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 안 하는 며느리, 미워하는 시어머니 맘 알겠어요

[공모-나의 투표권 수난기] '투표는 뭐하러 하냐'던 내가...

등록 2012.10.26 10:24수정 2012.10.26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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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와 민주노총은 '나의 투표권 수난기' 기획을 진행합니다.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는 투표날에도 특근을 합니다. 유통업·건설현장 노동자들은 물론이고 식당 아주머니·아르바이트 학생들도 비슷한 상황입니다. 일단 투표 마감을 현행 오후 6시에서 9시로 세 시간 연장하면 어떨까요? 여러 시민의 투표권 수난기가 한국 사회의 참정권 문제를 진지하게 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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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대 국회의원 선거날인 4월 11일 오전 서울 마포구 공덕동 주민센터에 마련된 제4투표소에서 유권자가 기표용지를 투표함에 넣고 있다. ⓒ 유성호


'투표 같은 걸 뭣하러 해! 밥이 나오는 것도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투표일이 되면 투표소로 줄을 지어 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각 마을마다 조금은 특별한 사연이 있는 분들, 예를 들면 팔순 노모가 아들의 등에 업혀 투표소로 향하면서 '우리나라 대통령만큼은 꼭 내 손으로 뽑고 싶다'는 열망 가득한 인터뷰를 하는 것을 볼 때면 그저 강 건너 불 구경 하듯 했던 기억이 난다.

'저렇게 열심히 뽑아놓으면 뭘 하나. 정치하는 사람들 다들 거기서 거기인데. 뭐 특별한 사람이 있으려구."

이런 불신감 때문에 투표일은 으레 '노는 날'로 정의되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후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전업주부의 삶을 사는 동안에도 나의 이런 불신은 계속되어, 투표일이 되면 남편과 시어머니를 투표소에 먼저 보내드리면서도 나는 가지 않았다. 졸래졸래 뒤만 따라 가서 쿡 도장 하나 찍어두고 오면 되는 것을, '소중한 한 표'를 몇 년 동안 허공에 날려버리고 만 것이다.

이런 나를 시어머니는 못마땅해 하셨다. 어머님이 지지하는 후보의 표 하나가 날아가 버리는 것을 안타까워하신 거다. 내가 반드시 어머님이 지지하는 후보를 선택할 것이라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어쩌면 어머님이 그러시는 모습에 반항하듯 더더욱 투표소를 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참으로 못된 며느리임이 분명하지만, 나 나름대로는 '뭐 저렇게까지 하시는가' 싶었던 것이다.

이런 나의 똥고집과 못된 성미를 알고 있는 남편은 그저 묵묵히 어머니의 눈흘김이 나에게서 걷혀지기만을 기다려주었다. 훗날 직장인이 되어 남편과 출퇴근을 함께 하게 되면서는 투표일이 되어 투표소를 향하는 남편을 나는 그저 차 안에서 물끄러미 기다리고 있기도 했다.

어차피 투표 안 하지만... "사장님, 투표는 언제 합니까!?" 


2002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일이었다. 정직원 열몇 명 남짓, 중소기업이라고도 할 수 없는 가내공업 수준의 우리 회사에서 아무리 대통령을 뽑는 투표일이라 해도 휴업을 할 수는 없었다. 그저 출근시간을 조금 늦추고 퇴근시간을 조금 앞당겨서 투표를 하고 오라고 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애당초 어차피 투표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없던 나는 출근시간을 늦추든 퇴근시간을 앞당기든 아무런 상관이 없던 터였다. 그저 어느 쪽이 되든 자투리 여유시간이 생기면 모처럼 느긋하게 쉬어볼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출퇴근 시간에 대해 아무런 이야기가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엄연히 '임시 공휴일'에 일을 하는 것인데도, 2002년 12월 19일 하루 업무에 대해 특근으로 대체한다는 공지도 없는 것이었다. 낯 뜨거웠지만, 결코 내가 물어서는 안 될 질문이었지만, 그래도 질문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럼 투표는 언제 합니까?"

