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인 아이가 눈을 뜬 절에서 '가카'를 생각한다

[노래의 고향⑩] <천수대비가>

등록 2012.08.13 11:40수정 2012.08.17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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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도 심청각 북쪽에 세워져 있는 심청 동상. 물로 뛰어들기 직전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 정만진

심청은 백령도 북쪽에서 물속으로 뛰어내린다. 죽었다가 살아난 심청은 이윽고 왕후가 된다. 딸이 살아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심봉사는 놀랍게도 눈을 뜬다. 눈으로 직접 보아야만 믿을 수 있었던 아버지의 마음이 기적을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앞을 보지 못한다면 얼마나 답답할까? 그래서 사람들은 심청의 아버지 심학규를 봉사로 설정했다. 만약 심청의 아버지가 맹인이 아니라면? 고전소설 <심청전>은 훨씬 재미가 덜할 터이다. 문자가 없던 시대의 사람들은 입에서 입으로 설화와 소설을 전파하면서 이야기의 구조를 그렇게 다듬어갔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눈먼 아이 희명 이야기

삼국유사에도 유명한 맹인 이야기가 나온다. '분황사 천수대비(千手大悲) 맹아득안(盲兒得眼)' 설화다. 세상을 환하게[明] 보는 것이 꿈[希]인 맹인 여자아이 희명(希明)이 설화의 주인공이다.

경덕왕 시절, 서라벌 한기리에 희명이라는 여자 아이가 살았다. 아이는 태어난 지 5년째에 갑자기 눈이 멀어 맹인이 되었다. 희명의 어머니는 아이를 안고 분황사 좌전(左殿) 북쪽 벽에 그려져 있는 천수관음(千手觀音) 앞으로 나아갔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노래를 지어 부르며 빌게 했다.

무릎을 세우고 두 손바닥을 모아
천수관음 앞에 비옵니다.
1000손과 1000눈 하나를 내어 하나를 덜기를,
둘 다 없는 이 몸이오니 하나만이라도 주옵소서.
아아! 나에게 주옵시면, 그 자비 얼마나 클 것인가.

그렇게 노래를 지어 부르자 멀었던 눈이 떠졌다. 놀랍게도 희명은 앞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살아 돌아온 심청 앞에서 그 아버지 심학규가 번쩍 눈을 뜬 채 환호하였듯이, 희명은 어머니의 품에 안겨 줄곧 맑은 눈물을 쏟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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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 석탑 ⓒ 정만진


천수대비 벽화는 없어도 최초의 전탑 보는 즐거움

경북 경주 분황사를 찾아간다. 분황사 서쪽 벽에 있었다는 솔거의 관음보살상 벽화를 보러 가는 길이다. 앞에 엎드려 향가 <천수대비가>를 부르면 맹인이 눈을 뜨게 된다는 천수대비 벽화는 그러나, 분황사 불전과 함께 사라져버려 흔적도 없다. 나는 맹인이 아닌데도 분황사 불상 벽화를 볼 수가 없다.

그래도 분황사에는 온 국민적 관심을 끄는 '국보 30호'가 살아남아 있으니 불행 중 다행이다. '분황사 석탑'이 바로 그것이다. 본래 7층이나 9층이었을 것 같은 분황사 석탑은 벽돌처럼 깎은 돌들을 쌓아 세운 탑이다. 따라서 언뜻 보면 벽돌탑 같지만 사실은 돌탑이다.

벽돌[塡]탑을 본떠[模] 만든 돌탑을 모전(模塼)석탑이라 한다. 분황사 탑은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모전석탑이다. 현재 남아 있는 것만으로 보면 9.3m 높이로, 신라 선덕여왕 때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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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 석탑의 감실 입구 ⓒ 정만진




세 마리 용이 변해 물고기가 된 우물


분황사에는 역사를 자랑하는 우물도 남아 있다. 신라 사람들이 사용했던 유서 깊은 우물로 삼룡변어정(三龍變魚井)이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세 마리의 용이 물고기로 변한 우물이라는 뜻이다.

본래 이 우물에는 신라를 지키는 세 마리 용이 살았다. 그런데 795년(원성왕 11) 당나라 사신이 용들을 물고기로 변하게 만들어서 잡아갔다. 놀란 원성왕이 추격 군사들을 보내 빼앗아 왔다. 우물 옆에는 1101년(고려 숙종 6)에 세워진 화쟁국사(원효)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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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에 남아 있는 신라 시대의 우물 ⓒ 정만진

분황사는 선덕여왕이 재위 3년, 즉 634년에 세웠다. 그런데 분황사는 이름만으로도 선덕여왕이 창건한 사찰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분(芬)은 '향기롭다', 황(皇)은 '임금'이다. 향기로운 임금! 바로 선덕여왕이다.

분황사에 간다. 신라의 태고를 보여주는 고찰과 벽화는 없지만, 초롱초롱 맑게 어머니를 바라보는 희명의 눈빛이 환하고, 선덕여왕의 향기가 은은히 흐르는 분황사에 간다. 기도를 한다고 해서 맹인이 눈을 뜰 수 있게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아는 현대인으로서, 향기는커녕 악취를 풍기는 천민 자본주의 국가의 최고 지도자를 날마다 보면서, 가끔 이렇게 분황사 뜰을 거니는 즐거움은 이루 말로 다 나타낼 수 없는 삶의 여유다.

덧붙이는 글 | < TNT뉴스 >에도 송고할 예정입니다


덧붙이는 글 < TNT뉴스 >에도 송고할 예정입니다
#분황사 #천수대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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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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