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방안...라면을 먹는데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나는 고졸사원이다 ⑮] 독립

등록 2015.09.22 17:52수정 2016.05.24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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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서른넷 어느덧 벌써 30대 중반 나에겐 절대로 오지 않을 것 같았던 30대 중반 미친 듯이 일만 하며 살아온 10년이 넘는 시간 남은 것 고작 500만 원 가치의 중고차 한 대 사자마자 폭락 중인 주식계좌에 500 아니 휴짓조각 될지도 모르지 대박 or 쪽박


2년 전 남들따라 가입한 비과세 통장 하나 넘쳐나서 별 의미도 없다는 1순위 청약통장 복리 좋대서 주워듣고 복리적금통장 몇% 더 벌려고 다 넣어둬 CMA통장 손가락 빨고 한 달 냅둬도 고작 담배 한 갑 살까 말까 한 CMA통장 이자 외국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 친구놈 가끔 연락이 와 자기는 노가다 한대 노가다해도 한국 대기업 댕기는 나보다 낫대 이런 우라질레이션 평생 일해도 못 사 내 집 한 채" - 자작곡 <응답하라! 30대여~> 노랫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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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TV하나 없는 텅빈 방안에서 양은 냄비에 끓인 라면을 먹는데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 pixabay


불편해서 적응하지 못하던 기숙사를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생활정보지를 열심히 뒤지다가 구미시 임수동 조그만 마을에 보증금이 없는 18만 원짜리 월세방을 구했다. 내 수중엔 한 달 월급 받은 돈이 전부였기 때문에 보증금을 걸고 집을 구할 수는 없었다. 그런 나에게 딱 맞는 집이라 생각했다.

신문에 나온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더니 어떤 할머니가 전화를 받으셨다. 집을 보기 위해 위치를 물어 겨우 찾아갔는데 '구미에 이런 동네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아담한 시골 마을 같은 풍경이었다.

구미 1공단과 2공단 사이에는 낙동강이 흐른다. 그 낙동강 다리를 기준으로 공단동 쪽은 1공단이고 인동 쪽은 2공단이다. 1공단에서 2공단 방향으로 다리를 건너자마자 좌회전 하면 구미전자공고가 나오는데 구미전자공고로 들어가는 길 끝까지 들어가면 그 마을이 나왔다.

이 마을은 20여 채의 집들로 구성된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 있는 조그만 구멍가게가 이 마을 사람들이 유일하게 이용할 수 있는 '슈퍼마켓'이었다. 이 마을 입구까지 들어오는 시내버스는 하루에 4번뿐이었으며 그렇지 않으면 걸어서 구미전자공고를 지나 낙동강 다리 건너는 큰길까지 나가야 다른 버스를 이용할 수 있었다.


불편해 보였지만 나는 이 집에 살기로 했다. 가장 중요한 건 '돈' 때문이었지만 회사도 그리 멀지 않고 친구가 일하는 회사도 멀지 않은 동네였기 때문이다. 차를 타지 않고도 30분 정도 걸으면 친구네 회사 앞으로 갈 수 있을 만한 거리였고 큰길로 나가 버스를 타면 세 정거장 만에 회사에 출근할 수 있었다.

집주인 할머니를 만나 18만 원 월세를 내고 계약서도 없이 '구두계약'을 체결했다. 그 집은 주인집 마당 한 쪽에 샌드위치 패널을 이용해서 지은 방이었는데 총 4세대가 거주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나는 그중에 제일 안쪽 방에 살게 됐다.

