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흘간 아이슬란드 여행, 현금 한푼도 안 썼다

[공모-여행지에서 생긴 일] 40대에도 배낭여행은 계속된다

등록 2012.06.17 11:58수정 2012.06.21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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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아이슬란드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화산폭발? IMF 구제금융? 거대한 빙하? 나도 아이슬란드 여행을 다녀오기 전에는 그랬다. 검은 연기 자욱한 화산 폭발 장면을 TV를 통해 보았고, 97년말 IMF 구제금융으로 우리나라의 수많은 실직자들이 지하도에서 노숙하던 장면을 목도하였기에, 2008년 아이슬란드의 IMF 사태는 왠지 강 건너 불보듯 하기 어려웠다. 또한 아이슬란드는 국가명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듯 빙하의 나라가 아니던가?

아이슬란드에 입국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우리말로 된 아이슬란드 여행 정보는 거의 없었다. 유년시절, 개울가에서 눈 동그랗게 뜨고 민물새우를 잡듯이 여행 정보를 뒤졌지만, 내게 돌아온 것은 아이슬란드는 스스로 여행 경로를 짜야만 하는 나라라는 것이었다. 남한 면적의 1.1배 이지만 인구는 30만 명 남짓밖에 안 되는 나라. 30만 남짓 되는 지역구민이 우리나라 전국토에 흩어져 산다고 생각해보라. 정말 사람 만나기 힘든 나라겠다 싶었다.


아이슬란드를 여행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자동차 렌트다. 물론 버스 투어가 있지만, 비수기 때는 자동차를 렌트하는 거나 버스 투어나 비용면에서는 비슷하다. 다만 직접 자동차를 모는 수고를 감당해야 한다. 그렇다고 겁낼 필요는 없다. 서울의 4대문 안을 운전하는 것과는 비교의 의미가 없을 정도로 길은 단순하여 운전하기는 쉽기 때문이다. 네비게이션 따위도 필요없다. 그냥 지도 한 장만 달랑 들고서 아이슬란드 순환도로(Ring road)에 들어서기만 하는 된다. 차는 정말 거의 없다. 이제부터는 목적지를 향한 표지판만 보고 달리면 된다. 단 규정 속도를 지켜야 한다. 속도 위반시 과태료가 엄청나다.

자연의 경이로움에 길을 멈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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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 1번 국도 . ⓒ 손영대



맞은 편에서 오는 차를 거의 볼 수 없다. 아이슬란드의 국도에서 차창을 열고 한없이 길을 달리다 보면 경이로운 대자연의 풍경과 마주치게 된다. 웅장한 자연 경관 때문에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결국 차를 갓길에 세우고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길이 당신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하루 하루 숨돌릴 틈도 없이 일상을 살면서도 우리는 왜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앞만 보고 달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슬란드에 오면 우리는 멈출 수밖에 없다. 잠시 길을 멈추고 원시 대자연의 품에서 가슴이 뻐근하도록 폐부 깊숙히 심호흡을 한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아이슬란드 1번 국도에 서면 누구나 한 번 쯤은 이런 상념에 젖을 법도 하다. 바로 이것이 아이슬란드가 내게 주는 질문이다.

길을 계속 달리다 보면 아이슬란드 국립공원에 도착한다. 비록 국립공원이지만 기념품점 하나 뿐이다. 매점 하나 찾을 수 없다. 오전에 호스텔 주방에서 직접 준비해온 주먹밥을 먹고 빙하 계곡 쪽으로 발걸음 가볍게 걸어간다. 성수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빙하 트레킹을 한다고 한다. 하지만 비수기에 그곳을 찾아서인지 관광객도 거의 없어 빙하 트레킹은 하지 못했다.


나는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에 불시착한 듯한 착각에 빠진다. 눈 덮인 산과 빙하. 화산재가 부서져 쌓인 검은 자갈길을 걷는다. 몇 년 전 빙하 사이의 틈에 빠져 독일인 여행객 두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무서운 곳이다. 잔인한 곳이다. 아름다운 꽃일수록 가시를 숨기고 있듯, 대자연은 항상 웅장하고 아름다운 그 품 속에 무시무시한 죽음의 늪을 지니고 있는 것인가? 아름다움은 항상 치명적일 수밖에 없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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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 국립공원 . ⓒ 손영대



