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억 줄테니 경대 장례 빨리 치르라고 하더라"

[인터뷰] 강경대 열사 아버지 강민조 전국민주화운동 유가족협의회 회장

등록 2011.04.26 18:52수정 2011.04.26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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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대 엄마가 새벽에 밥을 해놓고, 쪽지에다가 '밥 먹고 학교 가라'고 써 놨다. 그러고는 3만 원인가 놔뒀을 거다. 가지고 가라고. 한참 자고 일어나 보니까 식탁에 쪽지가 있더라. '아빠 엄마 학교 가서 공부 열심히 하고 올게요.' 그래서 기분이 얼마나 좋았는지, 경대 엄마한테 '어이 우리 효자 자식 보소. 효자 아들' 보면서 웃고..."

"그게 오늘 아침…."

20년 전 '오늘'을 회상하던 강경대 열사 어머니 이덕순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1991년 4월 26일, 명지대학교 경제학과 1학년이던 외동 아들은 시위 도중 '백골단'이라 불리는 경찰관들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졌다.

이후 4월 29일 전남대학교 박승희 학생이 '강경대 치사사건 규탄과 공안통치 분쇄를 위한 범국민대회' 참가 도중 분신한 것을 시작으로 안동대 김영균 학생, 경원대 천세용 학생 등 무려 11명의 학생과 노동자가 분신·투신·의문사 한다. 그해 5월 25일에는 성균관대 김귀정 학생이 시위 진압과정에서 압사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2011년 4월 26일 오전. 서울시 도봉구에 위치한 강경대 열사 부모님의 자택을 찾았다. 축구선수 출신으로 사업을 해오던 강민조(70) 전국민주화운동 유가족 협의회 회장은 아들의 죽음 이후 '투사'가 되었다. 민주화운동정신계승 국민연대 이사장, 민주공원건립추진위 상임대표, 유공자 명예회복 추진위원장, 6·15 남북공동선언위원회 남측본부 공동의장 등 명함이 빼곡하다.

망월동 묘역에 묻힌 아들과 가까이 있고 싶어 광주에서 살기도 했던 부부는 아들의 생일인 2월 4일마다 노인들을 위한 경로잔치를 여는가 하면, '강경대 한방 무료 진료소'를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강경대 열사를 비롯한 민주화 관련자들은 오는 2013년 완공되는 이천 민주공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자택에 들어서자, 벽면을 가득 메운 사진들이 눈에 띄었다. 스무 살 아들과 두 살 터울의 누나 선미씨, "그 전에는 웃음이 없었는데 요놈들 때문에 웃고 산다"는 손자들. 강씨가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는 사진도 보인다. 이덕순씨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경대 노제 때 저랑 같이 맨 앞에 섰다가 최루탄을 맞아서 병원에 실려 간 적이 있다"고 떠올렸다.


다음은 강민조 회장과의 일문일답이다.

"마지막 남긴 쪽지 보며 '우리 효자아들 보소' 웃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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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강경대 열사 아버지 강민조 전국민주화운동 유가족협의회 회장. ⓒ 홍현진

- 아드님이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나.
"몰랐다. 우리는. 고등학교 때 경대가 도시락을 5개씩 싸달라고 하더라. 주말에. 그래서 경대 엄마가 '여기도 어려운 사람이 있냐, 강남인데' 그러니까 '예' 그러더라. 그런데 나중에 경대가 가고 나서야 왜 도시락 5개를 싸갔는지 알게 되었다. 연대 병원에 있는데 전교조 선생님들이 와서 '경대란 놈이 도시락을 싸와서 우리를 지지 방문했다'고 하더라. 그래서 알았다."

- 아드님 사망사실을 어떻게 알게 됐나.
"20년 전 어제, 안양에 사는 친한 친구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거기에서 날을 새고 새벽 4시 넘어서 집에 왔다. 경대 엄마가 새벽에 밥을 해놓고, 쪽지에다가 '밥 먹고 학교 가라'고 써 놨다. 그러고는 3만 원인가 놔뒀을 거다. 가지고 가라고.

한참 자고 일어보니까 식탁에 쪽지가 있더라. '아빠 엄마 학교 가서 공부 열심히 하고 올게요.' 그래서 내가 얼마나 좋은지, 경대 엄마한테 '어이, 우리 효자자식 보소. 효자아들' 보면서 웃고…."

