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양된 여동생... 30년 지났지만, 악몽에 시달리다

[입양, 안에서 그리고 밖에서 보기 ③] 입양에서 재혼까지 두 번째 '가족의 탄생'

등록 2015.04.06 16:52수정 2015.04.06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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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가정'이었던 우리 가족은 어머니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뜨고,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또 다른 '가족'이 탄생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부딪히는 현실에 대해 풀어가고자 합니다. 


(관련기사 : 핏줄이 이어져야만 가족일까요?)
(관련기사 : "업둥이 잘못 들여서 엄마가……."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재혼! 입양과는 또 다른 사회적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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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드라마 <당신만이 내사랑> 캡쳐 화면 요즘 방송중인 <당신만이 내사랑>이라는 드라마를 보면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출생의 비밀을 잔뜩 간직한 채, 현대인들에게 도대체 가족이란 어떤 역할을 하는지 그리고 가족이라는 범주를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 말입니다. 자료화면처럼 핏줄로 얽히지 않은 사람들이 매일 밥상에 마주앉아 고민을 털어놓고 내 일처럼 슬퍼하고 기뻐합니다. 가족 그 이상의 끈끈한 사랑은 이 드라마가 보여 주려는 진정한 가족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KBS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은 아버지는 1989년 봄 재혼하게 됩니다. 엄마 없이 커야 할 우리 4남매를 위해 고모와 큰댁에서도 적극 권유를 했죠.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가족을 맞게 됩니다. 새어머니와 우리 막둥이 또래의 여자 아이! 그래서 우리 가족은 이제 부모 밑에 3남 2녀가 되었습니다.

재혼은 입양 못지않게 참 쉽지 않은 결정일 겁니다. 그것도 각자 자녀가 있다면 말이죠. 단지 당사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동안 각자 가정에서 자라왔던, 생판 모르는 아이들이 한순간에 형제자매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재혼가정은 일반 가정에 볼 수 있는 생활양식과 가치관이 공유되지 않아 입양과는 차원이 다른 시각차가 존재합니다. 그 시각의 벌어진 틈은 가족의 안과 밖에서 주체할 수 없는 혼란을 몰고 올 수 있습니다. 더불어 주위의 시선 역시 녹록지 않습니다.


또 재혼을 혼인의 연장선에서만 보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서로 죽고 못 살아 결혼에 이르는 신혼부부와는 다릅니다. 상대의 경제력과 사회적 위치, 특히 내 아이의 양육이란 문제가 걸려 있습니다. 물론 재혼의 본래 목적은, 가정의 해체라는 아픔을 딛고 다시 한 번 가족이란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 서로에게 위로받고 상처를 치유하는 데에 있지만 말입니다.

1989년, 우리 집은 부모 아래 3남 2녀가 되었습니다. 물론 가족이 되기 위한 법적인 절차도 마쳤고요. 그렇게 해서 우리 집은 입양과 재혼으로 이루어진 조금은 복잡한 과정을 거친 가족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안 사실인데 새어머니와 함께 들어온 여동생은 주민등록 등본상에 '동거인'으로 나온 겁니다. 게다가 아버지의 가족관계 증명서에는 자녀로 나오지 않더군요. 물론 우리 형제 역시 새어머니의 가족관계 증명서에는 나오지 않고요. 직계 혈족이 아니라지만 엄연히 결혼으로 한가족이 되었음에도 등본상에는 가족으로 인정되지 않는 겁니다.

법적으로 타당한 안전장치가 필요하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사자에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따릅니다. 등본이란 것은 사회생활을 하기 위한 가장 기초 서류인데 학교나 회사, 병원에 뭔가를 신청하거나 증명할 때마다 붙는 '동거인'이란 꼬리표는, 입양과 재혼 등으로 새로운 가정을 꾸리려는 사람들에게 이중 삼중의 고통을 안겨주는 족쇄가 되고 있습니다.

재혼, 도시락 싸들고 다니며 말리고 싶은 심정

새어머니는 자기 딸에게 남들과 같은 어엿한 가정을 선물해 주고 싶었지만, 허술한 법률적 가족제도로 인해 맘고생이 심했습니다. 국가에서 발급하는 가족증명 서류에도 불완전한 가족이었던 우리는 시간이 지나며 실질적으로 여러 불화에 직면했습니다.