거대한 빙하 앞에 서면 인간도 그저 한 알의 자갈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느껴진다. 죽어지면 인간 존재도 대자연의 품으로 돌아갈 뿐이다. 검은 자갈길과 하얀 빙하의 조화. 무채색의 대자연 앞에서 인간 존재는 얼마나 하찮은가. 위엄이 가득한 빙하 앞에서 움츠려 있다가 터벅터벅 돌아나오는 길. 자갈과 모래로 뒤섞인 길에서 내 눈을 사로잡는 농염한 꽃 한 다발. 잿빛 길가에 핀 이름모를 연분홍 꽃이 유혹하듯 내 발걸음을 붙잡는다. 아름다움은 이처럼 항상 느닷없이 가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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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재를 뚫고 핀 연분홍꽃 . ⓒ 손영대



빙하의 추억, 빙하기의 그리움

요쿠살론은 아이슬란드를 대표할 만한 그림이다. 그림 같은 풍경이다. 설산의 빙하는 수천 년 동안 녹지 않았다는데 최근 들어 급속히 녹고 있다고 한다. 지구 온난화 때문이다. 빙하가 녹은 물이 강물이 되고 채 녹치 못한 빙하는 강물 위에 둥둥 떠 다닌다. 그 강물과 빙하가 함께 어깨를 걸고 유유히 북대서양으로 흘러든다.

수륙 양용 보트를 타고 빙하에 좀더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보트를 운전하는 구릿빛 피부의 선장은 벌써 20년째 길잡이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스물 세 살의 아이슬란드 청년은 벌써 삼 년 째 가이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같은 일을 반복하니 지루하거나 힘들지는 않나요?"
"저도 이 일을 하기 전에는 도시에 대한 동경이 있었죠. 그래서 고향을 떠나 도시에 갔었어요. 하지만 몇 년 지나니 도시 생활에 염증이 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왔어요. 저는 하루 하루가 즐거워요. 고향으로 돌아온 후 가이드 생활에 후회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빙하는 나의 고향과 같은 곳이죠."

아이슬란드의 수도인 레이캬빅은 아름답고 소박한 소도시이다. 경쟁을 부추기고 성과를 강요당하는, 피로한 서울살이를 해본 우리 한국 사람들이라면, 수도 레이캬빅은 아담하고 한적한, 어쩌면 우리가 꿈꾸는 도시일 수도 있다. 하지만 털이 수북한 아이슬란드 청년은 가슴 속 깊이 자연에 대한 사랑과 경외를 품고 있는 듯하다. 그에게 빙하 조각은 다이아몬드와 어슷비슷한 가치를 지닌 것인지도 모른다. 빙하 한 조각이나 다이아몬드 한 조각이나 모두 자연에 깃든 것이니까. 나는 그 청년의 천진한 미소가 부럽기도 하고 한편 은근히 얄밉기도 했다. 나의 고향은 도시이므로. 그래서 나는 고향이 없다. 아니 고향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고향은 혼곤한 새벽꿈 속에서만 제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데 자연 속에 있으면 마음 차분해지는 이유는 뭘까? 빙하기 시절에 대한 그리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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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쿠살론 . ⓒ 손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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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쿠살론 해변 . ⓒ 손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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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몬드같은 빙하 조각 . ⓒ 손영대


신용카드 사회, 성과사회, 신용사회

아이슬란드의 숙소는 크게 호텔, 호스텔, 게스트 하우스, 농장 민박으로 나눌 수 있다. 농장 민박집도 주인과의 이메일을 통해 숙소를 예약할 수 있다. 예약 보증금도 필요 없다. 내가 지구라는 행성에 깃들어 살고 있는 이 시대는 한편으론 정말 기막힌 시대가 아닐 수 없다. 단 한 통의 이메일을 통해 아이슬란드 농장 민박 예약이 가능하다니...게다가 더욱 놀라운 점은 거의 모든 농장이 신용카드로 숙박비 결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이슬란드는 어디에서든 단 돈 몇 천원의 소액이라도 신용카드 결제가 가능한 나라다. 나는 열흘 동안 아이슬란드를 여행하면서 단 돈 1원도 현금을 쓰지 않았다. 100% 플라스틱 카드 한 장으로 해결했다. 그렇다고 내가 신용카드를 남발한 것은 아니다. 우리 부부는 배낭여행으로 단련된 사람들이니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모름지기 신용사회라면 공동체 구성원간 서로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신용카드란 빚이다. 빚으로 신용을 거래한다. 이런 사회는 신용을 지킬 것라는 사회적 약속이 전제되어야 성립한다. 그런데 신용카드 사용을 권장하는 한국과 아이슬란드 두 나라 모두 IMF 구제금융을 신청한 쓰라린 경험이 있다. 빚으로 쌓은 환상의 탑은 잿빛 모래성과 같아서 파도가 밀려오면 도미노처럼 무너질 수밖에 없다. 남는 것은 치욕과 고통뿐이다. 왜 우리는 자연을 등지고 숫자가 난무하는 차가운 메트릭스에 갖혀 성과에 목을 매며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가? 정녕 다른 삶의 방식은 가능하지 않은 걸까? 그날 밤, 난 피로한 성과사회를 마음 속에서 지우며 한 마리 아이슬란드 야생마를 꿈꾸었다.

