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공부하는 거 아빠가 싫어하는 줄 알았어요"

[공모-가족인터뷰] 예고 진학 고민하는 딸, 마냥 철부지는 아니었네요

등록 2013.09.01 20:19수정 2013.09.0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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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딸내미하고 이야기 좀 자주 하세요. 상 받아오면 칭찬도 좀 해주고…. 민주가 아빠는 자기한테 관심도 없다 그러잖아요."


아닌 밤에 홍두깨라더니, 가벼운 술자리에서 동생처럼 지내는 후배가 한 마디 툭 던진다. 지난 봄 응봉산을 함께 오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삼촌이라고 부르는 그 후배가 딸아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오랫동안 했단다. 그런데 딸아이가 아빠에 대한 섭섭한 감정을 드러내더라는 것이다.

과묵하기 이를 데 없는 아빠. 큰 아이가 사춘기를 넘기면서 아빠와 일상의 대화는 거의 단절됐다. 딸아이는 모든 것을 엄마와 이야기했다. 꼭 해야 할 말은 엄마를 통해서 전달하는 방식이 무의식 속에 정형처럼 굳어졌다.

예전부터 이런 건 아니었다. 동생 둘이 아빠의 자전거 앞뒤에 타고 놀이터를 오가면서부터 큰 아이는 뒷전으로 밀려나기 시작했고, 사춘기를 지나면서부터 아빠에게 뽀뽀를 하지 않았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특별나지 않고 평범하게 키우고 싶다는 내 나름의 교육 철학도 영향을 끼쳤다. 상을 타온다든지, 칭찬받을 만한 일을 해도 나는 못 본 척하기 일쑤였다. 그게 딸아이에게는 무관심으로 보였고, 동생들만 편애한다는 오해를 불렀나 보다.

큰딸과 마주앉아 고구마줄기를 다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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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줄기 다듬기 과묵하기 이를 데 없는 아빠와 딸. 데친 고구마줄기를 다듬기 위해 마주 앉았습니다. 오랜만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습니다. ⓒ 안호덕


"아빠, 그게 뭐예요?"
"이거? 고구마줄기. 껍질 벗겨서 들깻가루 넣고 볶아 먹으면 맛있어."
"나도 그거 좋아하는데…. 전에 할머니가 해주셨는데 맛있었어요. 그런데 껍질 벗겨야 해요? 나도 해볼까요?"


작은 아이 둘과 아내가 외가로 장기휴가를 가고, 큰아이와 둘만 남은 집. 할머니가 보내주신 고구마줄기, 냉장고에 더 두면 물러져서 못 먹을 것 같아 뜨거운 물에 데쳐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딸아이도 하겠다고 나섰다. 바가지에 가득한 고구마줄기. 부녀가 머리를 숙이고 껍질을 벗겨 냈다. 텔레비전에서는 마지막 폭염 소식을 전하는 뉴스가 이어지고, 아이는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고 있었다.

"민주야. 이번 주에도 미술 영재수업 있어? 내일은 뭐 할 거야?"
"내일은 학교 영어 방과 후 수업하고, 오케스트라 합주 연습해야 해요. 미술 영재수업은 이번 주에 없어요."
"미술 영재 수업 재미있어? 내년이면 고등학교 진학 준비해야 되는데…. 'ㅅ'예고에 대해 좀 알아봤어? 너, 'ㅅ'예고 간다고 했잖아?"

초등학교 때부터 그림 그리기나 만들기에 유난히 관심을 보였던 딸아이. 미술학원 한 번 다니지 않았는데 학내외 미술대회에서 많은 상을 받아 왔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딸아이는 'ㅅ'예중에 진학하겠다고 했다. 아이뿐만 아니라 담임선생님도 '아이가 소질이 있으니 예중으로 보내는 것도 고려해 보라'고 권했다.

그러나 아내나 나나 그럴 마음이 없었다. 중학교부터 진로를 확정해 특목중으로 간다는 것도 탐탁지 않았다. 무엇보다 한 분기 수업료 150만 원, 1년 수업료만도 600여만 원이라는 게 큰 부담이기도 했다. 중학교는 일반 중학교를 가고, 고등학교를 예고로 생각해보자며 겨우 달랬다. 딸아이는 부모의 결정을 따르기는 했지만 실망과 마음의 상처는 꽤 오래갔다.

"아직 모르겠어요. 'ㅅ'예고 가고는 싶지만, 일반계 고등학교 가서도 미술공부는 할 수 있으니까…. 대학에서 미술 전공하면 되죠, 뭐. 지금 친구들하고 헤어지기도 싫고…. 또 미술 학원 선생님이 그러는데 'ㅅ'예고 가려면 지금부터라도 입시 전문학원에 다녀야 한대요. 학교 등록금도 대학 등록금만큼 비싸고, 학교 다니면서도 대학 교수님한테 과외수업을 받아야 한대요."

