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혼자 걷는 길, 어쩌다가 차가 멈추면...

[평창 도보여행 1] 장평에서 금당계곡까지

등록 2011.04.23 17:55수정 2011.04.23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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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혜준


여행은 언제부터 시작되는 걸까? 장평에서 막국수를 먹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집을 나서는 순간일까, 버스터미널에서 버스표를 사는 순간일까, 버스에 오르는 순간일까, 목적지에 도착하는 순간일까, 아니면 여행지 식당의 미닫이문을 여는 순간일까?

두 번째 먹는 장평 막국수 맛은 더 이상 특별하지 않았다. 국수틀에서 국수를 뽑는 소리를 들으면서 특별한 맛을 기대했는데, 기대가 어긋났다. 요즘 막국수를 너무 많이 먹은 게야. 그래서 물린 게야. 늘 그렇듯이 첫맛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법이고, 횟수를 거듭할수록 긴장이 떨어진다. 그러니 너무 자주 먹어서 막국수의 맛이 입에 착착 달라붙지 않게 된 게다.


여행의 시작, 지도가 모든 것을 알려주진 않는다

지난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2박3일간 평창을 걸었다. 이번 여행 출발지도 봉평여행처럼 장평이었다. 장평부터 걷기 시작해 평창읍까지 들어갈 예정이었다. 흥정계곡부터 이어진 물줄기는 금당계곡을 지나 뇌운계곡까지 이어지면서 평창강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그 길을 따라 걸을 작정이었다.

지도를 보면서 하루에 얼마나 걸을 수 있을 것인지, 해가 지기 전에 어디에 닿을 수 있을 것인지, 가늠해봤다. 결론은 가봐야 안다는 것. 지도가 모든 것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내가 믿어야 하는 건 지도가 아니라, 내 두 다리와 두 발이다. 배낭을 최대한 가볍게 꾸렸지만, 이번에는 추리소설 한 권을 무게가 나가지 않은 것으로 골라 찔러 넣었다. 혼자 자는 밤은 생각보다 길기 마련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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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혜준


서울에서 장평까지 걸리는 시간은 딱 두 시간. 버스여행의 고단함을 느낄 사이도 없이 동서울버스터미널을 떠난 버스는 장평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은 달랑 나 하나. 장평을 지나 평창을 거쳐 정선까지 가는 버스였다.

장평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11시 35분. 점심식사를 하기 이른 시간이지만, 미리 먹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내내 금당계곡을 따라 걸을 예정인데 그 길에 식당이 있을 가능성이 낮았기 때문이다. 설령 식당이 있다고 해도 관광비수기에 문을 열었을 리 없을 것이고, 문을 열었다 하더라도 혼자만 달랑 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육수에 잠긴 막국수를 후루룩 비우고, 본격적으로 걸을 준비를 한다. 얼굴에 햇빛을 차단하는 선크림을 바르고, 마스크를 쓰고, 장갑을 끼고 마지막으로 챙이 달린 모자를 눌러 썼다. 거울을 보니 모자챙과 마스크 사이로 두 눈만 반짝인다. 날씨, 맑다. 햇빛은 눈부시고. 하지만 내일(4월 15일)은 오후에 방사능비가 온다고 했다.

비 올 때를 대비해 배낭 안에는 비옷을 챙겨 넣었다. 겨울 내내 배낭 안에는 아이젠이 들어 있었지만 겨울이 다 갔다고 판단, 꺼내서 창고에 넣어두었다. 내년에 다시 보자, 하면서.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비가 내리는 날에는 가급적이면 걷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게 맘대로 될 것 같지는 않다. 걷다가 비를 만나면 어쩔 수 없이 맞을 수밖에 없을 터. 지금 들고 다니는 비옷이 무게가 제법 나가는 편이라 최경량 비옷을 새로 장만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야 배낭의 무게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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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당계곡 ⓒ 유혜준


장평에서 평창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로 나뉘어져 있다. 하나는 금당계곡을 에둘러서 가는 길이요, 다른 하나는 대화면을 지나서 가는 길이다. 31번 국도를 따라 밋밋하게 걷는 것보다는 구불거리면서 길게 이어진 금당계곡을 따라 걷는 편이 더 운치가 있을 것은 안 봐도 비디오. 문제는 해가 지기 전에 그 길을 다 걸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금당계곡을 빠져나와 방림리에서 하룻밤을 잘 생각이었다.

