이기적 자살
이기적 자살은 한 사회나 집단의 응집력이 대단히 약화됐을 때 나타날 수 있는 자살이다. 사회나 집단의 응집력이 약화되면 집단을 먼저 생각하는 집단주의보다는 과도한 개인주의가 판을 친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은 주위의 어떤 이와도 끈끈한 연대감을 맺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소속한 사회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뒤르켐의 말로 직접 이러한 자살을 정의하면 이렇다.

"개인의 자아가 사회적 자아보다 강력하고 사회적 자아를 희생시키면서까지 개인의 자아를 주장하는 상태를 이기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면 우리는 지나친 개인주의로 인한 자살을 이기적인 자살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250쪽)

이기적 자살은 종교와 매우 관련이 있다. 서구에서는 과거 중세 시대에 농촌 중심의 봉건사회였기 때문에 종교에 의한 사회적 응집력이 대단히 강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교리에 대한 개인의 자유가 허용됨에 따라 그 응집력은 약화되었다. 이것이 바로 가톨릭교도보다 개신교도가 높은 자살률을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뒤르켐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종교가 개인의 판단을 허용하면 할수록 인간의 삶에 대한 지배력을 잃고 결속력과 지속력이 약화된다. ... 개신교가 높은 자살률을 보이는 것은 개신교 교회의 통합력이 가톨릭교회보다 약하기 때문이다."(184쪽)

응집력 있고 활력 넘치는 사회에서는 모든 성원들 간에 끊임없이 관념과 정서의 교류가 이루어진다. 이런 사회에서는 자살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이기적 자살을 통해서 본 <자살론>의 결론이다. 개인은 자기가 좋아하는 집단에 소속되었을 때 자신의 이익보다 소중한 집단의 이익을 배반하지 않으려 한다. 여기에서 삶의 집착이 일어나고 자살률은 떨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하는 사회는 무엇일까. 뒤르켐이 주목한 사회는 종교 사회, 가족 사회 그리고 정치 사회였다. 따라서 이들 사회의 응집력 혹은 통합정도가 높으면 자살률은 떨어지게 된다. 뒤르켐은 이렇게 결론을 낸다.

자살은 종교사회의 통합정도에 반비례한다.
자살은 가족사회의 통합정도에 반비례한다.
자살은 정치사회의 통합정도에 반비례한다.
(249쪽)

② 이타적 자살
이타적 자살은 사회적 응집력이 매우 강한 곳에서 일어나는 자살 형태다. 집단의 힘이 개인을 완전히 압도할 때, 그리고 개인에게 있어 집단이 인생의 전부이자 의미일 때 혹은 개인과 집단이 분리되지 않고 완전히 일치할 때, 개인은 집단이 그에게 자살을 직간접적으로 강요하더라도 그것을 마다하지 않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은 집단의 존속을 위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위해 요구되는 것이 비록 목숨이라 할지라도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바칠 수 있고 나아가 그러한 요구 자체를 영광으로 받아들인다.

과거 태평양 전쟁 시기에 일본의 카미가제 특공대를 연상하면 좋을 것이다. 당시 특공대는 뻔히 출격하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비행기에 탑승했다. 그리고 그들은 미군의 함정을 향해 장렬히 산화했다. 사람들은 이것이 자살임에도 살신성인으로 은폐한다. 이와 관련하여 뒤르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대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 가운데 군대는 가장 미개 사회의 구조를 연상케 하는 요소이다. 군대 역시 미개 사회처럼 개인에게 엄격한 기준을 강요하고 개인의 독립적 행동을 막는 집단적이고 단일한 그룹이다. 따라서 이 정신적 특질이 이타적 자살의 천혜의 토양이 되기 때문에 군대의 자살은 이타주의와 같은 성격이며, 같은 원인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285~286쪽)

a

<여고괴담5-동반자살>의 한 장면. ⓒ 씨네2000


③ 아노미적 자살
아노미적 자살은 사회의 규제와 억압이 존재하지 않거나 모호한 상태, 즉, 무규범 상태나 아노미 상태에서 발생할 수 있는 자살을 말한다. 이런 상황은 사회가 경제적 위기에 처해 사회적 규율 상태가 혼란스런 상태에 달했을 때 자주 생긴다. 이것은 인간의 욕구를 사회가 적절히 통제하지 못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뒤르켐이 이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직접 들어보자.

"만일 산업이나 금융위기가 자살을 증가시킨다면 그것은 그런 위기가 빈곤을 초래하기 때문이 아니다. 갑작스런 번영도 같은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자살이 증가하는 이유는 그것이 위기이기 때문이다. 즉, 집단적 질서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모든 평형상실은 그것이 비록 수입을 증가시키고 일반적인 활력을 증대시킨다 할지라도 자살의 자극제가 된다. 사회질서가 심각하게 재적응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그것이 갑작스러운 성장이든 예기치 않은 재난이든 간에 사람들이 자살하기 쉽다." (303쪽)

이것을 보면 사람들이 규제와 억압을 혐오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규제와 억압이 없는 상황 또한 견디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회의 통제력이 이완되면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데 그 결과 좌절, 불안, 불만 등이 점증하며 급기야는 자살을 선택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자살이 아노미적 자살이다.

