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티 바람' 남자들 안달나게 한 '국물'의 정체

[공모-나는 세입자다] '죽이고 태우는' 동네에서 세입자로 산 이야기

등록 2012.10.04 14:36수정 2012.10.05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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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와 참여연대, 생활정치실천의원모임이 함께 '나는 세입자다' 기사 공모를 실시합니다. 가슴 아픈 혹은 깨알 같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기사를 기다립니다. 세입자와 관련된 사례라면 어떤 것이라도 좋습니다. 반지하나 옥탑방 이야기도 좋고 해외에서 경험한 사례도 환영합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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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옥스퍼드 거리. 알바하던 곳. ⓒ 윤솔지


"너의 상황은 참 안됐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등록금을 못 내면 우리 학교 학생으로 간주할 수 없다. 그러므로 기숙사에서 나가줘야겠다."

대한민국이 IMF로 망했을 때 등록금을 못 내 쩔쩔매고 있는 나에게 내려진 대학 기숙사의 '얄짤없는' 퇴출선고. '한 번만 봐주라. 어떻게 안 되겠니?'와 같이 융통성 있게 넘어가는 상황은 꿈도 꿀 수 없는 영국 문화. 학기가 시작되는 9월까지는 방을 비워줘야 되는, 지구가 멸망할 거라던 1990년대 말 8월의 어느 날.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딱히 답은 없고 그렇다고 타지에서 버틸 만한 방법이 딱히 떠오르지 않은 채 런던 중심가에 있는 옥스퍼드 스트릿(Oxford Street)의 식당과 호텔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기약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그 지역은 여러 가지 이유로 런던에 온 외국인들로 붐볐는데 그 중 한 명인 내가 맥주 한잔으로 우울함을 달래던 허름한 맥주집 구석에서 눈에 띈 하얀 종이 한 장.

플랫메이트 구함. 일주일에 40파운드. 위치 킬번(Kilbu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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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의 뒷골목 ⓒ 윤솔지


룸메이트는 방을 함께 쓰는 것이지만 플랫메이트는 집을 같이 쓰는 것이다. 영국은 일반적으로 '일주일에 얼마' 하는 식으로 월세를 표현하는데, 일 주일에 40파운드면 한 달에 대략 160파운드 언저리를 지불하면 된다. 지금으로 하면 40만 원 정도 하는 가격이지만 그때 당시에는 원화 가치가 너무 떨어져 체감은 세 배 정도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싼 아르바이트라 해도 그 정도는 간당간당하게 메울 수 있었다. 사실 그때는 더 이상 파운드를 원화로 환산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망한 화폐였으니까.

'킬번, 죽이고 태우는 동네.(L을 중간에 살짝 넣으면 Kill burn) 이름 하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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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영국 거리 ⓒ 윤솔지


속으로 생각하면서 동네를 알아봤다. 흔히 런던의 거리에는 길에 노숙자들이 한두 명이 자리잡고 구걸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곳은 심지어 노숙자도 없을 만큼 가난한 동네였다. 하지만 런던의 중심에 있다는 것과 보기 드물게 싼 가격은 나의 호감을 끌기에 충분했다. 사실 그때 물불을 가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지라 주저 없이 전화를 했고 어설픈 영어 발음의 남자가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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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이런 곳에 살다 ⓒ 윤솔지


"맞아. 방 두 개가 복도 반대쪽에 있어. 한 개는 조금 큰데 그건 나와 내 룸메이트가 쓰고 있고, 작은 방이 하나 남아. 그리고 부엌이 딸린 거실이 넓어."

솔직히 하나하나 말해주는 그의 말투에 신뢰가 한 번에 가버린 나는 '우리 지금 만나. 당장 만나!' 말하고 그를 만나러 킬번으로 갔다. 브라질에서 왔다는 그를 따라 길가에 있는 이층집 2층에 있는 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복도의 카펫은 다 찢겼고 문은 삐걱거렸다. 내 방은 2명이 쓰던 스프링이 튀어나온 이층침대가 있는, 옷장도 거울도 없는 방이지만 괜찮았다. 거실과 정사각형의 작은 텔레비전, 그리고 엉덩이 자욱이 움푹 패인 소파, 그나마 욕조가 있는 욕실. 이 정도면 살 만하다는 생각에 그날 밤에 보증금(영국에서는 보통 두 달치 월세를 보증금으로 정한다)을 빌려 지불하고 바로 입주했다.