뿅뿅 뚫린 검은 비닐 사이로, 봄은 오고...

출발이 늦기는 했다. 오전 9시에 걷기 시작한다면 넉넉잡고 오후 7시 정도면 금당계곡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지금 시간은 12시 15분. 내 계산대로라면 오후 9시가 넘어서도 길 위에 서 있을 가능성이 높다. 해가 지기 전에 숙박할 수 있을 만한 곳을 찾아낸다면 그곳이 펜션이든 민박이든 머물러야겠다, 고 생각했다. 이런 내 계산은 걸어보니 얼추 맞아 떨어졌다.

장평에서 금당계곡로로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장평교를 건너 걷다보니 평창대로인 31번 국도다. 할 수 없다. 이 길을 따라 걷다가 31번 국도와 424번 국도가 만나는 곳에서 길을 바꿔야겠다. 금당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424번 도로는 안미리에서 31번 국도와 다시 만난다. 그곳까지 걸은 뒤 방림리로 가는 게 오늘의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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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혜준


길위에 서니 깊은 겨울잠에 들었던 강원도가 조금씩 깨어나기 시작하는 조짐이 보였다. 버들강아지들은 잔뜩 물이 올랐고, 부는 바람은 따뜻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겨우내 푸른빛이었지만 생기를 잃었던 소나무들이 똘똘해지고 있는 것도 보였다. 그렇더라도 햇볕이 들지 않는 응달에는 얼음이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조만간 저 얼음들은 물이 되어 땅속으로 스며들어 굳었던 땅을 풀어지게 하리라.

두터운 겉옷대신 가벼운 바람막이 옷을 입었는데도 전혀 춥지 않았다. 오히려 걸음이 조금 빨라질 때마다 이마에서 땀이 삐질거리면서 솟았다. 겨울이 뒷걸음질을 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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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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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혜준


봄을 가장 빨리 느끼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농부지, 싶다. 겨우내 황량한 바람이 머물던 들에 검은 비닐이 덮이고, 구멍이 뽕뽕 뚫려 있었다. 조만간 구멍 사이로 푸른 싹이 돋아날 테고, 들판이 온톤 푸른 색 투성이가 되리라. 농부들의 바쁜 손놀림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꼭 베짱이 같다. 남들은 열심히 일 하는데 혼자만 기타를 치면서 놀러 다니는 베짱이. 

감을 믿은 게 잘못이지...막다른 곳이잖아

길은 평창강을 따라 이어진다. 그리고 424번 국도에 다다랐고, 나는 금당계곡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계곡에는 물이 그리 많지 않았다. 계곡 길을 따라 걸으면서 깊이를 가늠해보니 발을 담그면 발목이나 종아리 정도밖에 차지 않을 것 같다. 저 정도 깊이라면 래프팅은 무리인데,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금당계곡은 래프팅하기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하긴 지금은 물의 양이 그리 많을 때가 아니다. 한여름에 폭우가 내린 뒤라면 거센 물줄기가 계곡을 기운차게 흘러내려갈 것이 분명하다. 그 때쯤이라면 래프팅이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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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혜준


길 위에는 아무도 없다. 늘 그렇듯이 걷는 사람은 나 혼자. 이따금 자동차들이 나를 스쳐 지나간다. 어쩌다 시선을 들어 지나가는 차량의 운전석을 마주 보면, 호기심 어린 눈길로 나를 보는 것이 느껴진다. 그래도 달려오는 차량을 마주보고 걸으니 태워주겠다면서 서는 차는 없다. 달리는 차량과 같은 방향으로 걸을 때는 어쩌다가 차가 멈추는 경우도 있다. 어디까지 가느냐고, 힘들게 걸어가지 말고 타라면서.

두 시간 남짓 걷다가 재산리 마을회관 앞에서 잠시 쉬었다. 이 마을회관 겸 경로당은 멀리서보면 펜션처럼 보인다. 제법 신경 써서 지은 티가 역력하다. 이렇게 폼 나는 마을회관은 드문데, 하면서 문 앞에 배낭을 내려놓고, 휴대용 의자를 꺼내 펼쳤다. 마을회관에는 아무도 없었다. 계곡을 바라보면서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계곡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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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리 마을회관 ⓒ 유혜준


물 흐르는 소리가 귓전을 흔들어댄다. 물소리는 계곡을 걷는 동안 내내 길동무처럼 나를 따라왔다.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시간이 정지된 것 같은데, 시계를 들여다보니 흐르는 물보다 빨리 시간이 흘렀다는 알 수 있었다. 5분도 채 안 된 것 같은데, 20분이 훌쩍 지나 있었던 것이다. 다시 걷기 시작한다.