평생을 사랑하며 살자고 맹세한 부부들도 성격 탓이라며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는 일이 흔한데 우리처럼 전혀 다른 두 가족이 하나의 가정이 되기엔 쉽지 않았습니다. 재혼 당사자의 문제는 예외로 하더라도 이미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 사이의 충돌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게다가 새어머니, 혹은 새아버지와의 관계는 더 가시밭길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사건건 내 맘 같지 않아 충돌하는 일이 빈번합니다. 누군가 한쪽에서는 그 아픔을 받아들이고 살 수도 있지만 그러기에는 자신이 감내해야 하는 상처가 너무 커졌다는 생각에 가족이기를 포기하는 일까지 생깁니다.

물론 서로 많이 양보하고 배려해 난관을 극복해가는 가정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일차적으로 우리 집에선 막 12살이 된 막내 여동생을 다시 보육원으로 돌려보내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백일도 안 된 핏덩이를 데려와 갖은 사랑과 관심을 쏟았던 우리 엄마의 빈자리는 그 누구도 채워줄 수 없었나 봅니다. 우리는 수년간의 부부싸움과 가출로 인해 상처를 받을 대로 받은 막내가 다시 보육원으로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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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이었던 여동생의 파양! 다시 보육원으로...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던 날, 여동생을 만나고 왔습니다. 날리는 꽃눈처럼 막둥이의 인생도 끝을 모르게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 김승한

당시 우리 삼형제는 10대 중반에서 후반이었습니다. 어리석게도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 일이 막둥이에게 그리고 우리 집안의 모두에게 얼마나 돌이킬 수 없는 커다란 상처였는지 말입니다. 그렇게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4월 봄날, 동생은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친구와 함께 보육원으로 막내를 만나러 가는 날, 벚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원장님을 먼저 만난 후 동생과 면회를 했습니다.

"오빠, 힘들어. 내 물건도 자꾸 없어지고..."

동생은 불안하고 지친 듯한 표정이었습니다. 메마르고 수척해진 얼굴. 아버지와 오빠들이 챙겨준 물건이 자꾸 없어진답니다.

"오빠, 좀 더 있다가 가면 안 돼?"

두 시간여의 면회를 마치고 집으로 가려는데 동생이 붙잡습니다. 조금만 더 있다가 가면 안 되겠느냐고. 떨어지지 않는 발을 돌리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여동생은 들어가지 않고 저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만발한 벚꽃 저편에서 동생은 울고 있습니다. 여러 번 뒤를 돌아보고 또 보아도 계속 우리 뒷모습을 보고 있었습니다. 이 상황이 오기까지 아버지와 새어머니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서로 복잡하고 괴로운 마음은 그 무게를 가늠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20살이 되며 '자살'을 마음속에 두고 살았다

몇 년 후, 형은 집을 나갔습니다. 가출한 거죠. 또 몇 년 후 저와 남동생도 집을 나왔습니다. 15년 가까이 함께 한 인연을 끊었습니다. 아버지와는 간간이 연락을 주고받으며 명절이나 생신날에만 만나곤 했습니다. 물론 집을 나간 후 막둥이와는 다시 만났고, 막둥이는 가족의 일원으로 우리 형제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 남매에게 있어 가족이란 것은 참 낯설고 오래된 기억에 존재할 뿐입니다. 따뜻하고 포근한 가정이라는 것이 사춘기 이후엔 더 이상 우리에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매년 찾아오는 명절도 괴로움과 시달림의 연속이었습니다.

재혼가정의 복잡한 심리상태와 신경전은 다른 사람들은 전혀 이해를 못합니다. 말 한 마디와 행동 하나하나에 오해와 불신의 싹 트고 쑥쑥 자랍니다. 거기에 입양한 아이까지 있었으니 상황은 최악이었습니다. 당시 우리의 삶은 마치 유리 벽에 갇힌 마네킹 같았고, 탈출구 없는 감옥이었습니다. 항상 우리의 속마음과 겉 표정은 정반대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름 종교에 기대어 신앙에 의지했지만, 대학에 입학한 후 부터는 '자살'이라는 단어가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여차하면 모든 것을 포기하려 했습니다.