기숙사에서 쫓겨나고, 브라질 남자들 집에서 셋방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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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련된 듯한 보통 영국 밤거리 ⓒ 윤솔지


런던에 온 지 2년 정도 되었다는 서른이 넘은 에디슨과 나와 비슷한 20대의 리카르도는 매일 15시간 정도 일했다. 영어학원은 가지 않고 비자 연장하는 수단으로 등록만 해놓는 듯했다(그때는 그 용도로만 존재하는 영어학원들이 성행을 했다). 평소에 그들 얼굴을 볼 일도 별로 없었을 뿐더러 나 또한 바빠서 집이 구질구질한 것만 제외하면 나름대로 견딜 만했다.

모두가 쉬던 월요일 낮. 뜨거운 물에 푹 담그면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먼저 들어간 에디슨은 무엇을 하는지 한참 동안 소란스러웠다. 에디슨이 나오고 나서 욕실에 들어가보니 욕조에 옷들이 하나 가득 세제와 함께 넘칠랑 말랑 넘실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거실에 나가보니 에디슨과 리카르도가 사각팬티만 입고 돌아다니면서 오븐에 해놓은 브라질 음식을 먹으면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온몸이 털로 가득한 그들은 창피하지도 않은지 멀뚱멀뚱 바라보면서 포크를 건네며 같이 먹겠느냐고 묻는다. 1층에 빨래방이 있음에도 자기네는 돈을 아끼려 이런 식으로 빨래를 한다며 우쭐해하기까지 했다.

먼지 가득한 카펫 위에서 맨발로 식사를 하는 두 남자. 그 뒤에 쓰레기통을 대신해서 놓인 까맣고 커다란 쓰레기 봉투. 텔레비전 소리와 오븐 옆 라디오 소리까지 뒤섞여 정신까지 혼미해졌다. 뭔지 모르게 화가 났지만 뚜렷이 뭐가 어디서 잘못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내 위치가 이 정도까지 왔구나 하는 자책도 들어서 그냥 내 방으로 쏙 들어가서 한참을 웅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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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차이나타운 ⓒ 윤솔지


심지어 에디슨은 노크도 없이 내 방 문을 불쑥 열고 '전기세를 내라, 통화 명세서가 나왔으니 본인이 쓴 것은 돈을 내라' 등 요구사항을 말하기 시작했고, 신경은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졌지만 나는 소심했기에 쌓아두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물김치가 너무 먹고 싶었다. 한국인 식당에 가서 레시피를 알아낸 다음 차이나타운에 가서 재료를 잔뜩 사왔다. 재료는 많은데 물김치를 담글 통이 없어서 세숫대야 세 개 정도를 여기저기 집구석에서 찾아내서 깨끗이 씻어낸 다음, 들뜬 마음에 물김치를 완성하고 거실 구석에 놓아둔 다음 랩으로 덮어놨다. 거실에는 커튼이 없었던 지라 햇살을 받아 물김치는 발효가 잘되고 있었다.

그날도 여전히 에디슨이 문을 열고 심각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너, 거실에 저거 뭐야? 세숫대야에 있는 식물하고 물, 걔네 썩어가잖아. 거실에서 화장실 냄새 나잖아. 역겹다고! 저거 어서 치워."
"뭐가? 아! 저거! 김치라는 건데, 저게 지금 발효가 되는 거야. 김치라는 음식은 항암효과에 최고야. 얼마나 몸에 좋은데. 저걸 꾸준히 먹으면 100살까지도 살 수 있어. 일본이나 한국사람들 장수하는 거 너 알고 있지? 다 그게 김치 덕분이야."

무슨 생각이었는지 나는 일본까지 엮어서 과장을 했고 에디슨은 갸우뚱했지만 제발 물김치를 치워줬으면 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이튿날 통 몇 개를 사와서 친구들에게 물김치를 나누어주고 통 하나에 내 것을 담아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야금야금 아껴 먹고 있었다.

