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책 보며 웃고 우는 엄마... 그걸로 만족했다"

[인터뷰] 등단 11만에 첫 시집 <벚꽃문신> 펴낸 박경희 시인

등록 2012.12.24 14:46수정 2012.12.25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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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미래파'라고 불리는 사조와 해체시들이 대거 등장하여 주목을 받고 있는 지금 우리의 문단에서는 서정시나 이야기 시들은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한다. 분명 시대는 변했고 독자들의 입맛도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미래파와 같은 새로운 시의 등장과 활약이 기대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것이 더 좋다거나 옛것이 더 좋다거나 이런 순위를 매기기는 것은 전혀 무의미하다. 디지털과 아날로그 중 어느 것이 전적으로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시를 습작한 지 19년 만이고 등단한 지 꼬박 11년 만에 첫 시집 <벚꽃 문신>을 내놓은 박경희(39) 시인은 지금은 주류 시단에서는 보기 드물게 서정적인 이야기 시를 쓰는 시인이다. 그녀의 고향인 보령을 배경으로 질척대고 질박한 삶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이번 시집을 '향토시'라고 부른다면 이건 결례일 수 있겠지만 시인은 타지에 떠돌았던(?) 시간들조차도 결국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음을 확인시켜주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최하는 2012년 4분기 우수문학도서에 선정되기도 한 시집 <벚꽃 문신>의 박경희 시인을 지난 17일 대전 삼성동 도서출판 심지 사무실에서 만났다.

"가족에 대한 미안함, 내 스스로에 대한 기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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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희 시인 도서출판 '심지'에서 만난 박경희 시인 ⓒ 국은정


- 먼저 이번 시집이 우수문학도서에 선정된 걸 축하하고, 인터뷰에 응해주신 걸 감사드린다. 등단한지 몇 만에 낸 첫 시집인가.
"2001년 <시안>으로 등단하고 11년 만에 첫 시집을 냈다. 습작을 시작한 지 19년 만이다."

- 등단하고 첫 시집까지 꽤 긴 시간이 걸렸다. 길어질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나는 스스로가 '투고 인생'이라고 생각을 한다. 운이 없었다기보다는 실력이 없었다. 고2 때부터 신춘문예에 투고를 했는데, 그땐 어려서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것이 오래될수록 투고량이 엄청나지고 나중에는 꿈까지 꾸게 되었다. 원고를 잃어버리는 꿈을 꾸면 계속 떨어졌다.

그러다보니 어느 때부턴가 투고에서 떨어지는 걸 즐기게 되더라. 이건 하나의 모험이다. 투고를 해서 떨어지면 '내 기량이 이것뿐이구나!' 생각을 하고 다음번엔 더 신경을 썼다. 워낙 투고를 자주 하니깐 출판사에서 블랙리스트라는 얘기도 들었다.(웃음) 희한하게도 포기나 절망은 없었고 '이번에 안 되면 다음에 되겠지'라는 생각을 했다."


- 시를 쓰게 된 계기는?
"어머니 영향을 많이 받았다. 어머니가 아가씨 시절에 책을 엄청나게 읽으셨다고 한다. 조그만 동네 서점의 책을 몽땅 읽으실 정도로. 그런 어머니 덕분에 어릴 땐 원하지 않는 독서를 강요당했다. 책 읽기를 싫어해서 책을 뜯어먹을 정도였다.(웃음) 그땐 엄마처럼 되는 게 싫었다. 그러던 중에 사춘기가 왔고, 그때 한창 '하이틴 소설'이 유행이라 나도 그렇게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이틴 소설을 읽고 또 그런 류의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20살 때 박용래 선생님의 시집 <먼 바다>를 보게 되면서 시와 문학에 진지하게 빠져들었다. 그 후로 백석 시인의 작품도 보게 되었다. 큰 파도가 와서 가슴을 부딪치듯 '헉' 했다. 그 무렵 안학수 시인을 만나게 되어서 계속 창작을 하게 되고 여기까지 왔다."

- 감수성 많던 한 소녀가 이렇게 첫 시집을 세상에 내놓기까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등단했을 때와 지금 첫 시집을 내놓은 이 시점에서 달라진 점은?
"그땐 천방지축이었다. 그땐 나름대로 깊이 있게 들어갔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첫 시집을 내놓은 지금은 그저 시에게 고맙다. 처음에 시집을 보았을 때 내 글이 아닌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의 글을 대하는 느낌이 들었다. 내방 서재에는 작은 부처님이 모셔져 있는데, 그 부처님께 하듯 그렇게 시에게 무릎 꿇는 마음이 되었다.

