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에 집착하다가 큰 것을 잃었다

[시베리아 이별여행⑤] 모스크바에서 환전하다 생긴 일

등록 2013.06.11 16:57수정 2013.07.02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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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에 도착한 날, 루블화가 동이 나 환전이 시급했다. 호스텔에 짐을 풀고 환전소가 몰려있는 트베르스카야 거리로 갔다. 트베르스카야 거리는 오르막길에 차도가 넓어 걷기가 어려웠다. 거기다 처음 두어 블록까지는 환전소가 잘 눈에 띄지도 않을 뿐더러 환율이 턱없이 낮았다. 그래도 길을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환율이 좋아지기에 S와 나는 다음 블록까지만, 다음 블록까지만 가보자 하다 한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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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우리를 유혹하는 환율 표시등 ⓒ 예주연


드디어 한 곳을 정했다. 그런데 벨을 눌러 철문을 통과해 들어간 사무실은 한 평이 될까 말까 했고 유리 칸막이 뒤에서 혼자 근무하고 있던 여자는 짜증스레 거래가 불가능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다음에 찾아간 곳도, 그 다음에 찾아간 곳도 마찬가지였다. 아직까지 그 환전소들의 정체와 환전을 해주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아마 러시아인들만 상대하는 사설 환전소이거나 유로화 환율이 계속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유로화를 잠시 취급 안 한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그때 한 남자가 다가와 혹시 환전을 하려고 하느냐고 물었다. 자신이 곧 유럽에 여행을 갈 예정이라 유로화가 필요한데 피차 환율도 나쁘고 수수료까지 떼이는 은행이나 환전소를 이용할 바에 직거래를 하자는 것이었다. 평소 같으면 대번에 거절했겠지만 우리는 추운 거리를 헤매며 약이 바짝 올라 있었다. 거기다 남자는 당시 1유로 당 38~39루블 정도 되는 환율을 크게 웃도는 41루블이라는 환율을 제시했다. 300유로를 환전하려 한다고 하자 선뜻 자기 돈 1만2000루블을 건네며 위조지폐가 아닌지 확인해보라며 근처 은행을 가리키기까지 했다.

은행에 가서 남자에게서 받은 500루블권 24장을 1000루블권 12장으로 바꿨다. 위조지폐일까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아니었다. 돈을 주머니에 넣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자에게 300유로를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300루블을 달라고 하니, 악센트 있고 문법이 틀린 영어였지만 의사소통이 가능하던 남자가 갑자기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1유로 당 40루블도 나쁘지 않은 환율이었기에 300루블은 되었다고 그냥 가려고 해도 유로화를 도로 돌려주며 붙잡았다. 또 시간낭비를 했다는 생각에 짜증스러웠지만 하는 수 없었다. 루블화를 돌려주는 수밖에….

그러자 남자는 다시 거래를 하자고 나섰다. 그리고 우리가 은행에서 받아온 1000루블권 12장을 그대로 세어 돌려주었다. 300루블에 해당하는 10루블권 뭉치와 함께였다. 나는 남자가 자기 손으로 돈을 세지 않아 잠시 헷갈렸던 거라고, 계산에 서툴다고만 생각했다. 1000루블권은 S와 내가 보는 앞에서 남자가 세었기 때문에 나는 두툼한 10루블권 뭉치에 눈이 팔렸다. 뭉치도 셈이 맞았다. S가 다시 확인하겠다는 것을 나는 남자가 다시 마음이 바뀔까봐 제지하고, 빨리 300유로를 줘버리라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남자와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다.

작은 것에 집착하다가 큰 것을 잃었다

시중환율보다 훨씬 유리한 환전으로 생긴 공짜 돈으로 뭘 할까, 신나하며 근처 식당에 들어갔다. 그런데 계산을 하려고 할 때였다. 두툼한 10루블권 뭉치를 떼어놓자 1000루블권을 쥔 손이 너무 가벼웠다. 갑자기 뭔가가 빠져나간 듯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아니나 다를까, 얼른 세어보니 12장 있어야 할 1000루블권이 5장밖에 없었다.


식사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온 길을 되짚어갔다. 실수로 바닥에 돈을 흘린 것은 아닐까, 남자와 헤어진 자리에 남자가 나머지 돈을 들고 서있지 않을까 하는 한 가닥 희망을 가진 채였다. 그러나 남자가 말을 바꿔가며 1만2000루블을 기어이 자기 손으로 세어준 점, 100루블권을 놔두고 헷갈리게 10루블권을 뭉치로 준 점 등이 의심스러워졌다.

45만 원을 환전하면서 반이 넘는 돈을 사기 당한 것이다. 은행이 환율이 나쁘고 수수료를 문다고 해도 몇 푼 차이인데, 두툼한 300루블 뭉치보다 1000루블권을 살폈어야 하는 건데… 작은 것에 집착하다가 큰 것을 잃었다.

그렇게 그날 하루는 완전히 망쳐버렸다. 비싼 입장료를 물고 들어간 관광지에서도 러시아의 최고급 굼 백화점에서도 다른 게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잠시 한눈을 팔았다가도 정신을 차리면 어떻게 이런 일이, 하고 멍해져있기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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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렘린(좌)과 굼 백화점(우)이 있는 붉은 광장 정경 ⓒ 예주연


다행인 것은 S나 나나 상대방을 탓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냥 첫 환전소에서 환전할 것이지 네가 더 가보자고 했잖아', '네가 그 남자랑 먼저 말을 텄잖아', '내가 한 번 더 세보려 했는데 네가 못하게 했잖아' 등등. 작정한다면 할 말은 많았다. 그러나 이제껏 서로 못마땅해 하고 싸우기에 바빴던 우리는 낯선 곳에서 큰 일을 겪고 난 뒤 의지할 건 상대밖에 없다는 동지애를 느끼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게 작은 것을 잃은 대신 얻은 큰 것인지도 몰랐다. 비록 여행자 입장에서 꽤 큰돈을 어이없이 날리긴 했지만 1만2000루블을 가지고 그냥 갔더라면 작정하고 사기 치는 사람에게 어떤 일을 당했을지 모르는데 둘 다 무사하니 다행이었다. 그리고 이미 지나간 일로 여행 전체를 망치기보다 진정을 하고 나머지 일정을 계속 해나가야 했다.

우리는 결국 조금 비싼 마술쇼를 보았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여행에서 돌아오고 한참이 지난 뒤에도, 이제 더 이상 돈이 아깝다거나 찾겠다는 마음 없이 순수한 놀라움과 호기심으로 얘기할 수 있는 추억. 6장을 반으로 접어 두 번씩 센 것도 아니고, 12장이 어떻게 6장도 아닌 5장이 될 수 있지? 우리 둘이 함께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덧붙이는 글 이 여행은 2012년 3월부터 한 달 동안 다녀왔습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 #국제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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