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구려 손목시계가 내게 안겨준 '환상감각'

[공모-있다 없으니까] 잃어선 안 될 것이 늘고 있다

등록 2013.07.26 09:47수정 2013.07.26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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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의 사고로 손목을 잃었지만, 간혹 손이 있는 것처럼 간지럽고 때론 손을 쥐는 듯한 감각을 경험한 적이 있다.'


'환상감각'이란 사전적으로 신체의 일부가 절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부위가 존재하는 듯한 감각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다른 말로 '환상사지' 혹은 '환상지'라고 하며, 절단수술을 받은 환자 중 60~80%가량이 이러한 신경적 증상을 경험한다고 한다.

'상실'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 데 조금 무거운 예시를 든 것 같지만, 필자가 겪었던 경험을 얘기하고자 하는데 부득이 '환상감각'이라는 단어를 쓰고자 한다. 비록 '오체만족'의 삶을 살고 있지만, 필자가 겪은 감각은 '환상감각'이라는 단어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경험이었다.

스무 살 겨울의 이야기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부터 손목시계를 차고 다녔다. 고등학교 진학 당시 인터넷을 통해 배송비까지 포함해서 1만2400원의 가격을 지불하고 산 것으로 기억한다. 검은 가죽끈에 은빛으로 된 알맹이, 수십만 원에 달하던 '지쇼크'나 '카시오' 같은 브랜드와 달리 수수하고 클래식한 모양의 시계였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시계 자체의 특징보다, 손목줄의 구멍이 늘어질 때까지 4년 가까이 차고 다녔다는 사실일 것이다. 나와 함께 고등학교 시절을 거친 그 손목시계는, 대학교 1학년이 끝나갈 즈음까지도 내 손목에 걸려 있었다. 하지만 그러던 시계는 작은 사건으로 인해 영원한 이별을 했다.

1만2400원짜리 손목시계... 그리고 4년의 시간


필자에게는 연년생인 남동생이 하나 있다. 형제보다 친구에 가까운 우리 둘은 자라면서 많은 사물을 공유하며 자랐다. 침구, 의류로 시작해서 필기구와 게임 계정까지, 나와 내 동생은 많은 것을 공유했다. 그러나 내 손목시계는 그 '많은 것' 중 극히 소수의 예외로 분류되는 물건이었다. 동생의 첫 수능시험 직전까지는.

2012년 11월 10일. 전날까지도 약간 긴장한 듯한 동생은 수능 날 아침밥을 먹으면서도 여전히 그 긴장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는 집을 나가기 전 나에게 "형, 나 (손목)시계 좀 빌려줘"라고 말했다. 나는 동생의 불안을 약간이나마 덜어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그 손목시계를 건넸다.

그리고 그는 시험을 끝낸 직후, 너무 기쁜 마음에 그 시계를 시험장에 두고 와버렸다. 4년간 함께한 시계였지만,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싸구려 시계를 잃어버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11월 11일부터 그 손목시계는 더 이상 내 손목에 걸려 있지 않았다. 싸구려 손목시계 하나 없어졌다고 일상이 바뀌거나 크게 뒤틀리진 않는다. 그럴 리도 없다. 하지만 그 시계의 존재가 결여되자 불편함은 '시간'과는 전혀 다른 곳에서 찾아왔다.

인류학자 제임스 프레이저(James Frazer)는 "서로 같이 있던 사물은 비록 분리된 경우에도 그들은 여전히 거리의 제한을 받지 않고 서로에게 작용한다"고 말했다. 4년간 수면시간과 샤워를 하는 시간, 실수로 시계를 잊은 몇몇 날을 제외하면 내 손목에는 언제나 그 시계가 걸려 있었다. 그러던 것이 사라졌다.

손목은 시곗줄의 압박에서 자유로워졌지만 정작 투명한 밧줄에 얽매인 마냥 압박과 비슷한 감각을 느꼈다. 시계가 없음에도, 몸은 시간을 확인하려고 손목을 들곤 했다. 시계는 더 이상 손목에 없었지만, 그 수수한 시계는 그곳에 있는 것 마냥 내 몸을 움직였다.

익숙한 것의 우연한 상실... '환상감각'을 선물해주다

결국 똑같은 가격의 시계를 구입해서 손목에 두르는 것으로 '상실'의 여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머리는 상실을 인지했지만, 육신은 상실을 인정하지 못 했다. 이러한 불편함에 이유를 달아준 것은, 한 편의 애니메이션이었다.

"당신도 훌륭한 사이보그입니다."
"하지만 전 의수도 의족도 인공장기도 쓰지 않아요."
"어떠한 것이든 휴대 정보단말을 갖고 계시죠?"
"그건 뭐, 누구나 갖고 있는 것 아닌가요?"
"재해나 사고에 의해 한순간에 그것들이 없어진다면 당신은 어떻게 될까요?"
"복구할 때까지 아무런 일도 못 하겠죠."
"자신의 생활을 그렇게까지 전자적인 장치에 위탁하고 있으면서 사이보그가 아니라고 해도 설득력은 없답니다. 당신에게 있어서 휴대단말은 이미 제2의 뇌입니다. 과학의 역사는 인간의 신체기능의 확장. 즉, 인간 기계화의 역사라고 바꿔 말할 수 있죠."
- 애니메이션 <사이코패스> 중

필자가 겪은 상실은 시계를 잃어버린 것만이 아니었다. '시간'을 상실했고, '시간을 확인하는 동작'을 상실했고, '시간을 알려주는 기계'를 상실했다. 시계는 이미 나의 일부였고, 나는 시계를 찬 사이보그가 아니었을까. 시계가 나에게서 없어지고 느낀 감각은 환상감각이 분명한 듯 느껴졌다.

우린 점점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이 늘어나는 세계에 살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미니멀리즘이나 모바일이라는 단어로 점점 작아지고 더 작아진다. 우스운 확장일 수도 있지만, 어쩌다 잃어버린 싸구려 손목시계 하나로 겪은 이 무의식의 불편이, 미래에는 얼마나 더 깊어질지 걱정이 깊어져간다.

먼 미래에도 존재할 우연한 '상실'을, 인간은 견딜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있다 없으니까' 기사공모 응모글입니다.
#일상 #철학 #손목시계 #과거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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