등단할 때랑 지금은 시를 대하는 태도가 천지차이다. 시는 내 삶이 온전하게 들어가 있고 그러므로 인해서 내 가족에게 너무너무 미안하고. 나로 인해 가족의 비화들이 밝혀지니깐. 그런 것들 때문에 가족에 대한 미안함, 내 스스로에 대한 기특함도 있다. 그 오랜 시간을 하나만 보고 달려온 게 내 안에 있는 박경희에게 고맙다는 생각을 했다."

- 가족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시들이 많아 보인다. 첫 시집을 받고 가족들의 반응은 어땠나?
"시집이 도착하자 엄마가 무 썰다 말고 칼을 집어 던지고 나갔다. 마치 내 심정을 엄마가 대신 느끼는 중첩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일을 다 마치고 저녁에 하나하나 읽으시면서 당신 얘기니깐 막 우시더라. 새벽에 깔깔깔 웃기도 하시고. 엄마에게 감사했다. 결혼하고 30년째는 책을 놓으시고 그 후로는 책을 안 읽으셨는데 내 첫 독자가 되어 웃고 울고 했다는 것만으로 나는 만족을 했다.

솔직히 가족들이 집안의 치부를 드러낸다고 타박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감싸주더라. 동생들도 나와 같은 감정과 사건에 휘말렸기 때문에 안아주는 걸 느꼈다. 정말 고마운 사람들이다. 자기 상처를 긁어먹고 사는 길을 간다고 걱정했는데… 고향을 떠나 10년을 밖으로 떠돌아서 그랬는지 오히려 더 가족들이 그리웠던 것 같다."

"'진짜'가 아니면 진실한 시나 글이 나올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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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희『벚꽃문신』 실천문학사 出 2012년 우수문학도서 선정 ⓒ 실천문학사

- 가장 마음이 가는 시는?
"시집 제목으로도 쓰인 <벚꽃 문신>이 그것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학교 끝나고 걸어서 오고 있는데 밭에서 일하던 아주머니가 아버지 사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내내 다리가 후들거렸다. 경운기 바퀴에 낀 등에 피가 분수처럼 솟고 있는데 어려운 형편에 병원에도 못 가고 그 피를 수건으로 닦고 계셨다. 그때 등에 커다란 자국이 남으셨다. 셋방에서 가족들끼리 운 기억밖에 없다. 가슴이 먹먹했다. 그 후로 아버지는 목욕탕에 한 번도 안 가셨다. 사고가 나던 4월만 되면 상처가 아프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이십 년 넘게 목욕탕에 간 적이 없다
아들에게 등을 맡길 만도 한데
단 한 번도 내어준 적 없다
아버지의 젊은 날이
바큇자국으로 남아 있는 한
자식들에게 보여줄 수 없는 등
경운기와 사투를 벌이며
빨려 들어가는 옷자락을 얼마나 붙들었던가
논바닥에 경운기 대가리와 뒤집어졌을 때
콧구멍 벌렁거려며 밥 냄새에 까만 눈 반짝이던
삼 남매의 얼굴이 흙탕물에 뒹굴었으리라
바퀴가 등을 지나간 뒤
울지도 못하고 깨진 창문에 덧댄 비닐처럼
벌벌 떨었다
방문 틈으로 새어 나오는 앓는 소리를 들으며
개구리처럼 눈만 끔벅이다가
부엌 구석에 쪼그려 앉아 졸았다
경운기와 씨름한 샅바가 붉게 물들어
아버지 등에 감겼다, 병원에 가자고
등에 손을 얹은 어머니의 눈물
뒤집어지던 꽃잎 훌러덩훌러덩
등에 새겨졌다
- p.28 <벚꽃 문신>

- 스스로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것도 쉬운 것은 아닌 듯싶다. 더 나은 단계로 나아가지 위해서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 알고 싶다.
"시가 안 될 때는 항상 내 삶을 봤다. 부모님은 대학에서 문예창작학과를 전공하고 다녀오면 작가가 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셨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뤄놓은 것 하나 없이 다시 다락방으로 들어가야겠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그때 어머니가 우셨다, 용달차에 책만 끌고 내려왔으니까. 용달 비용까지 부모님께 의지해야 했다.

그때의 내 삶이 비루하고 곤궁하게 느껴졌다. 그러고 3개월 만에 탁발순례에 참여를 하게 되었다. 짐 싸고 내려와서 3개월 동안 정말 내 스스로에게 바닥을 친 때였다. 시에 대한 무능력, 자신에 대한 무능력, 막막함 등이 있었는데…. 혼자 어딘가로 훌쩍 떠났다가 오기도 하고, 생전 처음 부모님을 두고 '죽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해봤다.