- 살가운 아들이었나 보다.
"우리 아들이 엄청 따랐다. 엄마 젖 줘요, 하면서 막 와서 껴안고. 나도 업어주고.(웃음) 그러고 있는데 전화가 오더라. 경대 엄마의 친구 아들이 교통사고가 나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다고. '언능 가보소' 그랬지. 그리고 나는 집에 있는데 전화가 왔더라. 명지대 교수라더라. '경대가 다쳐서 영안실에 있다'고 하더라. 그 분은 경대가 다쳤다고만 말하려고 했는데 자기도 모르게 영안실 소리가 나온 거다. 얼마나 가슴이 철렁하나. 그런데 또 전화가 왔다. 학생이 이야기하더라. 경대가 그렇게 됐다고. 그래서 정신없이 택시를 타고 갔다. 연세대 가니까 '강경대 살려내라'고 난리더라. 아무것도 안 보이더라. 내려서 딱 들어가니까 경대 영정이 보이더라. 그래서 '노태우 이 XX, 죽이겠다. 가만 안 두겠다'하면서 들어갔다.

많은 학생들하고 재야인사들이 오셔서 이야기를 하시더라. 내가 그랬다. '이 정권을 용서할 수 없다. 우리 가족은 목숨을 바쳐서 싸우겠다. 도와줘라'. 나는 그 당시만 해도 운동권을 잘 모르니까 남의 일에 누가 도와줄까 했다. 그러고는 한 3일은 굉장히 불안했다. 이 사람들이 다 싸우다가 가버릴까봐. 불안해서 속으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누구라도 고마운 거야. 그래 가지고 딱 5일 지나니까 믿음이 가더라. 이 사람들이 가버릴 사람들이 아니구나. 문익환 목사님이 오셔서 나한테 말씀하시더라. '경대는 자신의 자식이 아니고 민족의 자식이다'. 그때서야 안심이 되더라."

"50억 줄테니 빨리 장례 치르라고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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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5월 투쟁, 출처 : 강경대열사 추모사업회 ⓒ 이장연


- 정부에서 장례식 빨리 치르라고 거액의 돈을 줬다고 들었다.
"경대가 그러고 나서 일주일 정도 됐을까. 내 중학교 동창, 고등학교 동창, 초등학교 동창들이 (병원에) 오더라. 어렸을 때 헤어지고 그때까지 못 만났던 애들인데. 고놈들이 안기부도 있고 경찰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더라. 걔네들이 '높은 사람'이라면서 누구를 데리고 오더라. 그리고 그 사람이 '이왕에 간 자식, 다른 사람은 5억인데 경대는 20억'이라고 '빨리 장례를 치르라'고 그러더라. 그래서 내가 '경대 엄마가 알면 큰일 난다'고 가라고 했다. 

그렇게 한 사흘 있다가 또 다른 사람이 오더라. 그러고는 제안을 하더라. 돈 20억이 적은 줄 알고, '50억을 당신 통장에 입금시켜줄 테니 빨리 장례를 치르라'고 하더라. 그 때는 내가 화가 나더라. 나도 막말해 버렸다. '우리 가족은 자식을 팔고 사는 사람 아니다. 노태우씨는 자식을 팔고 사는 사람인가보다. 노태우 자식을 나한테 팔라고 그래라. 나도 (그 자식을) 죽여 버려야 노태우라는 놈이 내 마음을 알 거다. 자식이 죽임을 당했을 때 그 심정을'. 그랬더니 그 사람 얼굴이 발개지더라. 그리고 나보고 이성을 잃었다고 하더라."

- 강경대 열사의 죽음 이후 '분신정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학생과 노동자들이 목숨을 끊었는데. 
"그것 때문에 고통이 더 심했다. 그 부모 얼굴 볼 낯이 없더라. 꼭 죄인 같더라. 죽겠더라. 하나 딱 분신하면 철렁하고, 또 철렁하고. 계속 내가 죄를 짓는 것만 같고. 재야인사들이 그 부모하고 면담도 시켜주고 했는데 그럴 때마다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그 부모가 '경대 아버지 같이 힘을 합칩시다' 그러더라고. 그 때 굉장히 고맙더라. 그래도 그 부모한테 지금도 미안하다."