꿈꾸고 있는가
바람에 갈기를 맡긴 채
회색 하늘 아래
푸른 이끼를 뜯는
아이슬란드
말 울음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가

오후 늦게 도착한 민박집. 60대 여주인이 우리를 친절하게 맞아 준다. 자식들은 도시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고 농장 주인 노부부는 고향에 남아 농사를 짓는다고 한다. 이곳에서 나고 자라면서 한 번도 고향을 떠나본 적이 없다는 주인 할머니는 독실한 루터교 신자이다.

숙소 주변의 넓은 밭에 자유롭게 방목된 말과 양들을 흔히 볼 수 있다. 특히 오후가 되면 농장 우리 밖의 너른 마당으로 가축들이 쏟아져 나와 따사로운 햇살과 시원한 바람을 만끽한다. 우리네 시골도 그렇지만 역시 시골 노인들은 참으로 푸근하고 따뜻하다. 친절한 웃음은 자본주의적 가식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몸에 밴 생활이다. 영국의 작가 '잔 모리스'가 친절당(Kindness Party)을 만들자고 한 이유도 짐작이 간다. 친절은 다가올 미래의 시대정신인지도 모른다.

비수기인지라 총 6개의 더블룸이 있는 민박집이었지만, 우리가 도착한 날은 손님이 우리 부부밖에 없었다. 주방이 있는 민박집이었기에 이곳에 도착하기 전 우리 부부는 '보너스'라는 저렴한 마트에서 식재료를 준비해왔다. 설산의 계곡을 흘러내리는 빙하가 보이는 아담한 부엌에서, 우리는 따뜻한 저녁밥을 지어 먹었다. 성찬이 따로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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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장 게스트하우스 . ⓒ 손영대


길을 찾기 위해 헤매지 말라

누군가 말했다. '여행은 길 위에서 완성된다'고. 생각해보면 당연한 말인지도 모른다. 여행이라는 말 자체가 '길을 다니는' 것이니까. 하지만 나는 적지 않은 여행 편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슬란드에 오기 전까지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여행은 도처에 놓여있다. 출퇴근 지하철 안에서 만나는 익명의 사람들도 지금 여행 중에 있다. 그들이 풍기는 땀 냄새, 음식 냄새, 입 냄새에는 그날 하루의 노곤한 일상이 담겨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을 받은 여자의 망설임 속에도, 열심히 공부했으나 좀처럼 오르지 않는 성적 때문에 고민하는 수험생들의 한 숨 속에도, 재계약 날짜가 다가오는 세입자의 근심어린 표정 속에도, 군입대를 앞둔 대학생의 술냄새 풍기는 입김 속에도, 회식을 마치고 막차를 탄 회사원의 불안한 미래 속에도, 일상의 노곤한 여행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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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길스타디르 가는 길 . ⓒ 손영대


풍경은 풍경일 뿐이다. 사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내면의 풍경이 아닐까? 화산재처럼 타버린 일상의 풍경을 뒤고 하고, 눈 덮인 산 속을 헤매며 함께 길을 가다보면 또 다른 길이 만들어질 터이다. 그 길 속에서 잊지 못할 내면의 풍경을 만드는 것. 그것이 여행의 참 의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산은 말이 없다
산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은
우리 사람들의 몫이다

바람은 말이 없다
바람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은
우리 사람들의 몫이다

물은 말이 없다
물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은
우리 사람들의 몫이다

사람들은 말이 많다
사람들의 소리를 가려 들어야 하는 것도
우리 사람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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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 피요르드 . ⓒ 손영대

덧붙이는 글 | '여행사연 쓰고 공정여행 가자!' 응모 글입니다.


덧붙이는 글 '여행사연 쓰고 공정여행 가자!' 응모 글입니다.
#아이슬란드 #레이캬빅 #배낭여행 #빙하 #배낭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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