그러던 차에 안학수 시인을 통해 '생명평화 탁발순례단'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탁발순례에 참여했다. 충청남도의 모든 시골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땐 정체성이 마구마구 흔들렸다. 그때 돌아다니다보니까 그동안 가졌던 모든 것들이 오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만의 고민이었다. 나는 정말 내 스스로를 보게 되었던 거다. 현장에서 보았던 그들의 삶을 통해 그동안 내가 얼마나 가진 것에 만족을 모르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탁발순례를 하는 동안 도의 스님을 만났다. 스님이 '절에 들어가 보지 않을래?' 하고 말씀하셨다. 이미 많은 예술가, 작가들이 그 절에 머물렀다는 얘길 들었다. 첫 시집을 낼 때까지 한번 들어가보자는 권유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탁발순례를 마치고 돌아온 3일 만에 절로 들어가게 된 거다. 그런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전에는 불평했던 많은 것들을 수용하고 지금의 박경희로 오게 되었다."

- 아버지가 시집을 보지 못하고 먼저 세상을 떠난 것이 더 마음이 아팠을 것 같다. 가족이 그랬듯 지금 살고 있는 지역에게도 남다른 감정이 있을 것 같다. 어떤가?
"돌아가신 날 아버지가 남긴 말이 '딸기 먹어!'라는 말이었다. 그날 가족들끼리 모여서 즐겁게 이야기 나누고 나는 김밥 싸드렸다. 평범하고도 소소한 행복을 느꼈던 하루였는데, 그날 밤에 그렇게 떠나셨다. 아버지를 통해서 '오늘 하루만 잘 살면 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내일은 잘 안 보고, 오늘 이 순간을 잘 보면 된다고 생각한다. 워낙 큰 사건들을 겪어 가다보니깐….

내가 보물 지도 하나를 발견했다. 그 보물을 찾아보겠다고 28년 살았던 고향을 떠나 왔는데 막상 보물을 찾아보니깐 그 보물이 내가 지금 서 있는 이곳, 보령이더라. 이 자리만큼 좋은 자리가 없다. 아마 이 안에만 있었다면 안 보였을 것들이다."

- 나의 소감으로 박경희 시인의 시에는 유독 '촉각'이 강하다는 인상이 짙었다. 자칫 고루해보일 수도 있는 소재들이 선명한 이미지를 환기시키는 이유가 바로 그 촉각적 이미지의 힘이 아닐까 싶은데…. 이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그저 몸에 '밴' 것 같다. 의도된 바는 없다. 한번은 어떤 시인과 계곡엘 갔는데 다리 밑에 물고기를 노니는 것을 보고 '저것이 무엇인줄 아느냐?'고 묻기에 무심코 '피라미나 송사리?'라고 대답했는데. '저건 버들치야!'라는 얘길 듣는 순간에 무언가가 내 뒤통수를 때린 것 같았다. 시인이 모르면서 아는 척 하는 것은 남이 다 안다는 것을 그때야 깨달았다.

그 뒤에 시를 쓰려면 내 모든 몸과 감각으로 봐야 되겠다는 생각을 해서 야생화 책을 들고 산과 들로 헤매고 다녔다. 그때부터 생태공부를 하게 된 것이다. 진짜가 아니면, 스스로가 아니면 진실한 시나 글이 나올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다."

"슬프고 힘들어도 웃음과 애잔함 깔리는 시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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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희 시인 시를 습작한지 19년만이고 등단한지 꼬박 11년 만에 첫 시집『벚꽃 문신』을 내놓은 박경희(39) 시인은 지금은 주류 시단에서는 보기 드물게 서정적인 이야기 시를 쓰는 시인이다. ⓒ 정효진

- 지금까지 시를 쓸 수 있게 도움을 준 사람은 누구인가?
"너무 많다. 나를 계속 문학이라는 큰 틀 안에서 있게 한 안학수, 이정록, 최은숙, 유용주 시인 등. 문학적으로 스승으로 삼은 소설가 이문구 선생님도 그렇다. 은사이신 최두석 선생님도. 무엇보다 흔들리던 나에게 시를 쓸 자리를 내어주셨던 도의 스님도! 지금 언급하지 않은 너무 많은 분들이 실은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고마운 분들이다."

- 동시도 쓰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시와 동시를 쓸 때는 어떻게 다른가?
"시나 동시나 동급인데, 동시가 상당히 어렵다. 요즘은 조카의 행동을 유심히 본다.(웃음) 최근에는 청소년 아카데미에서 저소득 결손가정 아이들과 생활을 하다보니깐 그 녀석들은 아픈데도 만날 내 앞에서 웃는다. 자신의 이야기를 시로 써서 낭송을 하는데 선생님이라는 작자가 그걸 들으면서 꺼이꺼이 울었다.

