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 기차에서 만난 그녀, 한국어는 잘하는데...

[시베리아 이별여행⑥] 무엇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었을까

등록 2013.06.14 11:44수정 2013.07.02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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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ock(노크)'라는 귀여운 이름을 가진 매점이라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키릴문자를 로마자로 읽은 나의 착각이었을 뿐 'kiosk(매점)'이라는 단순한 간판이다. ⓒ 예주연


러시아를 여행하면서 한 가지 불편한 점이 있었다면 영어가 잘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영어가 모국어도 아닌 내가 역시 마찬가지인 사람들에게서 영어로 말하기를 바란다는 게 우습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껏 여행했던 다른 나라에서는 비공식적이나마 세계 공용어가 된 영어 몇 마디로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가능했다. 그런데 러시아에서는 오랜 냉전기간 동안 적국의 언어를 배우지 않았던 탓인지 소수의 젊은 대학생을 제외하곤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거기다 러시아는 키릴문자를 쓰는데, 비슷한 이유에서인지 간판이나 표지판에 로마자 병기가 거의 되어 있지 않았다. 키릴문자를 미리 공부해 가긴 했지만, 로마자와 닮은 듯 미묘하게 다른 문자라 너무나 외우기 어려웠다. 휴대폰에 다운 받아 간 대조표와 발음 프로그램도 추운 길에서 곱은 손으로 일일이 찾아볼 수 없어 나는 귀머거리에 장님 신세가 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가는 기차 안에서 한국어 하는 몽골계 여성 만나

그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서는 대학생들과 호스텔에서 만난 다른 여행자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하지만 모스크바를 떠나 본격적으로 시베리아에 들어서면서부터 그 수는 줄어들었다. 그러니 이르쿠츠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가는 기차 안에서 영어도 아닌, 무려 한국어를 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내가 얼마나 반가워했을지는 상상이 갈 것이다. 내 한국 여권을 보고 부랴트인(러시아 내 몽골계 소수민족. 이르쿠츠크와 바이칼을 사이로 마주 보는 울란우데를 수도로 일대에 자치공화국을 이루고 있다) 여자가 한국어로 말을 걸어온 것이다.

우리는 곧 각자 자기소개를 했다. 누가 몽골어와 한국어가 같은 어족이라고 했는지, 그녀의 이름은 감히 발음을 따라 할 엄두를 낼 수도 없고 그래서 듣자마자 잊어버리게 되는 종류의 것이었다. 멍한 얼굴을 하고 있자니 그녀는, 이런 상황을 자주 겪는다는 듯 자기 이름은 '재능'이라는 뜻이 있다고 덧붙였다. 그녀는 그 이름답게 한국어가 유창했다. 나보다 어린 나이였지만, 한국에 교환학생을 다녀오는 등 대학을 이미 졸업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한국계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통성명을 마치고 그녀가 물은 첫 번째 질문은 "왜 이 기차를 탔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바이칼 호수와 올혼 섬에 대해 흥분해서 말했다. 그것들이 한국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으며 얼마나 오랫동안 오고 싶어 했던지, 또 실제로 보았을 때 느꼈던 그 아름다움과 장엄함에 대해서….


그녀는 이런 나의 말을 얼마쯤은 신기한 듯, 얼마쯤은 지루한 듯 그러나 예의를 갖추어 참을성 있게 들어주었다. 하지만 다음 질문은 제자리였다.

"이르쿠츠크에서 한국 가는 비행기는 없어?"

여기 온 이유를 묻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여름에는 이르쿠츠크와 서울을 잇는 대한항공 직항이 있고, 겨울에도 러시아나 중국의 한 도시를 경유하는 외국국적 항공기를 탈 수 있다. 하지만 그녀가 궁금해하는 것은 그런 것도 아닐 테였다. 말 그대로 그 비행기들을 놔두고 왜 하필 기차를 탔느냐는 것이었다.

"한국인은 일주일 동안 세계의 3분의 1을 달리는 기차에 '로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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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쿠츠크 기차역. 내가 탈 기차가 여명을 뚫고 다가오고 있다. 새벽이라 텅 빈 플랫폼과 외로운 불빛 하나... 무엇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었을까. ⓒ 예주연


그녀는 직장이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고향의 부모님 댁에 가는 중이었는데 고향에 공항이 없어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 비행기를 타고 와 기차로 갈아탔다고 했다. 이후 그녀는 12시간이 채 걸리지 않은 기차를 지겨워했고, 낮이었지만 나와 잠깐 얘기한 것 외에는 내내 매트리스를 깔고 잠을 자려고만 했다.

길어야 대여섯 시간이면 구석구석에 다 닿을 수 있는 한국에 살다 보니 일주일 동안 세계의 3분의 1을 달리는 기차에 대해 '로망'이 있다고 설명해주었다. 실제로 S가 읽은 이탈리아 교수 마우리치오 리오토(Maurizio Riotto)의 <한국사(Storia della Corea)>에는 한국이 반도인데다 북한으로 대륙과 가로막혀 있어 한국인에게는 밖으로 나가고자 하는 강한 본능이 있다고 쓰여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무수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나의 여행에 대한 '로망'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여전히 갸우뚱해 하는 그녀를 뒤로하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내 이름은 '두루 주(周)', '뻗칠 연(延)'. 여기저기 떠돌아다닐 운명인가 보았다.

S의 이름은 예수회 소속 동방 선교사로 16세기 인도, 일본까지 온 프란치스코 사비에르(Francisco Xavier) 성인에게서 따왔다. 그 역시 동양에 올 운명이었나 보았다.
덧붙이는 글 이 여행은 2012년 3월부터 한 달 동안 다녀왔습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 #국제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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