며칠이 지난 한밤중에 집이 소란스러웠다. 고국에 있는 에디슨과 리카르도의 친구들이 런던에 와서 일하면서 정착하겠다고 왔다고. 집을 구할 때까지만 넓은 거실에서 자겠다고 했다. 그들은 침낭도 가지고 왔다. 세상에! 남자 다섯 명이 굼벵이처럼 침낭 속에 들어가서 거실에서 뒹굴거리며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있는 그 상황이란! 게다가 다들 넉살도 좋고 인사성까지 밝아서 화를 내기도 민망한데 번뜩이는 생각이 났다.

'그래! 다들 잠들었을 때 물김치를 꺼내놓는 거야!'

그래서 모두가 잠들었을 때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거실에 나가서 냉장고에 있는 물김치를 꺼내서 그들의 머리맡 선반에 뚜껑을 열어 올려 놓고 얼른 내 방으로 돌아와서 숨죽여 키득거리다 잠이 들었다. 선잠에 거실에 왔다 갔다 하는 소리, 자기네들끼리 뭐라 뭐라 하는 소리가 들리다가 이윽고 조용해지는 것까지 신경쓰면서, 내일이면 그들이 내 권리도 존중해주기를 희망하면서.

물김치 국물에 달려드는 '침낭 속 굼벵이들'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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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킬번의 대충 이랬던 방 ⓒ 윤솔지


이른 아침 맑은 기분에 거실에 나가보니 그들은 그대로 자고 있었고 선반에 놓아둔 내 물김치를 보니 건더기가 사라지고 물만 덩그마니 남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어안이 벙벙한데 뒤에서 또 사각팬티 하나만 달랑 걸친 에디슨이 말했다.

"야. 너 그 음식 내 친구들 먹으라고 꺼내놓은 거야? 고마워. 냄새는 고약한데 먹어보니까 또 괜찮더라고. 그래서 남은 빵이랑 먹었지. 이제 우리는 100살까지 사는 거야?"

심지어 대화소리에 잠이 깬 침낭 속에 친구들도 부스스한 눈빛으로 고맙다고 했다. 그들이 입을 벙긋할 때마다 김치 냄새가 진동을 했고 선반에 붉게 남은 물이 가득한 통만 보였다.

"그게 아니라! 너네는 100살까지 못 살아! 왜냐면 물김치의 엑기스는 물에 있기 때문이라고!"

진짜 화나서 꽥 소리를 지른 것인데 말하는 중에 침낭 속에 있던 한 명이 얼른 일어나서 물김치 국물을 마셨고 다른 애들도 일어나서 나누어 먹으려고 안달이었다. 여전히 냄새는 고약한지 코를 막으면서도 서로 못 먹어서 안달이었다.

그 모습에 나는 웃음이 빵 터지고 말았고 그를 계기로 그들과 더 많은 대화를 하게 되었다. 여전히 헐벗은 차림으로 거실을 돌아다니는 것이나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같이 틀어놓는 것, 내 물건을 자기네 물건 쓰듯이 하는 것 등은 진절머리 나게 싫었지만 대화를 하면서 서로 한 걸음씩 물러나는 것도 배우게 됐다.

그렇게 몇 달을 살다가 기숙사에서 한 학기는 살 수 있는 환경이 되어 떠날 때는 '침낭 속 굼벵이들'과 모두 모여서 하우스 파티도 했다. 런던의 빈민가에서 브라질인들과 한국인이. 마지막으로 떠나던 날 짐을 차에 실어주면서 에디슨이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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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본 영국 런던 ⓒ 윤솔지


"너는 그래도 이제 인생이 시작이고 학교도 다닐 수 있잖아. 난 브라질에서 제일 좋은 대학교를 나왔어도 큰 희망이 보이지 않아서 서른이라는 나이에 이 고생을 하는 거라고. 우리나라도 너희 나라도 곧 좋아질 거야. 그러니깐 그렇게 만날 긴장만 하고 살지는 마."

그때 처음으로 에디슨이 가까운 삼촌 같았고 마음속이 따뜻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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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나는 세입자다' 공모, 응모글입니다.
#런던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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