아이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도리어 가르침을 받고 온다. 그 아이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었다. 선생님인데 오히려 그 아이들이 선생님이라고 생각했다. 내 안에 있는 어린 박경희가 이제는 밖으로 나와 뛰어놀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보는 거다. 내 안에 있는 어린 박경희…."

- 앞으로 가야할 길이 멀다. 어떤 계획들이 있는가?
"나는 이제 시작이다. 작년 1월에는 동시로도 데뷔를 했다. 내년에는 가급적이면 동시집을 내려고 한다. 소설도 습작하고 있는데 실력이 닿는다면 소설도 발표하고 싶다. 그중에서도 색다른 시집이 나오길 기대한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도 인연이 닿아야 하니까. 완성은 없는 것 같다. 늘 뭔가 부족하다. 뭔가 새로운 게 있었으면 좋겠다. 나 스스로에게 바라는 것은 지금 이 순간처럼 뭐든 하나에 열심히 했으면 좋겠다. 노는 박경희, 엄마랑 푸닥거리는 박경희!"

- 마지막으로 '시를 쓰는 박경희'에게 바라는 점은 없나?
"늘 새로운 박경희의 시를 만나고 싶다. 겨울에는 봄꽃인 개불알꽃이 피는 줄 몰랐는데 어느 순간 보니깐 한겨울인데 따뜻한 양지에 광대나물과 함께 피는 걸 보았다. 몸 비집고 나온 모습을 보면서 신비로움을 느꼈다. 내일 눈 떠서 시를 보면 새로운 시가 나왔으면 좋겠다.

누구에게나 상처와 결핍이 다 있듯 작가도 뭔가 상처를 치료 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꽹과리를 치는 상쇠라도 결국은 자신을 치유하는 법이다. 지금은 내게 주어진 것들에 웃어가면서 아무리 슬프고 힘들어도 그 안에 웃음과 애잔함이 깔리는 그런 시를 쓰고 싶다."

상처 없이 피는 꽃이 있을까. 20여 년의 긴 시간 동안 그녀는 시와 문학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다스리고 치유해왔음을 알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절망'이라고 부르는 상황에 대해서도 오히려 그것들과 몸을 부비고 뒹굴며 쓰러진 절망을 일으켜 냈던 그녀는 여린 듯하지만 강했고, 강한 듯하지만 유연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아픔들을 끌어안았고, 심지어는 삶이라는 공간에서 버젓이 공존하는 죽음들을 끌어안았다.

상처와 눈물, 죽음 등 그 어두운 그림자들이 얼마나 우리의 가까이 있는지 넌지시 말해주는 것만 같다. 그 마음이 전달되는 순간에는 인터뷰를 하는 사람에게도 뭉클한 눈물이 번져왔다. 몸에 남은 문신처럼 아픈 일들, 그 절규 가득한 삶의 치열한 현장을 목도하고도 그 기억을 벚꽃으로 치환할 줄 아는 그녀가 앞으로도 다친 영혼들을 치유해내고 보듬게 되리라고 믿으며, 그녀의 시에 해설을 붙였던 박정선 평론가의 글을 빌려 글을 마치려 한다.

절망과 혁신의 순환적 인과라는 미궁에 빠진 현대시의 상황에 비추어볼 때, 박경희 시인의 <벚꽃문신>은 색다르다. 무엇보다 독자를 당혹스럽게 하지 않는다. 물론 모든 시가 기본적으로 언어적 실험의 산물이듯이 박경희 시인의 시도 부단한 모색과 실험의 산물임은 분명하다. 그렇긴 하되 어렵지 않다. 대상을 혼란하게 비틀거나 구문을 과격하게 파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의 체형은 단아하고 언어는 담백하다. 다다가는 독자에게 고압적으로 굴지 않고, 자연스럽게 곁을 내준다. 또한 <벚꽃문신>은 재미있고 감동적이다. 그 재미와 감동은 시가 내장하고 있는 서사 자체의 진정성에서, 그리고 서사적 사선을 포착하고 풀어내는 시인의 눈썰미와 말솜씨에서 연원한다. - p.114
덧붙이는 글 <벚꽃 문신> 박경희 씀, 실천문학사 펴냄, 2012년 9월, 128쪽, 8000원

벚꽃 문신

박경희 지음,
실천문학사, 2012


#박경희 시인 #벚꽃 문신 #실천시선 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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