기숙사에 돌아와 주섬주섬 짐을 쌌다. 짐을 싸는 나를 본 사람들이 어디 가느냐고 묻길래 기숙사를 나가서 살려고 방을 구했다고 말했다. 안 그래도 비좁은 기숙사였는데 내가 나간다고 하니 조금이라도 넓게 사용할 수 있겠다며 다들 좋아했다. 그래도 한 달이나 함께 살던 사람들인데 걱정을 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쩌다 보니 집을 나와 처음으로 혼자 살게 되었다. 방은 어떻게 18만 원을 주고 구했지만, 집에 살림살이가 하나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하물며 배가 고파 라면 하나 끓여 먹을 냄비 하나 없었다. 마트에 가서 양은냄비 하나와 수저 한 세트를 샀다. 다행히 이불은 집에서 가져온 게 있었기 때문에 사지 않아도 됐다.

이전에 살던 사람들이 나가면서 장롱을 그대로 두고 갔다. 생각보다 상태가 멀쩡한 장롱이었는데 주인집 할머니가 필요하면 쓰라고 했다. 그렇게 운 좋게 장롱이 생겼다. 조그만 방 하나에 주방 하나 욕실 하나. 혼자 살기엔 적당한 크기의 집이었다.

내 집에서 처음으로 라면을 끓였다. 그러고 보니 냄비는 사 왔는데 밥상이 없어서 식기 건조대를 가져다 냄비를 올려놓고 먹었다. 그렇게 김치 한 조각 없이 TV 하나 없는 텅 빈 방안에서 라면을 먹고 있는 내가 너무 처량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정말 보고 싶었다.

스무살 겨울... '생존'과의 싸움에 조금씩 지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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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길 오후 근무를 마치면 시내버스가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4km나 되는 밤길을 터벅 터벅 걸어서 퇴근하곤 했다. ⓒ pixabay


기숙사를 나와서 살다 보니 매일 출퇴근 할 때 교통비가 추가로 들어갔다. 회사 통근버스의 노선이 여길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큰길까지 나가서 시내버스를 이용해야 했다. 시내버스를 이용해 출퇴근을 하다 보니 오전 근무와 야간 근무는 괜찮았는데 오후 근무 때가 문제였다.

오후 근무를 하면 11시에 퇴근을 한다. 퇴근 후 뒷정리를 하고 버스정류장까지 나오면 11시 30분은 훌쩍 넘게 되는데 그 시간에 다니는 버스가 없었다. 회사에서 집까지는 약 4km 정도 되는 거리다. 깜깜한 밤중에 택시비를 아끼기 위해 터벅터벅 걸어서 집에 오곤 했다.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어 가며 2달 월급을 꼬박 모아 구미 시내에 있는 중고 가게에 갔다. 중고 가게에서 내 방에 채워 넣을 가구들과 전자제품을 구매했다. 세탁기, TV, 선반 그리고 침대도 샀다. 중고 가게인데도 한꺼번에 많은 살림살이를 구매하니 용달차에 싣고 집까지 배달해준다고 했다.

시내에서 우리 집까지는 버스를 타면 한참을 가야 했으므로 배달 가는 차를 타고 함께 들어가기로 했다. 중고 가게 사장님이 차에 짐을 싣는 동안 근처에 있는 주방용품점에 가서 식기세트와 냄비 등 주방용품도 함께 구매해서 집으로 왔다.

2001년. 스무 살 초가을에 '병역 특례'를 받기 위해 무작정 집을 떠나 타지에 왔다. 하지만 내 계획은 틀어졌고 그렇게 두 달이 넘는 시간이 흘러 버렸다. 월 18만 원짜리 월세방에 내가 필요한 살림살이들이 채워졌지만 계획에 없던 '생존'과의 싸움에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자작곡 '응답하라! 30대여~' 듣는 곳
http://www.bainil.com/album/365
#기숙사 #월세 #라면 #중고 #생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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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콘텐츠 대표 문화기획과 콘텐츠 제작을 주로 하고 있는 롯데자이언츠의 팬이자 히어로 영화 매니아, 자유로운 여행자입니다. <언제나 너일께> <보태준거 있어?> '힙합' 싱글앨범 발매 <오늘 창업했습니다> <나는 고졸사원이다> <갑상선암 투병일기> 저서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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