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메스가 세상과 조우하는 방법

[서평] <세상물정의 사회학>

등록 2014.01.29 17:05수정 2014.01.29 17:05
0
원고료로 응원
a

<세상물정의 사회학> 표지 ⓒ 사계절 출판사

2007년 시작되어 지금은 최고의 미드(미국드라마)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 <평행이론>에는, 두 천재 물리학자가 나온다. 이들은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길 수 있을 만한 지능을 가졌지만 세상살이는 꽝이다. 자신들이 배운 이론의 창만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런 장면이 나온다. 평소에는 잘 열리던 문이 열리지 않을 때 그들은 과학적·수학적 지식을 총동원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하지만 지나가던 학생이 아주 쉽게 문을 열어젖힌다. 거기엔 어떠한 이론적인 지식이 필요치 않았다. 단지 눈을 조금만 돌리기만 하면 되었다. 아니, 사실은 너무 쉬워서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행동만 필요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너무도 어려운 문제였다. 그들은 그들만의 세계에 갇혀, 세상과 제대로 조우하지 못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은근히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많다. 흔히 말하는 '세상물정 모르는', '머리에 피도 안 바른', '세상의 쓴 맛을 못 본' 사람들일 것이다. 아직 사회 생활을 접하지 않은 학생들, 사회 생활은 했지만 조직 생활은 안 해본 어른들, 위에서 언급한 이들과 비슷하게 평생 책만 파고 그것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들이 있다. 반면, 조직 생활은 안 해봤지만 혼자의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먹고 살기 위해 안 해본 게 없는 사람들, 질곡의 역사를 헤쳐온 사람들도 있다.

사회학에 대한 진지한 고민의 흔적

<세상물정의 사회학>(사계절)은 저자 노명우 교수가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을 모두 이해하기 위해 쓴 서평에세이 형식의 문화비평서이다. 그래서인지 책은 대중서와 학술서를 오가는 느낌이다.

챕터의 형식 또한 그러하다. 무조건 읽기 쉬운 느낌의 에세이 형식으로 현재의 문화세태를 보여주는 식으로 글을 시작하고, 이를 이해하기 위해 대체적으로 고전 학술서를 인용한다. 자연스럽게 책에 대한 서평도 겻들인다. 저자의 생각으로 챕터를 끝마치는 것이다.

저자는 대중서 느낌의 글은 '세상으로서의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서 쓰고, 학술서 느낌의 글은 '세계로서의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서 쓰고 있다. 그렇게 대중적인 소재를 가져와 학술적인 주제의식으로 글을 풀어간다. 이 부분에서 저자가 고민한 흔적이 뚜렷이 보인다. 스스로 밝혔듯이, 이론에만 함몰되어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사회학은 존재 이유가 없다는 것.


"언제나 사회학자는 세속의 존재였다. 단지 자신이 세속의 존재였음을 깨닫고 있지 못했을 뿐이다. 세속에선 특정 이론의 권위보다, 그 권위 있는 이론에 대한 해설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부각된다. 바로 평범한 사람들의 고민 덩어리이다. 그 고민 덩어리는 어느 이론에 대한 해석과 해설보다 긴급하고 중요하다." (본문 중에서)

저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세상물정 이야기들은 자그만치 25개의 챕터로 나누어 펼쳐진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명품, 언론, 종교, 성공, 섹스, 자살, 노동, 집 등. 이런 소재들을 그람시, 마르크스, 베버, 손택, 벤야민 등의 삶과 사상과 저서들로 푸는 방식이다.

자칫 이질적이고 억지로 끼워 맞춘 듯한 느낌이 들 수 있지만, 이 책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게 하는 힘이 있다. 이는 순전히 저자의 글 솜씨에 의한 것이란 생각이 든다. 치열한 고민 끝에 나온 '세상'(대중 혹은 세속)과 '세계'(학술 또는 이론)의 훌륭한 접목이 성공한 것이리라. 책에서는 이를 '헤르메스(그리스 전령의 신)의 다리'라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학술적인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해 앞의 대중적인 글을 가져다 붙인 듯한 느낌이 드는 챕터도 눈에 띄었다. 반대로 대중적인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해 학술적인 고전을 가져다 붙인 듯한 느낌이 드는 챕터도 있었다는 점을 밝혀둔다.

