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유소 현수막의 이 단어... 왜 이러는 걸까요

[송준호 교수의 길거리 사회학] '짜가'가 판치는 세상

등록 2014.03.31 16:41수정 2014.04.15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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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55년 7월 23일, 박인수 사건의 무죄판결을 보도한 <동아일보> ⓒ 동아일보PDF


박인수라는 사람이 있었다. "나를 울려주는 봄비…"를 열창했던 가수 박인수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1955년에 '한국판 카사노바 사건'으로 장안을 발칵 뒤집어놨던 바로 그 박인수다.

그는 수십 명의 부녀자를 농락한 죄로 법정에 섰다가 1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 재판 과정에서 자신과 만난 많은 여성 중 결혼하지 않은 이는 딱 한 명뿐이라는 진술이 크게 참작됐다는 후문이다. 당시 판결문에서 나온 유명한 대목이 하나 있다. 바로 '법은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 정조만 보호해준다'라는 것.

당시 그는 해군 대위를 사칭했다고 한다. 문제는 그 사건 이후로도 유사한 '사칭'(詐稱) 사건이 이 땅에서 빈번하게 벌어져 왔다는 사실이다.

박인수의 '해군 대위' 사칭은 가난한 법대생이나 사법연수원생, 재미사업가, 재벌 아들, 연예기획사 사장 등을 사칭하는 가짜들을 수도 없이 만들어냈다. 거기에 속수무책으로 농락당하는 여성 또한 부지기수였다. 피해를 입은 여성들의 배경에는 욕심과 허영심이 자리하고 있지 않았을까.

'사칭'은 가짜를 진짜로 포장하는 일이다. 거짓을 진실로 위장해 상대를 속이는 행위다. 카사노바 박인수는 백수건달이라는 진실을 숨겼다. 가짜이자 거짓인 해군 대위 행세로 수많은 부녀자들의 환심을 샀다.

당시 박인수가 백수건달 신분을 그대로 밝혔다면? 어느 여성도 거들떠 보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 수없이 양산된 각종 '사칭' 사건만 봐도 그렇다. 명문 대학 법대생으로 위장해야 했고, 재미사업가 따위를 사칭하면 만사가 술술 풀린다.

확실히 편리한 '가짜'


'진짜'나 '정직'을 견지했다가는 눈앞의 실익을 놓치기 쉽다. 여러 가지로 불편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가짜나 거짓은 정반대다. 확실히 편리하다. 많은 이익을 손쉽게 낼 수 있다. '짝퉁' 제품을 양산하면 적게 투자해서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지금도 그런 일은 끊이지 않고 있다. 짝퉁으로라도 허영심을 채우고자 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사칭에도 수요와 공급의 시장원리가 작용하는 것이다.

문득 노래 한 곡이 떠오른다. 1993년에 가수(?) 신신애가 춤바람 난 두메산골 이장 사모님처럼 엉덩이를 씰룩거리면서 불렀던 바로 그 노래, <세상은 요지경>이다. 

세상은 요지경 요지경 속이다
잘난 사람은 잘난 대로 살고
못난 사람은 못난 대로 산다
야이야이 야들아 내 말 좀 들어라
여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 짜가가 판친다
인생살면 칠팔십년 화살같이 속히 간다
정신 차려라 요지경에 빠진다
싱글 벙글 싱글 벙글 도련님 세상
방실 방실 방실 방실 아가씨 세상
영감 상투 삐뚤어지고
할멈신발 도망갔네 허~

이 노래는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짜가'가 판을 치는 세상 탓이었으리라.

우리는 왜 '짝퉁'들에게 쉽게 속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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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주유소에 내걸린 문구 '정품 정량 정성'이라고 적힌 문구를 보면 정품 아닌, 정량 아닌 기름이 많다는 반증이다. 정성이 부족한 주유소도 많다는 뜻이겠다. ⓒ 송준호


그런 '짜가'들의 위장술은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우리 사회 곳곳에 활개를 치는 '짜가'들은 여전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위 사진처럼 '정품·정량·정성'을 굳이 적어서 내건 이유 또한 자명하다. '정품'도 아닌 석유 제품을 '정량'까지 속여 파는 주유소가 많다는 증거다. 

'짜가'는 다른 이들에게 손해를 입힌다. 삼겹살을 몇 그램 모자라게 내놓는 수준의 '짜가'는 건강을 생각해서라도 '애교'로 봐줄 수 있다. 정품 아닌 기름 한두 번 넣는다고 자동차가 당장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규모가 커지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우리 현대사는 그야말로 '짜가'들이 판을 쳐 온 과정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애국자를 사칭했던 반민족 친일파 짜가, 경제발전을 명분으로 노동자들을 저임금으로 착취해 온 악덕 기업가 짜가, 온 국민을 반공 이데올로기에 가둬놓고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다가 감금하고 폭행하고 죽였던 짜가, 국민의 막대한 혈세로 멀쩡한 강을 갈아엎어서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짜가, 선거 때마다 종북몰이로 집권 연장에 혈안이 되는 짜가들까지….

'유사품에 주의하세요'라는 문구를 수도 없이 봐왔다. TV를 통해서도 무수히 들었다. 그런데도 '짝퉁'과 '짜가'들에게 속고 또 속는다. 사칭하는 기술이 정교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우리 국민이 천성적으로 순박해서거나….
#박인수 #사칭 #정품 #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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