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밥 왜 안 주냐?"던 아버지...정말 죄송했어요

명절이면 고봉으로 올라가는 아버지 제삿밥, 이유가 있습니다

등록 2013.02.11 20:40수정 2013.02.11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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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실을 거쳐 일반병실로 가기 전 빈 병실이 없어서 응급실 옆에 잠시 머물렀다. ⓒ sxc

화장실에서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아버지가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가셨다. 수술실을 거쳐 일반병실로 가기 전 빈 병실이 없어서 응급실 옆에 잠시 머물렀다. 대기용으로 만든 것 같은 공간엔 침대가 네 개였는데, 누워있는 환자들의 머리 뒤로는 컴퓨터가 각각 놓여있었다.


초록빛 화면에서는 그래프가 계속 움직이며 삑삑거렸다. 문 밖은 복도로 이어져서 시끄러웠다. 아버지는 그곳에 일주일쯤 계시다가 가망 없는 연명치료를 한 지 한 달 만에 하늘나라로 가셨다. 병명은 알츠하이머. 아버지 연세는 87세였다.

아버지는 그동안 당신 소유로 된 땅은 아니지만 집 근처 텃밭으로 활용할 수 있는 '노는 땅'에 철따라 상추·호박·가지·고추 등 온갖 채소들이나 옥수수·고구마 등을 심고 가꾸면서 꾸준히 몸을 움직였다.

그때 나는 친정 근처에 살면서 아버지가 거둔 찰옥수수나 고구마 등을 원 없이 먹었다. 한겨울에도 제철 옥수수를 먹듯 냉동실에 얼려놓은 옥수수를 시도 때도 없이 압력밥솥에 안쳤다. 나는 아버지의 식성을 많이 닮았다. 그래선지 옥수수와 고구마는 아버지가 빠트리지 않고 해마다 심었다. 받아먹는 값으로는 드릴 수 없는 턱없이 부족한 용돈이라도 드릴라치면 허어 웃으시며 흐뭇해했다.

"내가 생각해도 난 장수할 것 같아!"라던 아버지

아버지 고구마를 맛본 이웃들은 '할아버지 고구마'를 미리 찜해놓기도 했다. 언젠가 식구들이 둘러앉아 아버지가 거둔 햇고구마의 연보랏빛 껍질을 벗겨먹을 때였다. 올해도 고구마가 잘됐다는 얘기를 나누며, 아버지는 내년에도 고구마·찰옥수수 같은 걸 더 심을 거라고 했다. 동생은 "힘드신데 이제 일을 조금 줄이세요"라고 했고, 나도 그 말에 맞장구쳤다.


아버지는 60대 중반쯤에 심근경색으로 수술을 받으신 적이 있다. 술은 원래 안 했고 담배는 그때 끊었다. 그 이후로는 다른 병치레 없이 건강하게 생활했다. 온화한 성품에 특별히 좋아하시는 음식은 냉면이었다. 여름이면 꼭 한 번, 버스를 타고 남대문시장에 가서 맛좋고 값싸고 양도 많이 준다는 '평양냉면'을 잡숫고 오는 일이 아버지의 큰 즐거움이었다.

"나는 내가 생각해도 아주 오래 살 것 같어. 나 어릴 적에 우리 고향에서는 팔십되는 양반이 돌아가셨드랬는데, 그때 사람들이 '저 냥반 참 오래 사네' 그랬거든. 허어~ 지금 내 나이가 팔십이 넘두룩 사니 내가 오래 살긴 해. 지금 같아선 나두 거져 백살은 너끈할 것 같어. 허허허..."

아버지의 일상이 농작물을 둘러보고 돌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 하는 생활이 15년쯤은 되신 것 같다. 아버지는 고향인 평남 강서에서 혈혈단신 월남했다. 젊은 시절 남대문시장에서 과일과 건어물을 취급했고, 중년엔 노동으로 목수일을 했다.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이후 목수일은 시나브로 손을 놓았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동네 빈 터에 뭔가를 심었다. 돌멩이만 굴러다니던 언덕배기 밭도 아버지 손이 가면 그럴 듯한 밭 모양새가 됐다.

"아침엔 호미랑 삽 들고 나갔는데, 저녁에는..."

어느 날, 집 근처에 있는 아버지의 제일 너른 밭에는 빨간 막대가 군데군데 세워지기 시작했다. 시(市)에서 그 터에 도서관을 세우기로 한 것이다. 아버지는 터를 내주고 집에서 멀리 떨어진 밭으로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그리고 이따금 엄마한테 연락이 왔다. 아버지가 자전거에서 넘어져 옷을 다 버리고 왔다는 것이다.

"니 아버지가 아무래도 좀 이상하시다. 아침 드시고 밭에 간다고 호미하고 삽을 들고 가셨는데, 호미만 갖고 왔지 뭐니. 삽은 어디 뒀냐니까 안 갖고 갔다는 거야. 내가 분명히 챙겨드렸는데 말이야."

엄마한테 이런 전화를 처음 받을 때만 해도 나는 '팔십 넘은 노인네가 그럴 수도 있지'라고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버지가 자전거를 타는 게 위험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당신 몸처럼 움직이던 자전거에서 넘어지는 일도 걱정되는데, 거기에 머리라도 다치면 정말 안 될 일이었다.

"아픈 데도 없는데 왜 내가 병원에 가는 거이야?"