뒤르켐은 결혼과 관련하여 이혼이 흔한 사회에서 결혼이라는 사회적 제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회적 아노미를 불러일으켜 자살로 이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혼제도로 인한 결혼의 아노미 상태는 이혼과 자살의 비례 현상을 설명해준다. 즉 이혼이 빈번한 사회의 기혼남자 자살은 아노미성 자살이다. 그것은 그러한 사회에 나쁜 남편과 나쁜 아내가 많기 때문이 아니며 불행한 가정이 많기 때문도 아니다." (341쪽)

독자들은 위 설명에 대해 대체로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면 이기적 자살과 아노미적 자살은 얼핏 유사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나는 책을 아무리 읽어 보아도 그렇게 보인다. 왜냐하면 이기적 자살이나 아노미적 자살 모두 사회와 개인 간의 관계가 응집력이나 연대력이 이완된 상태에서 일어나는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럼 도대체 그 차이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뒤르켐은 이렇게 설명한다.

"이기적 자살의 경우 성찰적 지성이 무절제하게 악화되며 아노미성 자살의 경우에는 감정이 너무 흥분해서 모든 규제를 벗어나게 된다. 이기적 자살은 사고가 자아 속으로 후퇴함에 따라 목표를 잃은 경우이고, 아노미성 자살은 한계를 모르는 열망이 목표를 잃은 경우이다." (361쪽)

도대체 이 말이 무엇인가. 알쏭달쏭하다. 그렇기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문 사회학자 사이에서도 많은 논란이 있다. 나의 견해는 이렇다. 이기적 자살은 자살자 스스로 사회와의 연관을 끊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소극적인 사람이 된다. 그리고 그는 사회와 자기는 무관하다고 느끼고 급기야는 자살을 선택한다.

반면, 아노미적 자살에서 자살자는 사회와의 연결을 도모한다. 아니, 그는 그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자신은 사회와 연관되어 그 사회의 일정한 통제 속에서 살기를 원하는 데 불행하게도 이제는 사회가 정상이 아니다. 그는 이 현상에 좌절하며 분노한다. 그리고 자살을 선택한다. 이것은 위에서 본 결혼 아노미와 연결해서 보면 분명해진다. 결혼제도가 거의 이완되어 결혼이 더 이상 개인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결혼으로 인한 그의 안정감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지 않은가.

대한민국, 자살공화국의 오명 어떻게 벗어날까

현재 우리나라의 자살 현상을 뒤르켐이 말하는 사회적 요인에 의한 자살 유형으로 설명이 가능할 지는 솔직히 자신이 없다. 다만, 지난 30년간 자살률의 기록적인 증가를 우리 사회의 급격한 해체에서 찾는다면 그것은 분명 뒤르켐식 사회학적 인식과 관련이 있다. 특히 1990년 대 후반 금융위기 이후 자살이 급증하는 것은 위의 아노미적 자살과 상당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사회의 규범력이 이완되어 더 이상 사람들을 사회라는 공동체로 끌어들이지 못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노인이나 청소년 자살의 급증은 이들이 사회에 대하여 더 이상 어떤 연대감이나 희망을 갖지 못하는 상황에서 일어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위의 이기적 자살의 한 형태로 읽을 수 있다. 그뿐인가. 종교의 사회적 역할이 점점 퇴락할 때 자살률이 높아진다는 뒤르켐의 주장도 한국 사회의 종교 현실을 살펴볼 때 부인할 수 없다. 한국 사회에서 종교가 자살을 막지 못한다는 것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는 현실이 아닌가.

결국, 뒤르켐의 통찰력은 한국 사회의 자살에도 상당 부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통찰력에서 나오는 자살률 감소의 방법은 무엇일까. 두말할 것도 없이 '사회 통합력의 복원'일 것이다. 매일매일 숨 막히는 경쟁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느 순간 삶의 의지를 잃어버리면 그 순간 자살의 유혹이 올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에게 사회는 아무런 의미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사회에 새로운 꿈을 심어야 한다. 너를 밟아야 내가 산다는 식의 경쟁논리만으로는 이 사회가 유지될 수 없다. 어려워도 모두 함께 같이 가는 사회, 가진 것을 나누어 함께 즐길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를 만들 때 비로소 우리 사회의 응집력은 다시 살아나 사람들은 삶에 애착을 보이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살론>이 주는 교훈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박찬운은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의 인권법 교수이자 변호사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박찬운은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의 인권법 교수이자 변호사이다.
#에밀 뒤르켐 #자살론 #자살론 #자살공화국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한양대학교 로스쿨에서 인권법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30년 이상 법률가로 살아오면서(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역임) 여러 인권분야를 개척해 왔습니다. 인권법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오랜 기간 인문, 사회, 과학, 문화, 예술 등 여러 분야의 명저들을 독서해 왔고 틈나는 대로 여행을 해 왔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한국인들만 모르는, 외국인들에게 소름 돋는 '어메이징 코리아'
  2. 2 그가 입을 열까 불안? 황당한 윤석열표 장성 인사
  3. 3 참전용사 선창에 후배해병들 화답 "윤석열 거부권? 사생결단낸다"
  4. 4 눈썹 문신한 사람들 보십시오... 이게 말이 됩니까
  5. 5 해병대 노병도 울었다... 채상병 특검법 국회 통과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