그럼에도 책을 관통하고 있는 저자의 일관적인 생각들이 정말 속시원하게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거북하거나 실증나지 않는다. 저자는 주로 자본주의와 성장 지상 주의의 폐해, 기득권층의 교묘한 술수와 어긋난 욕망, 무지하게 흘러가는 문화세테들을 비판하고 있다.

실명까지 들어 매몰차게 비판할 때는 희열까지 느껴지곤 한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개인에 대한 사랑과 신뢰, 사회에 대한 비판과 질책이 이어진다. 사회의 짐을 개인에게 떠맡기는 현재의 세태를 두고 볼 수 없다는 고민의 흔적 또한 엿보인다.

세속을 위하여 썼지만, 세속으로 뛰어들지는 않는다

한편 비판을 하며 깊숙이 숨겨왔던 현실의 속살을 함께 끄집어내곤 하는 장면에서 이 책을 통해 저자가 진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있다. 현실을 비관적으로 보는 사람들 중에는, 시궁창 같은 현실에 맞대응하기 싫어서 피하는 사람이 있을 테고 그 현실을 증오하며 격렬하게 부딪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피하기도 하고 부딪히기도 하며 살아간다.

저자는 바로 이런 사람들, 즉 사상이나 신념을 딱히 갖고 살아가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을 내놓은 것 같다. 일단 냉혹한 현실을 보여주고 겉모습 뒤에는 이런 추악한 본질이 자리잡고 있다는 걸 알려준다. 그런 뒤 문제의식을 내비치는 것이다.

"상식이 바람직함을 갖추면 양식이 된다. 하지만 상식은 양식보다 힘이 세다. 권력자들은 상식에 대한 대중들의 믿음을 이용해 정치를 하기에 상식적인 말을 늘 언급하지만, 상식에만 머물 뿐, 상식으로부터 양식으로까지 나아가지 않는다. 상식을 이용하는 세력과 상식을 교정하려는 세력이 싸움을 벌일 때, 보통 상식을 이용하는 편이 승리한다. 상식을 자극하는 "경제를 살리겠다"는 슬로건을 내세운 보수정당은 '서민'의 표를 얻고, 경제정의를 외치는 진보정당은 빈민층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한다." (분문 중에서)

하지만 더 이상 들어가지는 않는다. 저자는 직접 시민들 사이로 뛰어든 보들레르를 비판한다. 직접 경험하면서 그들을 이해하겠다는 보들레르의 목적이 실패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저자는 지루하고 딱딱한 이론서를 쓸 생각도 없었지만, 직접 현장에 뛰어들어가서 경험하고 고발하는 르포를 쓸 생각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비난할 생각은 없지만, 개인적으로 조금은 아쉬운 느낌이 든다. 아무래도 이론이나 학술적인 느낌이 더욱 많이 들고, 대중적이고 자극적인 소재들을 취합함에 있어서 완전히 '나의 얘기'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singenv.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세상물정의 사회학>, (노명우 지음, 사계절 펴냄, 2013년 12월, 308쪽, 16800원)

세상물정의 사회학 - 세속을 산다는 것에 대하여

노명우 지음,
사계절, 2013


#세상물정의 사회학 #세계 #세상 #자본주의 #이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책에 관련된 어떤 거라도 환영해요^^ 영화는 더 환영하구요. singenv@naver.com

AD

AD

AD

인기기사

  1. 1 타이어 교체하다, 대한민국의 장래가 걱정됐다
  2. 2 "김건희 여사 접견 대기자들, 명품백 들고 서 있었다"
  3. 3 유시춘 탈탈 턴 고양지청의 경악할 특활비 오남용 실체
  4. 4 제대로 수사하면 대통령직 위험... 채 상병 사건 10가지 의문
  5. 5 윤 대통령이 자화자찬 한 외교, 실상은 이렇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