- 그해 7월에 법정소란죄로 구속됐는데.
"특수법정소란죄. 나는 그때까지 재판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검사는 착실하게 죄를 묻고 판사는 공평하게 판결을 하는 그런 사람으로만 봤다. 그런데 딱 경대 재판을 하는데 (검사가) 거짓말을 하는 거다. 10m 전방에서 경대가 화염병을 던지니까 잡아서 때렸다는 거다. 아니, 울타리 넘어가는 거 자기들이 발을 끌어내려가지고 때렸잖아. 그건 천하가 다 아는 건데.

처음에는 우리 딸이 신발을 벗어서 재판석에 던져버렸다. 나도 던져버리고 앞으로 뛰쳐나가서 엎어버렸다. 검사, 판사가 '휴정' 소리도 못하고 도망갔다. 내가 서류도 다 찢어버렸다. 그러고는 박승희 49재라고 광주에 내려갔는데 내가 계속 방송에 나오더라. '사법부에 대한 도전'이라고. 그리고 구속됐다. 처음에는 1년 6개월 받았다가 항소심에서 8개월 받아서 실형 살았다. 7월에 들어가서 그 이듬해 3월에 나왔다."

- 어머니께서는 억장이 무너졌겠다.
이덕순씨 : "우리 경대가 그러니까 모든 게 다 싫었다. 세상이 싫었다. 머리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오로지 우리 경대한테만 모든 게 집중되어 있으니까 밥도 못 먹고. 선미(강경대 열사 누나)가 결핵이 걸렸다. 결핵이라는 게 몸이 쇠약해져서 걸리는 건데. 2년 정도 치료받았다."

"MB 정부, 4대강 사업 도와주면 지원금 주겠다고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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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대 열사 20주기 추모 명지대학교 학생회관 1층에 강경대 열사를 추모하기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 정민지


- 아드님이 '민주화 투쟁' 하다 숨진 지 20년이 지났다. 그동안 어떤 점이 달라졌나.
"달라진 게 없다. 다시 20년 전으로 가고 있다. 이명박씨 자신도 우리한테 고맙게 생각하고 우리를 초청해서 '감사합니다' 큰 절을 해야 한다. 민주화를 위한 희생이 없었다면 이명박씨가 대통령이 됐을까. 민주화를 위해 희생하고 감옥 간 사람들은 뒷전이고, 가만히 앉아서 민주화를 주워 먹은 사람들이 기득권을 누리고 있다. 배은망덕하다. 지금도 나는 이명박씨한테 이야기하고 싶다. 어떤 역사 속에서 자기가 대통령으로 태어났는지 지금이라도 깨우쳤으면 한다.

우리 국민들도 10년, 20년, 30년 햇수를 가지고 조명하는데 그래선 안 된다. 지금도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가는 국민들이 많다. 내 입에 밥만 들어가고 주머니에 돈만 들어가면 된다. 안타깝다. 잘못된 사회현실에 국민들이 문제제기를 해야 하는데 방관만 한다. 다 잃고 나서야 문제의식을 가지는 거다. 나같이."

- 이명박 정부 들어 유가협 등에 대한 지원금이 끊겼다고. 
"전부 끊겨버렸다. 아니, 우리보고 4대강 사업을 지원해라, 이명박씨 관련 사업을 하라고 하더라. 하겠나. 못한다. 우리는 민주화와 통일, 우리 자식들이 못 다한 일을 해야 하는데 다른 과제를 주면 하겠나. 안 한다."

- 4대강 사업 관련 제안이 있었다는 건가.
"그런 사업하면 지원해주겠다고 해서 황당해서 웃어버렸다."

- 사망 20주기, 감회가 어떤가.
"경대가 죽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투쟁현장에 가서 보면 우리 가족은 죽었다고 생각 안 하는데 일반 사람들은 죽었다고 생각을 하는구나, 싶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눈물도 나오고. (눈시울 붉어지며) 정말 지금도 우리 심정은 그렇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죽고 경대가 살아난다면, 우리가 죽었으면, 그런 못 이룰 꿈을 꾸기도 하고. 경대가 어렸을 때 되게 살갑게 굴던 꿈을 많이 꾼다. 요놈이 농담도 한다. 엄마가 더 좋아 아빠가 더 좋아. 그런 것들이 생각나고.

단 위안이 되는 것은 어거지 위안이지만 경대가 개인 일을 한 것이 아니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을 하다 갔다는 것이다. 큰일을 했다. 국민들 모두가 민주화된 나라에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세상에서 살 수 있게 해주었다. 그것이 어거지 위안이다." 
#강경대 #강경대 열사 #강민조 #5월 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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