금당계곡을 따라 걷다가 아주머니 한 분과 마주쳤다. 이 분, 나를 보더니 깜짝 놀란다. 혼자 온 거냐, 고 묻기까지 한다. 그렇다고 하자, 걱정스럽다는 듯이 덧붙인다.

"어째 혼자 다녀요. 같이 다니지."

그냥 배시시 웃고 말았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이 아주머니는 내가 혼자 등산을 나선 것으로 생각하고 놀란 것 같았다. 금당계곡을 따라 한참을 걸어가다 보니 금당산 등산로 입구가 나왔던 것이다. 금당산(1173m)과 거문산(1173m)을 잇는 등산로였다.

등산 안내도 앞에서 구경을 잠시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한데, 문제가 생겼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길이 이어져 있었는데, 내가 걷고 있는 쪽이 막다른 길이었던 것이다. 몇 채의 펜션 건물이 들어서 있는 곳을 지나 집들이 모여 있는 마을 안으로 들어갔더니, 밭에서 일을 하던 아주머니 한 분이 길이 막혔다고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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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당계곡 ⓒ 유혜준


계곡을 건너갈 수 없느냐고 물었더니, 없단다. 물이 깊어서 그냥 건널 수 없다는 말을 덧붙인다. 이런, 낭패가. 오다가 내가 쉬었던 재산리 마을회관 아래에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놓여 있었는데 그 다리를 건너 반대쪽 길로 갔어야 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다리부터 이 마을까지 한 시간은 족히 걸었던 것 같은데, 걸어온 길을 되짚어 나가 다리를 건너야 길이 이어지는 것이었다. 걷는 건 문제가 아닌데, 그만큼 금당계곡을 빠져나가는 시간이 늦어지는 게 걱정이었다. 자칫하다가는 해가 진 뒤, 어둠에 잠긴 금당계곡을 걷게 생겼다.

마음이 급해지자, 걸음도 더불어 빨라진다. 느긋하던 발걸음에 속도가 붙었다. 하지만 한 시간 가량 빨리 걸었더니, 숨이 가빠온다. 에라이, 모르겠다. 어두워지면 헤드랜턴을 켜고 걸으면 되지, 하면서 걸음을 늦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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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혜준


하지만 끝내 나는 금당계곡 길을 다 걷지 못했다. 6시가 훌쩍 넘어선 시각, 나는 여전히 금당계곡을 따라 걷고 있었다. 계곡을 따라 듬성듬성 자리 잡고 있는 펜션이나 민박집을 둘러보면서 혹시나 오늘밤 묵어갈 수 있을까, 살펴보면서 걸었다. 마땅한 집은 보이지 않았다. 펜션이 대부분 빈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사람이 사는 흔적이 거의 없는 펜션이라니, 성수기에만 운영을 하는 것일까?

잘 곳을 찾을 것이 아니라 어둠이 장막이 되어 계곡을 뒤덮더라도 그냥 걷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는 생각을 했다. 외진 금당계곡 길에 사람이 불쑥 나타날 가능성이 낮을 것이고, 차량만 이따금 지나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아니면 걷다가 마을이 나오면 들어가 이장님 댁이라도 찾아들어가야겠다, 하고 있을 때 길 저편에서 나를 향해 버스 한 대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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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군 대화면 대화리 ⓒ 유혜준


대화에서 개수를 오가는 버스였다. 하루에 다섯 번쯤인가 버스가 다닌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개수리로 들어가는 버스였다. 조금 전에 내가 지나온 마을이 개수리다. 아, 저 버스를 타고 대화로 나가서 하룻밤을 자면 되겠다. 마을로 들어가는 버스는 필시 다시 돌아 나올 터. 그 버스를 세워서 타고 가면 되겠구나.

내 예상대로 버스는 개수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고, 나는 손을 흔들어 버스를 세웠다. 버스는 20분 남짓 달려 대화에 도착했고, 나는 그곳에서 내렸다. 변두리 느낌이 물씬 나는 소도시였다, 대화는.
#도보여행 #강원도 #평창 #금당계곡 #개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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