우리 사장님의 너무나 현명하신(?) 답변이 내려왔는데, 투표시간이 아침 6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니 근무에 지장받지 않는 범위 내에서 투표들을 하고 오라는 것이었다. 참고로 사장님은 투표소가 문을 여는 6시에 투표를 마치고 출근을 하실 계획이라는 것이다.

아니, 새벽 4시에 일어나 꽃같이 어여쁜 따님들 교복 손질 다 마치고 오전 7시 30분이면 출근하셔서 빗자루 들고 온 공장을 쫓아다니시는 우리 사장님의 부지런함을 뉘라서 흉내조차 낼 수가 있을 것이라고, 새벽 댓바람에 투표를 하고 정상 출근을 하라니…. 이건 말도 안되는 일이라며 분노의 열기를 마음껏 내뿜으며 잠이 들었고, 이튿날 아침 너무나 당연하게도 나는 투표소 앞을 유유히 지나쳐 출근길에 올랐다.

먹고사는 일이 우선이지 대통령 뽑는 일이 뭐가 대단하냐고. 나 하나쯤 투표하지 않는다고 될 사람이 안 되고, 안 될 사람이 되겠느냐 빈정거리기까지 하면서 7시 30분 정각에 공장에 딱 도착을 하였다.

얼결에 한 첫 투표... 이제는 개표방송까지 '본방 사수'

"김 주임 투표하고 왔어?"

오후 4시를 약간 넘기면서 사장님이 문득 물어오셨다.

"아~니요!"

뭐가 그리 당당했을까. 나는 일부러 "아" 자를 길게 길게 늘어뜨리며 대답하였다. "왜?"라고 나무라듯 채근하시는 사장님의 다음 말씀에는 역정마저 묻어나는 듯하였다. 그래서 '여기에 우리 시어머니 같은 분이 또 있었군'하는 마음에 어깃장마저 놓고 싶어져 "저 원래 투표 안 하는데요"라고 해버리고 말았다. 나 스스로 한 나라 국민의 주권을 포기한 것을 만천하에 대놓고 알리는 순간이 되고 만 것이다.

오후 5시가 지나가면서 슬금슬금 걱정이 되기 시작하였다. 그날 따라 출근길에 함께 나오시면서 저녁에 들어오는 길에라도 한 표 찍어주고 오라 당부하시던 어머님 목소리가 귀에 쟁쟁했다. 아무것도 안 한 상태로 집으로 들어가면 대놓고 서운해 하실 어머님을 어떻게 보나 싶기도 하였고, 평생 단 한 차례 투표라고는 해본 적도 없는 내가 천연덕스럽게 투표를 하고 왔노라 거짓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저 사장님! 아무래도 투표를 안 하고 나온 것이 꺼림칙한데, 죄송하지만 일찍 퇴근시켜주시면 안 될까요?"

그리하여 오후 5시 57분, 가까스로 투표소에 도착했고, 당당하게 투표를 마쳤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뿌듯해지는 것이, 태어나 처음 나라를 위해 뭔가를 한 것만 같은 우쭐함이 생겨났다. 집을 향하는 발걸음에 담뿍 기운이 들어간 것도 느낄 수가 있었고, 그날 저녁 내내 내가 찍은 후보의 득표율을 보느라 늦도록 잠자리에 들지도 못하였다. '아! 이런 것이구나. 내 나라 국민으로서 투표권을 행사하는 마음이 진정 이런 것이구나' 깨달았다.

그 후로는 투표일이면 회사에서 출퇴근 시간에 여유를 주든 안 주든, 유급공휴일로 처리해서 특근수당을 주든 안 주든 나는 무조건 투표를 한 후 출근길에 오른다. 그리고 저녁에는 열심히 개표방송을 시청한다. 내가 선택한 후보가 당선되기를 기도하고, 나의 한 표가 올바른 선택이 되기를 바라고, 더불어 내 나라가 올바른 길을 가는 데 일조를 하였다는 보람과 주인정신을 늘 잊지 않게 되었다. 투표는 국민이 주인정신을 느끼기에 가장 '짱'인 애국적인(?) 시스템이다.
덧붙이는 글 '나의 투표권 수난기' 응모글입니다
#투표수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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