물론 당시 기억을 더듬어보면 재혼한 새어머니 역시 무척 힘들어했습니다. 결혼한 남편도, 새롭게 맞이한 우리 4남매도 무척 속을 썩였거든요. 시간이 흘러도 나아지지 않는 생활에 괴로워하며 절망하던 모습을 종종 보았습니다.

그런 새어머니에게 감사했던 일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고3 당시 심상치 않은 내 몸 상태를 보고 병원에 데려간 일입니다. 아버지는 별것 아니라고 무시했지만, 병원에서 전 폐결핵 진단을 받았습니다. 하루하루 지옥 같은 날들을 보낼 때 새어머니께서 내게 보여준 관심과 애정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가족? 우리에겐 낯설고 오래된 기억 속의 단어

하지만 이미 우리 가정은 넘을 수 없는 선을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했나요? 입양과 재혼으로 이루어진 우리 가족 구성원 모두 조금씩 조금씩 상처를 받았고, 시간이 갈수록 그 상처는 깊어져 갔습니다. 그래도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와 아버지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입양은 그 아이에게 가정이란 울타리를 선물한 것이니,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새어머니와의 재혼도 아이들에게 가족의 울타리를 만들어주고자 해서 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막둥이는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후, 아버지와 삼촌의 얘기를 우연히 듣다 자신이 입양아란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의 충격은 어땠을까요? 더구나 아빠가 재혼한 후 다시 보육원으로 보내지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립니다. '내가 입양아라서 다시 버려졌구나!'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가족의 구성원으로 살아왔던 막내가 아버지의 재혼이 가져온 위기상황에서 '낯선 존재'가 되었고, 어느 날 가정 밖으로 밀려나 버린 겁니다.

30년이 훌쩍 넘도록 지난날의 악몽을 떨치지 못했지만, 이젠 짐을 벗어버리고 싶습니다. 병원에서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이제 잊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라고 합니다. 지금도 꿈속에서 과거의 악몽에 시달리다 종종 소리를 지릅니다. 그런 나를 아내가 흔들어 깨우는 일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가족은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 국가 차원에서 지원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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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초등학교 시절 사진 38년에 태어나신 아버지의 초등학교 졸업사진입니다. 작년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아버지, 우연히도 어머니도 27년 전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뜨셨습니다. 살아계실 때 그렇게 어머니를 그리워하셨는데 이제 만나셨겠죠? ⓒ 김승한

아버지는 작년 여름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막내 여동생은 작년 가을에 결혼 했습니다. 마음껏 축하하고 싶어서 둘째 오빠인 제가 노래를 불러주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임신 4개월입니다. 부디 따뜻하고 사랑이 넘치는 가정을 일구어 가길 기도합니다. 

전 지금의 아내와 결혼한 후 어릴 때 겪었던 사건들을 떠올리며 우리 아이들과 아내는 그런 상처를 받지 않게 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물론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통해 충분히 사랑하고 사랑받는 아이들이 되도록 할 겁니다.

입양에는 커다란 책임감이 필요합니다. 재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섣부른 결정은 아이에게도 자신에게도 씻지 못할 상처가 될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부탁 드릴 것은, 입양과 재혼을 통한 가족의 탄생을 당사자들만의 책임과 의무에 떠넘기는 것은 위험하다는 점입니다. 먼저 재혼, 입양가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인식전환이 필요합니다. 게다가 법률적 차원에서도 좀 더 신중한 접근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당사자들이 건강하게 새 가정에 적응할 수 있도록 심리치료 및 적절한 교육이 사회적 제도로 만들어져야 합니다. 준비 없이 무늬만 가족이 되었다간, 상당한 시간을 신경전으로 소모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관계의 미학(美學)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인간(人間)' 즉, 사람과 사람 사이입니다. 이것은 가족단위 공동체를 넘어선 국가 차원에서 시행되어야 할 일입니다.

덧붙이는 글 - 다음 시간에는 제 친구 중에 입양을 한 두 쌍의 부부에 대해 잠시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입양 후 상당한 시간이 지났는데 지금 심정이 어떤지, 아이들과 입양에 대해 공유할 시기가 올 때를 대비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입양 #재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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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음악, 종교학 쪽에 관심이 많은 그저그런 사람입니다. '인간은 악한 모습 그대로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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