아이는 중학교 1학년 때 학내에서 미술 영재로 추천돼 시교육청에서 실시하는 세 차례 시험을 치르고 미술 영재로 인정받았다.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 매주 토요일 교육청에서 주관하는 수업을 받는데 학교 수업보다 더 열심이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딸아이가 'ㅅ'예고에 대한 진학 정보에 대해 꽤 많이 알아본 것 같았다. 정작 예고 진학에 대해서는 딱 부러지게 말을 안 한다. '벌써 이만큼 컸구나' 하는 대견함과 '예중 진학 때와 같이 엄마 아빠가 또 반대할까봐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있구나'라는 미안함이 밀려온다.

"아빠는 제가 상을 타와도 잘 안 보지도 않으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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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아이의 작품 상을 탄 작품이라는데 아빠는 언제 상을 탓는지, 어떤 상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구석에 방치돼 있던 걸 여름방학 때 방정리하면서 벽에 걸었습니다. ⓒ 안호덕


"민주야. 먼저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요즘 아빠가 장사가 안돼서 그렇지만 네가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아빠가 어렵다고 벌써부터 'ㅅ'예고를 포기하지 마. 아직 고등학교 가려면 시간도 있고, 엄마 아빠도 여러 가지 알아보고 있으니까…. 너는 지금 영재 수업 열심히 다니면서 천천히 생각해. 아빠는 네가 미술 공부를 하고 싶다는 데 다른 길을 강요할 생각은 없어. 그리고 너 삼촌한테 '아빠가 미술 공부하는 것 좋아하지 않은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면서? 그렇지 않아. 아빠도 네가 자랑스럽지만 내색하지 않았을 뿐이야."

"그래요? 정말요? 저는 아빠가 저 미술 공부하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은 줄 알았어요. 상을 타와도 잘 안 보지도 않으시고…. 엄마는 'ㅅ'예고가 대학교 다니는 것보다 돈이 더 많이 든다고 걱정하지시만…. 'ㅅ'예고 입시도 준비하고 싶고, 다닐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디자인이나 일러스트 쪽으로 공부하고 싶은데 일반 고등학교에서는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요. 학원 선생님이 'ㅅ'예고 진학 생각한다니까 엄마 한번 보자고 했는데 아직 말씀드리지 못 했어요."

"그래, 엄마하고 이야기해서 선생님 만나보도록 할게. 그리고 'ㅅ'예고 가려면 전공뿐만 아니라 내신도 중요하다더라. 학원 안 다니는 대신 틈틈이 공부 좀 해야 뒤처지지 않아. 엄마 아빠는 '반에서 1등해라, 누구보다 더 앞서라' 이렇게 강요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그러나 네가 나중에 무슨 결정을 하는 데 학업 성적이 걸림돌이 돼서 후회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학원 한번 변변히 다니지 않았지만, 미술 영재로 뽑힌 딸아이. 그리고 나름의 진로를 개척하려는 딸아이. 딸아이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아빠의 무관심함이 많이 서운했었나 보다. 그렇다고 예고 진학을 생각하는 아이를 놓고 우리 부부가 고민을 안 한 건 아니다. 그러나 고등학교까지 무상 교육을 앞둔 마당에 대학보다 더 많이 든다는 예고를 보낸다? 흔쾌히 동의할 수만 없는 게 현실이다. 또 최근 국제중 사태를 보면서 '꼭 저렇게 해서 특목중이나 특목고를 보내야 하는가' 반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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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와 출사 나들이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큰 아이. 아빠와 각자의 카메라를 둘러메고 출사하는 날은 신이 난답니다. 올해는 서로 바빠서 그 시간도 별로 내지 못했습니다. 가을이 되면 자전거를 타고 한강 출사를 나가봐야겠습니다. ⓒ 안호덕


중2 여학생인 딸아이. 아직까지 동생들과 싸우고, 옷도 훌러덩 벗어 던져놓고 제 방 정리도 잘 못해서 매번 엄마한테 야단맞는 아이. 그런데 딸아이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마냥 철부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아내와 맥주 한잔하면서 진지한 이야기를 해봐야 할 것 같다.

아이의 미래, 지금 당장은 불확실하고 불안한 것도 사실이지만 부부가 머리를 맞대고 아이와 터놓고 이야기하다 보면 최선의 방법을 선택할 수 있지 않을까? 예고를 가든, 일반 고등학교를 가든 결과만큼 중요한 것이 아이와 진학 과정을 공유하는 것이리라.

"다 됐다. 이제 정리하고 아빠는 인터넷으로 고구마줄기 맛있게 요리하는 법 찾아 볼 테니까, 너는 엄마한테 전화해서 들깻가루 어디 있는지 물어봐. 내일 아침에 아빠가 맛있게 해줄게."
덧붙이는 글 <가족인터뷰> 응모글입니다.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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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진보는 냉철한 시민의식을 필요로 합니다. 찌라시 보다 못한 언론이 훗날 역사가 되지 않으려면 모두가 스스로의 기록자가 되어야 합니다. 글은 내가 할 수 있는 저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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