동생이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갔다. 굳이 왜 가야 하냐고 묻는 아버지에게 건강검진을 받아야 한다고 설득했다. 아버지는 초기를 넘어가는 알츠하이머였다.

그 시기에 동생이 직장을 대구로 옮겼다. 추우나 더우나 바깥 출입을 했던 아버지는 대구에 가면서부터 할 일이 없어졌다. 혼자 민화투를 치면서 놀다가 지루하면 8층 아파트 창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차들이 오고 가는 것만 온종일 보기도 했다. 평소에 귀가 어두워 보청기를 끼셨지만, 농사를 지을 때는 별 불편을 몰랐다. 하지만 새로운 동네에서 낯선 이웃들과 적응하기엔 당신의 어두운 귀가 새삼 불편했다.

아파트 안에 있는 노인회관은 처음부터 외면했다. 매달 월회비를 내는 것이 마땅치 않았고 '늙은이들이 돈 내고 노는 곳'이란 인식이 짙었다. 운동량이 갑자기 줄어든 아버지는 배가 나오기 시작했다. 햇살이 퍼지는 오전 시간에 아버지가 동네 공원에 나갔다 온다고 가신 다음 저녁에 들어오신 일도 있었다. 자주 갔던 곳이라 엄마도 곧 오시겠지 생각했는데 경비실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집을 찾지 못해 한참을 헤매던 아버지를 경비아저씨가 눈여겨보고 집까지 모시고 왔다는 것.

언젠가 동생네와 우리식구들이 모처럼 모여 팔공산자락에 있는 식당에서 외식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버지는 동생이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앉으셨는데, 집근처에서 차가 멈추자 동생에게 "여기 차비 얼마요?"라고 했다.

"아버지~. 아들한테 뭔 차비를 주시려고 해요?"

동생이 웃으면서 말했다. 내 등에선 갑자기 낯설고 서늘한 기운이 지나갔다.

아버지, 절 시집 보내시겠다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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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고개를 뒤로 젖혀 두 개의 링거 병에서 한 방울씩 떨어지는 포도당 수액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아버지가 화를 벌컥 냈다. ⓒ sxc

병실을 찾아갔을 때, 아버지는 나를 보고 환하게 웃으셨다.

"너 점점 에뻐(예뻐)지는구나. 얼른 시집보내야 되겠다. 허허허..."

아버지는 나를 20대 초반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머릿속이 이명으로 울렸다. 아버지는 그런 나를 한참 바라보셨다.

"아버지, 어디 불편하세요?"
"근데, 저기... 나, 밥은 언제 주냐?"
"아, 밥이요? 밥은 아직 못 드시고 여기 포도당이 밥 대신 아버지 몸으로 들어가고 있어요."

그러자 아버지가 고개를 뒤로 젖혀 두 개의 링거병에서 한 방울씩 떨어지는 포도당 수액을 바라봤다. 잠시 후, 아버지가 화를 벌컥 냈다.

"이기, 이거이 어디 밥이 된다고 하네? 이거는 1분에 댓 방울씩 떨어지고 요거인 일분에 열 방울도 떨어지지 않는데... 이기 밥이 되네?"

느닷없이 큰 소리로 야단을 치는 바람에 주변 사람들이 모두 우리 부녀를 쳐다봤다. 감정이 상하시면 이북 고향사투리의 억양이 강해지는 아버지. 아버지는 계속 밥을 언제 줄지 기다리셨던 것이다. 병원에서는 더 이상 밥에 대한 기대를 할 수 없다고 여기신 아버지가 이번에는 떼를 쓰듯 말했다.

"나 집에 갈거니 여기 이 줄 다 뽑아 팽개치라우!"

막무가내 링거 줄을 뽑으려는 아버지를 서둘러 진정시키고 나는 급히 간호사를 불렀다.

"나 이제 하나도 안 아픈데 왜 여기 누워있어야 되는 거이냐? 집에 가서 옷 갈아입고 거져 쉬고프다!"

간호사가 와서 주사를 놓고 가자 아버지는 잠잠해지며 순한 아기처럼 잠들었다. 아버지는 그때부터 당신 할 일은 오직 링거 줄을 빼고 집으로 가는 것이 목표가 됐다. 잠시도 아버지를 혼자 놔두는 것이 불안했다.

명절이면 아버지 밥그릇에 밥이 가득 담긴다

그리고 며칠 후, 아버지는 아주 위험한 상태에 빠졌고 인공호흡으로 연명치료를 하게 됐다. 동생·올케·엄마·조카는 번갈아가며 아버지 옆에 있어야 했고, 언제 끝날 지 모를 시간 앞에 다들 아버지를 안타깝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동생은 "아버지한테 정말 못할 짓을 한 것 같아"라며 울었다.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그날, 내 꿈에는 누런 황소가 우리 집에 성큼성큼 들어오는 꿈을 꿨다. 그러더니 양동이에 있는 음식물을 허겁지겁 마구 먹는 것이었다. 엄마는 내 꿈에 보인 그 황소가 아버지라고 했다. 또 그다음 꿈에는 곱상하게 한복을 차려입은 아버지가 아무 말 없이 웃으시면서 나타났다. 

명절이나 아버지 기일이 되면 아버지 밥그릇에 밥을 푸는 올케는 "하염없이 밥이 꾹꾹 눌러진다"고 했다.
#명절 #알츠하이며 #아버지 #심근경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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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가면을 줘보게, 그럼 진실을 말하게 될 테니까. 오스카와일드<거짓의 쇠락>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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